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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66화 (66/1,410)

〈 66화 〉 난 지옥에서 돌아온 자다. 4

* * *

점차 가까워지는 손, 곧 자신의 손에 쓰러질 유진을 기대하며 즐거운 상상을 그렸다. 이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실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르킨의 뜻대로 되진 않았다. 과거 때와는 무언가 달라진 모습이 왠지 모를 불안함을 일게 했다. 그 순간 마치 세상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슬로우 모션을 보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이 답답할 정도로 느려졌으나 그런 자신의 시간과는 다르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유진의 모습을 보며 뒤늦게 지금의 상황이 과거처럼 흐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습하는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시작은 갑작스레 번뜩이는 궤적으로부터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촤아악!­

유난히 느리게 느껴지는 몸의 반응 속도에 욕지기를 토해내면서도 차마 피할 수 없었다. 번뜩이는 궤적과 함께 눈앞을 멀게 하는 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아르킨의 눈가가 놀란 토끼 눈 마냥 커져 올랐다. 동시에 핏물이 눈앞에 꽃잎이 흩날리는 것처럼 흩날리다. 이내 흐드러지며 사라졌다.

이어 느려진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뒤늦은 고통이 다가왔다. 아르킨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사색이 된 얼굴로 이곳이 슈리엘 저택 안이라는 것도 잊은 채 고통에 겨워 뾰족한 비명을 토해냈다.

난생처음 느끼는 극심한 고통이었다.

"끄아아아악!"

화원을 울리는 고통에 찬 비명, 아르킨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잘린 오른팔을 부여잡고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치다 풀썩 넘어졌다. 동시에 핏물이 묻은 꽃잎이 확 하니 피어올라 바람에 휘날리다 나풀거리며 내려앉았고 하늘 높이 떠오른 검은 고깃덩이로 보이는 자신의 잘린 팔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꽃잎처럼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후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살기 가득한 시선, 도무지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등골에 오싹함을 느꼈다.

"어, 어떻게?! 끄으윽!"

"살기가 느껴졌더니... 네놈이었구나? 그나저나 네놈은 누구지?"

목소리에 담긴 차가움이 도무지 어린아이답지 않았다. 진검을 든 채, 사람의 손을 베어도 무심하게 뜨여진 눈은 굉장히 올곧았고 깊어 마치 살인을 경험한 숙련자의 눈빛이었으며 사냥꾼의 눈이었다. 그러며 자신에게 이른 눈빛은 죽어가는 사냥감을 보는 무심함이 담겨 있었다.

아르킨이 고통스러운 팔을 부여잡은 채 깨달았다. 사냥감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 아이가 갑작스레 뜀박질을 멈추고 이렇게 탁 트인 화단에 멈춰 선 것도 모두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무척이나 노련하고 잔인한 사냥꾼이었다.

유진이 익숙하게 검을 꼬나쥐고 깊게 눌러쓴 후드를 걷어낸다. 그러자 자신이 암습한 것보다 더 놀라 하는 눈치다. 혹여나 자신을 아는 것일까? 혹 지난 과거에 자신을 보았던 걸까? 아르킨이 고통에 겨워하면서도 유진의 반응에 의아함을 품었다.

"넌.."

"크흐...."

자신의 얼굴로 바라보는 유진의 눈빛이 짙은 동요가 일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아는 눈치였으나 아르킨은 지금 그것에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특히 잘린 손에서 피는 계속해서 흘러나왔고 고통 역시 심해 이러다가 쇼크사할 것 같았다. 창백해지는 안색으로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다. 조금 전 고통에 찬 비명이 크긴 했으나 아직 저택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도망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주로 사용하는 손을 잃었다고 해도 왼손만으로 어린아이 정도는 거뜬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겼고 더 늦기 전에 잘린 팔을 이어 붙이고 치료받으면 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불구가 되진 않으리라 여겼다. 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구르며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어떻게... 왜...? "

한편 유진은 아르킨의 모습을 보고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 때문이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던 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더욱 동요가 심했다.

