소설리스트

고3들이이세계로전이됨-139화 (139/178)

〈 139화 〉 36. 천제의 유산 (4)

* * *

[이제는 너희가 하늘의 의무를 다할 차례다.]

유령의 기나긴 역사 이야기는 생동감이 넘쳐서 썩 괜찮았으나, 그 결론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보고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서 세상을 위해 희생하라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번에야말로 마계를 이 세상에서 지우는 거다.]

멸망 직전의 원시 인류를 무려 300년 동안 보살피고, 그 끝에 대륙을 괴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천제의 고결한 의지는 존중한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세계와 제국은 없었겠지. 그에게 감사하고, 또 존경스럽다.

그런데 그거랑 이거는 다른 문제지.

나는 이곳에서 초월적인 힘을 손에 넣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아무런 고생 없이 제국의 누구보다도 강해져서 마음대로 살려고. 평생 높은 지위와 권력, 흘러넘치는 부, 그리고 예쁜 처녀들한테 둘러싸인 방탕한 생활을 즐길 거란 말이다.

의무? 희생? 그딴 단어들은 내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건 민호보고 하라고 해.

"아이리스? 이건 대체 무슨 말이야?"

나는 나를 월신전으로 데리고 온 아이리스에게 물었다.

그녀는 출생과 계약 이야기로 정신적 트라우마를 자극 받았을뿐더러, 개소리까지 들어서 그런지 표정이 몹시 안 좋아 보였다.

"저··· 저도 잘은······. 처음 듣는 얘기예요."

이런. 이거, 처벌이 필요하겠네.

유산 습득 과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나를 곤란한 상황에 빠트리다니. 돌아가면 침대에서 잔뜩 괴롭혀야겠다.

나와 아이리스가 당황하는 사이, 천제가 사라진 지상의 시간은 몇만, 몇억, 아니 그 이상의 엄청난 배속으로 꾸준히 흐르는 중이었다.

인류의 국가는 현인신의 부재로 약간의 혼란을 겪었으나, 이로 인해 처참히 붕괴될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아직 극소수의 괴물들이 대륙에 남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발달된 문명의 군대로 충분히 감당 가능한 숫자였다. 궁지에 몰린 마계의 잔재들은 하나둘씩 세상에 적응하면서 오늘날의 마수로 명맥을 이었다.

'아카데미 숲의 고블린들도 저것들의 머나먼 후손인 건가.'

포식자가 사라진 인간들은 끊임없이 세력과 영역을 넓혀서 종국에는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후, 인류는 사는 터전의 환경에 따라 점차 세 개의 공동체로 분열되었다.

사람들은 크게 나누면 각각 평지, 돌산과 사막, 그리고 숲에 살면서 서로 다른 생활 양식을 발달시켰으며, 이는 심지어 신체의 구조와 형태에도 작지 않은 변화를 초래했다.

'미친, 뭐야?!'

나는 순간 유령의 허튼소리마저 까먹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천제의 희생 후 많은 세월이 지난 지상의 풍경은 그만큼 경악스러웠다.

평지의 인간들은 현대의 인간들과 별 다를 게 없었으나,

돌산과 사막의 인간들은 짐승의 귀와 손발톱과 꼬리가 달린 수인이 되었고,

숲의 인간들은 길쭉한 귀를 가진 엘프로 진화했다.

'제국에는 인간밖에 없는데?!'

수인과 엘프는 판타지 세계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기 많은 설정이지만, 이세계에는 그런 종족 없다고 들어서 조금 실망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모습을 보이다니? 설마 오늘날에도 대륙의 어딘가에 존재하나? 아니면 옛날 옛적에 멸종한 건가?

조금씩 산으로 가던 나의 사색은, 천제의 잔류 사념이 끼어들면서 흐트러졌다.

[대답은?]

세계를 구하기 위해 이 한몸을 바칠 것인가.

만약 싫다고 답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달에서 탈출할 수는 있을까? 저 유령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안 된다.

"그 전에, 질문이 있습니다."

우선 시간을 좀 끌어 볼까.

"[하늘(?)]의 각성자들과 천신이 마계를 물리치는 동안, [대지(?)]의 신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까?"

괴물들은 창공이 아니라 땅을 뒤덮고 유린했으니까, 오히려 하늘보다는 대지가 마계 박멸에 혈안이 되어야 정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지(?)] 속성은 뭡니까?"

