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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32화 (32/1,410)

〈 32화 〉 저주라 여겼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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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며칠이 지났다.

무리슈엘라는 나날이 차오르는 성욕에 억지로 다이크와 관계를 나누기도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때 잠시뿐이었다. 이 채워지지 않은 성욕은 마치 무리슈엘라를 비웃는 것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도대체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는지 저주받은 몸뚱어리는 자꾸만 그 이상을 바라곤 했다. 그러더니 괜스레 어느덧 한 가지 질투를 만들게 되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터무니없는 질투였으나, 이상하게도 이 질투는 아주 미세하게 시작해서 점차 그 크기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점심 식사 때였다. 무리슈엘라의 냉정함을 잃은 눈빛이 잠시 유진과 엘리시아에게 이르렀다.

그날 유진과 엘리시아의 터무니없는 행위를 보았던 이후, 둘의 사이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도 식사를 하다말고 서로를 바라보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물론 하는 행동이 마치 이미 결혼이라도 한 듯 조신하지 못한 엘리시아의 노골적인 행동이 자꾸만 무리슈엘라의 신경을 건드려 괜스레 짜증을 일게 했다.

특히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유진의 하체 즉 허벅지에 닿아 자꾸만 꼼지락거리며 위로 향할 때마다 무리슈엘라의 마음에 짙은 균열을 일게 했다.

결국, 무리슈엘라가 식사를 하다말고 신경질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니 탕! 하는 소란과 함께 화목하던 식탁 위가 금세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어 모두의 시선이 무리슈엘라에게 향했다. 껌뻑껌뻑 동그란 눈을 몇 번이나 껌뻑이며 그녀를 바라보니 무리슈엘라가 잔뜩 짜증이 인 얼굴로 엘리시아에게 소리쳤다.

"엘리시아. 유진! 식사 때에는 서로 따로 앉거라."

"예? 가, 갑자기요?"

무리슈엘라의 말에 엘리시아가 당황해 되묻자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며 말을 이었다.

"식탁 위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을 거면, 앞으로 계속 따로 앉거라."

"죄, 죄송해요. 다음부터 안 그럴게요.. 어머니."

유진은 바로 사과했으나 근래 들어 반항기에 접어들었는지 엘리시아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사과는커녕 불만 가득, 퉁명스럽게 뜬 눈으로 어머니인 무리슈엘라에게 향했다. 그 눈빛이 도대체 왜 그러냐며 이유를 묻는 것 같으니 무리슈엘라의 차갑게 내려앉은 눈빛이 엘리시아에게 이르러 자그마한 불꽃을 일게 했다.

"꽤 불만이 있는 표정이구나 엘리시아?"

먼저 무리슈엘라가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무척이나 짙은 불쾌감이 담겼다.

"어머니 요즘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이렇게까지하지 않으셨잖아요?!"

이어 엘리시아가 쏘아붙이듯 뾰족한 목소리로 받아치며 무리슈엘라에게 대들었다. 그래서 그럴까? 그녀가 이렇게 대드는 모습이 처음인지라 무리슈엘라도 잠시 당황했으나 금세 표정을 바꾸었다. 오히려 더욱 냉랭해진 표정과 분위기로 그녀를 바라보니 괜스레 그곳에 같이 있던 다이크와 아리사 그리고 유진만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어디서 말대답을 하는 것이니? 엘리시아! 내가 널 잘못 가르쳤구나!"

"그게 아니잖아요! 요즘 제가 하는 행동마다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별것도 아닌 것에 자꾸 방해하시니까! 이러는 거 아니에요?! 도대체 제가 무슨 잘못을 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네 나이가 몇이니?"

무리슈엘라가 물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짙은 분노가 담겨 있자 엘리시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올해로 18살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 나이가 적지 않은 것을 알겠구나? 그런데 언제까지 어린 애처럼 행동하려 하는 것이니?! 유진이나 아리사에게 네가 첫째로서 본보기를 보여야지! 오히려 버릇없게 어머니에게 대들기나 하고! 내가 정말 널 잘못 가르쳤구나?! 아무래도 빨리 널 다른 곳에다 시집이라도 보내야 철이 좀 들겠니?!"

무리슈엘라의 호통에 엘리시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 올랐다. 동시에 식탁을 강하게 내려치며 몸을 일으켰다.

"싫어요! 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을 거에요!"

"어디서 말대꾸를 하니!"

"여, 여보.. 진정 좀 해요, 엘리시아, 너도 어머니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야! 어서 죄송하다 사과해!"

이내 보다 못한 다이크가 나서 둘 사이를 중재하려 했으나 이미 불꽃이 터져버린 둘의 사이에 짙은 불만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에 다이크마저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무리슈엘라의 눈치를 보았다.

엘리시아 역시 이대로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근래 들어 자신의 행동을 영 못마땅하게 하는 어머니가 쉽게 이해되지 않은 것 같았으며 무리슈엘라 역시 괜스레 그녀에게 일어나는 질투를 숨기려 오히려 더 모나게 굴었다.

그 사이에 낀 가족들만이 안절부절못했으나, 쉽사리 둘 사이에 자리한 불만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 크기를 더욱 부풀리기 시작하니 날 선 분위기에 자연스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도대체 제가 무엇이 그리 문제에요!"