아이리스도 정확히 답변하지 못했던 질문.

[······대지는 하늘의 대적자다.]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니었는데 답이 나와서 놀랐다.

대적자라니. 이는 혜린이 공략에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하늘은 운명을 창조하고, 대지는 운명을 파괴한다. 하늘은 만물을 지배하고, 대지는 만물을 소멸시킨다. 하늘이 일선을 넘었을 때, 대지가 온 세상을 무無로 되돌린다.]

유령이 만든 가상 세계의 하늘에 떠다니던 나와 아이리스의 몸이 멋대로 수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대지는 하늘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마치 낙하산 없이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런 보호구 없이 땅바닥에 부딪혔을 때의 충격은 전무했다. 우리는 지면을 허상마냥 '관통'하여 끊임없이 지하로 깊숙이 떨어졌다.

[사물과 그림자처럼, 하늘과 대지는 항상 쌍으로 태어난다. 또한 대지는 언제나 하늘보다 강하며, 절대로 약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천제의 대적자인 [대지(?)]의 괴물은 아직 살아있다.]

이대로 지각을 넘어서 맨틀까지 곤두박질하는 거 아닌가 싶었을 때,

갑자기 광활한 공동이 나타났고, 우리는 그제서야 낙하를 멈춘 채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

황도 카이라펠리움의 황궁 구역보다도 넓은 공간 안에는, 어떤 거대한 괴물이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마계의 검은 괴물 따위는 잠결의 콧김만으로 도륙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존재.

[지룡?? 가이키에스트라···. 천제와 천룡을 척살하고 세계를 초기화하기 위해 대지가 창조한 존재다.]

시종일관 잔잔했던 나레이션이 최초로 흔들렸다. 아무래도 유령은 스스로가 가상으로 구현한 형체로도 공포를 느끼는 듯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비주얼이었다.

지룡의 생김새는 동양풍의 용 같았으나, 그보다 훨씬 사납고 포악하며 파괴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멸망의 신이 존재한다면 바로 저것이 아닐까 싶었다.

저 괴물이 하늘의 적이라고?

[만약 너희가 하늘의 의무를 도외시한 채 세계의 고통을 방관한다면······ 가이키에스트라가 잠에서 깨어나 세상을 파괴할 것이다······ 그러니 얼른 천제의 유산을 받고 교미하여 새로운 하늘을 낳은 뒤 제물ㅡ 아니?!!]

그때, 지룡의 머리에 박힌 여덟 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시뻘건 시선들이 모조리 나와 아이리스를 향했다. 직후, 칠흑의 기운이 순식간에 그것의 주변에서 뭉치기 시작했다.

온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안 돼!!!"

아이리스가 속성을 끌어올리며 황급히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이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에 불과했다.

마치 태양 앞의 반딧불이가 된 기분이었다.

만물을 파괴하는 검은색 파동이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이며 우리에게 쇄도했고,

"허억···!!"

나는 두 눈을 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월신전의 테라스였다.

우리는 천제의 잔류 사념이 만든 꿈 속에 있었다. 모든 게 허상이었으나, 이를 순간 망각할 정도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정말 저런 게 대륙의 지하에서 잠자고 있다고? 절로 경각심이 생겼다.

우리의 희생 의지를 고취하기 위한 유령의 연출은 꽤나 효과적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역시 가이키에스트라··· 꿈 속에서도 지배할 수 없는 존재······ 두렵고 두렵도다······.]

연출···이 아닌가?

유령의 반투명한 형체가 마치 잔잔한 물웅덩이에 돌이 던져진 것처럼 일렁거렸다. 그가 공포에 몸을 떠는 모습을 우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흠흠······. 이제 너희도 깨달았을 것이다. 최대한 신속하게 마계를 지워야 하는 이유를.]

유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기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거들먹거렸다. 그를 향하는 내 눈빛은 차가웠다.

"그냥 이대로 계속 마계 봉인진을 유지하면 안 됩니까? 지금까지처럼만 하면 땅 속의 도마뱀도 안 튀어나올 것 같은데."

[도마뱀···! 흠. 그건 불가능하다. 마계를 옭아매는 그물은 조금씩 약해지는 중이다. 300년 전에는 봉인을 뚫고 지상으로 몇 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다.]

300년 전이라는 말에, 자연스럽게 마왕이 떠올랐다. 그때 대륙에서는 인류의 명운을 걸고 마왕과 용사, 마수와 군대가 격돌하는 성마대전이 발발했다고 배웠다. 그게 다 적월赤月 때문이었다니. 역사학 교수가 들으면 기절초풍할 얘기다.

아무튼, 정리하면.

천제와 천룡이 아이리스를 낳고 스스로를 제물로 삼아 천신의 힘으로 마계를 봉인했으나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잔류 사념이 박은 계약 때문에 그동안 아이리스가 봉인을 관리했고, 수천년 후에 내가 소환되어 [하늘(?)] 속성을 각성했다.

봉인진은 실시간으로 약해지는 중이며, 만약에 내가 마계를 방관한 채 제국에서 놀고 먹고 섹스하기 바쁘면 대지의 룡이 세계를 멸망시킬 거다.

그러니까 당장 아이리스와 섹스해서 새로운 [하늘(?)] 속성의 아이를 낳은 뒤, 재차 스스로를 희생하여 마계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해라.

'외통수···인가?'

바로 활로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유령의 말대로 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 보인다. 아이리스가 나를 흔들리는 눈동자로 바라봤다.

힘만 홀라당 먹으려고 왔다가 이게 뭔 낭패지.

1. 고결하게 세상을 구원하고 산화한다.

2. 잠깐의 주지육림 라이프를 즐기다가 예정된 멸망을 기다린다.

둘 중에 굳이 고르라면 나는 후자가 취향이긴 한데······.

싫다.

나를 훈계하는 저 틀딱 유령도,

놈이 강요하면서 들이민 선택지도,

그리고 지룡을 보고는 몸을 떨어버린 나 자신도,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보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고? 아니면 가만히 있다가 죽으라고?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본능적이고 생리적인 거부감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둘 다 거부한다.

애당초, 하늘의 근본은 지배 아니었던가?

부와 권력과 명예를 차지하고, 여자를 지배하면서 성장한 삶의 끝이 희생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세상에 괴물이라는 독을 푸는 마계든, 아니면 콧털이 밟히면 세상을 멸망시킬 지룡 가이키에···뭐시기든.

만물을 지배하는 [하늘(?)] 속성의 소유자라면, 둘 다 지배하고 평정할 궁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앞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서 몸을 덜덜 떠는 꼬락서니라니······. 저딴 게 천제의 잔류 사념?

"꼴사납네···."

[······뭐라?]

나의 스산한 중얼거림에 유령이 반투명한 눈을 부릅떴다. 매서운 기운이 나를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하늘의 '의무'라고? 대체 누가 드높은 하늘한테 의무를 강요한다는 거냐? 하늘은 만물의 위에 군림하면서 지상의 숭배를 착취하기만 하면 되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입술이 저절로 열리면서 하늘에 대한 나의 가치관이 언어로 술술 나왔다.

이 감각은, 그래. 아카데미 입학 연회에서 혜린이한테 접근하는 남자를 봤을 때나, 지혜를 목표로 하는 저주를 발견했을 때처럼, 머리보다 몸이 먼저 행동하는 느낌이었다.

나의 [하늘(?)] 속성에서 우러나오는 본능.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머리와 몸이 동시에 움직였다.

"마계든, 지룡이든, 아님 내 대적자인 혜린이든. 전부 지배하면 해결되는 거잖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천제조차도 300년 간 이루지 못한 위업을, 고작 각성한 지 반년밖에 안 된 네놈이 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인가?]

"응."

[오만방자한!]

그러나 유령의 격노와는 다르게,

쿠구구구······.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월신전이, 아니 월면 전체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마치 내 말이 정답이라는 듯, 허공에 찬란한 광채를 내는 하늘색 보석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이 바로 내 경지를 몇 단계 초월시킬, 천제의 유산이라는 사실을.

나는 드넓은 창공을 향해 팔을 뻗었다. 보석이 내 의지에 감응하여 내쪽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그러나,

[너는 교육이 필요하다!]

천제의 잔류 사념이 나와 보석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놈에게서 또 다시 하늘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다시 한 번 유령이 만든 가상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네가 마음 속 깊이 바라던 이상! 그 이상이 그대로 구현된 세계! 너의 꿈이 마계와 지룡의 앞에서 처참히 무너지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라!!]

노인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전혀 신경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안녕히 주무셨어요, 주인님?"

혜린이가 눈 앞에서 음란한 메이드복의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침봉사 시작할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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