"하나부터 열 가지! 지금 이렇게 대드는 것도 전부!"

"이잇!"

"당장 네 방에 가서! 네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라!"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엘리시아!!"

끝내 더욱 언성을 높인 무리슈엘라의 목소리가 거대하고도 차가운 북풍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따듯함이 가득한 저택에 알 수 없는 냉기가 휘몰아쳐 옷깃을 펄럭였다. 이어 드리워지는 무리슈엘라의 몸 주변에 거대한 분노가 검날을 만들어 엘리시아아게 향하니 가족들 모두 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이 처음인지라 멀뚱히 그녀를 바라만 보며 어찌해야 할 줄 몰라 했다.

특히 아리사는 놀라 몸을 벌벌 떨 정도였으나 무리슈엘라는 그런 모두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시아를 향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당장! 네 방으로 가거라! 그리고 나오지 말 거라! 네 잘못을 알 때까지 나오지 말 거라!"

온몸을 짓누르는 날 선 목소리가 엘리시아에게 이르니 결국 그녀가 눈물을 보이며 방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를 유진이 따라가려 했으나 무리슈엘라가 엄하게 소리쳤다.

"당분간, 엘리시아와 함께 있지 말거라! 유진!"

"예?.. 하, 하지만... 왜.. 요.."

"하! 너까지 내 말에 토를 달려는 것이야?! 엘리시아 탓이구나!"

유진 역시 그런 그녀가 쉽게 이해되지 않아 되묻자 그 고왔던 얼굴이 마치 험상궂게 일그러지자 흠칫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안 그럴게요."

"..."

언제나 자상하고 자애로웠던 그녀가 오늘따라 유독 언성을 높였다. 아니 이렇게 화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한편, 그런 무리슈엘라의 모습이 익숙지 않았는지 아리사가 울상이 되어 요정 엘리사와 함께 다급히 식당을 나섰다.

"허허.. 무리슈엘라. 요즘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려?"

결국, 다시금 다이크가 나섰다. 그동안 무리슈엘라의 행동이 그 역시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을요?"

그러나 오히려 그녀가 되묻는다. 동시에 보이는 표정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싸늘한 시선이 담겨 있자 다이크는 괜스레 흠칫 놀라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자신의 아내이기도 하고 자신 역시 제국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공작 가의 집안이지만, 무리슈엘라가 화를 낼 때면 무섭기만 했다.

특히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찌푸리는 것보다. 지금처럼 싸늘하게 뜨여진 시선을 마주할 때면 말이다. 연애할 때에도 그러했다. 오히려 화를 내면 낼수록 차가워지고 무심해지는 그녀의 눈빛은 다이크로서는 그녀가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니 연애 초창기에도 그러했는지 지금도 오죽할까?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러면서도 의문이다. 도대체 무엇에 화를 내는 거지? 의문을 가진 채 끝내 멋쩍은 얼굴을 한 다이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허허.. 내 엘리시아에게 잘 타이를 테니 제발 화 좀 푸는 게 어떻겠소... 요즘 들어 유독 엘리시아에게 너무 엄격하게 구는 것 같소. 그러니 엘리시아도 이해하지 못한 거고."

"이제 그 아이는 애가 아니에요! 슬슬 공작 가의 여식으로서 저렇게 방탕하게 생활할 수 없지요. 지금이라도 조신할 수 있도록 예의를 배워야 해요 다이크! 오히려 늦은 것일 수 있어요."

아무리 좋게 타일러도 무리슈엘라의 모습은 무척이나 확고하기만 했다. 그러니 다이크는 그녀의 말이 다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계속해서 그녀를 다독이려 애를 썼다.

"다 맞는 말이오.. 그런데 무리슈엘라.. 당신이 예전에 예의범절은 억지로 배우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지금 당신의 모습은 그때의 말과 정반대로 보이는 것 같소, 게다가 엘리시아 역시, 요즘에 최대한 예의 바르고 조신하게 행동하기도 했고 말이오. 사실. 당신이 왜 화를 내는지 난 이해가 되지 않구려.."

다이크의 말에 무리슈엘라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이르다가 유진을 보았다. 유진 역시 다이크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당신은 만족할지 몰라도. 전 만족스럽지 않아요! 18살이면 이제 어엿한 여인이에요. 아니 오히려 혼기가 늦어진 상태에요. 심지어 프레이야라면 이미 애를 낳고도 남을 나이지요! 그는 슈리엘 가문에 흠이 되지 않도록 조금 더 조신해질 필요가 있어요."

"허허..여보..여기는 프레이아가 아니라 하이란이지 않소.."

"하이란도 충분히 어른으로 쳐요!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나이요. 성인이란 말이오."

아무리 그녀를 살살 타일러도 잔뜩 화를 내는 표정은 무척이나 단호해 보였다. 아무래도 쉽게 화를 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다이크는 그녀가 왜 이리도 엘리시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내 그의 눈빛이 유진에게 이르렀고 유진 역시 다이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자기도 어머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무리슈엘라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저도 올라가겠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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