그 순간,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교단에 꾐에 넘어가 알 수 없는 동굴에 갇혀,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했던 때였다.

그곳에도 나름 치료사가 있었다. 주로 자잘 자잘한 상처나 뼈마디가 부러지거나 할 때 치료를 해주던 사내였다. 매번 힘든 훈련과 위험천만한 훈련이 병행되니 치료가 필요한 이가 많았기에 그곳에 갇힌 이들 역시 자주 보던 사내였고 절대 잊을 수 없는 사내였다. 유진 역시 그에게 여러번 치료를 받았으니 어찌 저 얼굴을 잊으랴? 물론 그때와 달리 지금은 더 젊어 보이긴 하나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사내를 싫어했었다.

이 사내는 특히 더는 검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불구가 된 아이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것을 즐겨했다. 물론 그가 데려가면 아이들은 다신 돌아오지 못했다. 언뜻 듣기에는 인체 실험, 또는 키메라 연성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듣기로는 키메라를 만드는데 아이들의 피와 몸을 쓴다고 들었고 키메라의 먹이가 인간이란 소리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치료사이면서도 그 누구도 이 사내를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워했고 두려워했다. 차라리 불구가 될 바에 죽는 것을 택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유진 역시 그러했다. 가끔 자신이 크게 다쳤을 때에는 부디 죽여달라고 했으니 말이다. 물론 불구가 된 적은 없었기에 살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이 사내는 그곳에 갇힌 이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어쩌면 교단의 교주, 또는 교관들보다 더...

"당신이라니.."

그리고 이 자가 더욱 용서받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말이다. 그 역시 잊을 수 없었다. 이 자가 바로 다쳐 불구가 된 아를란을 데려갔던 자였으니까...

그 지옥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친구가 되고 빛이 되어준 아를란을... 그녀를 데려간 사내가 아르킨이 자였고 결국, 아를란은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유진이 지옥에서 살아남아 교단에 실적이 쌓아 갔을 때, 다시 이 사내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 아를란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 사내에게 물었었다. 데려갔던 아이들은 다 어떻게 되었냐고. 그 말을 물을 때까지는 적어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적어도 다른 일을 맡기진 않았을까? 하물며 시녀가 되던가 말이다. 허나 아르킨에게 돌아온 대답은 한동안 충격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런 더러운 새끼들을 내가 어떻게 알아? 키메라가 되었거나 먹이가 되었을 테지. 키메라는 사람의 피를 가장 좋아하거든! 낄낄! 아무래도 먹이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메라가 되었거나? 킥킥!!"

비아냥 섞인 웃음과 함께 토해낸 역겨운 말에 악취가 느껴지는 것 같았으며 커다란 비수가 되어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러므로 잊혀지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말이다.

새로운 생을 가졌지만, 잊을 수 없었다. 일부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일부로 아를란을 떠올리려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그녀가 종래에 어떻게 되었는지 아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기억은 여전했으며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그에게 뿜어져 나온 악취 그리고 비수가 되어 심장에 박힌 목소리는 여전히 마음을 아프게 했다. 성난 분노를 일게 했다.

그러니 어찌 이 사내를 잊을 수가 있을까?. 그때에도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죽였거늘....

"아르킨.."

"...!"

나지막이 중얼거린 목소리에 살 길을 찾던 아르킨의 눈동자가 다시금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어떻게 자신을 아는지 궁금한 것일까?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자신을 주시했다.

"크흑.. 어, 어떻게 날... 아는 거지?"

"모를 리가 있을까?? 내가 어찌 당신을 잊겠어?"

"...무슨 소리냐!"

/////

이 아이는 자신을 알면 안 되었다. 교단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자신을 알면 안 되었다. 허나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이 아이가 자신을 아는 것인지? 그것도 슈리엘에서? 충격이다. 만약 이 아이가, 그리고 슈리엘이 교단에 대해 안다면 어떻게든 살아서 교단에게 이러한 중요 정보를 알려야 했다.

슈리엘이 교단을 안다는 것은 하이란 제국이 안다는 것이고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정보는 교단에서도 알지 못하는 정보였으니 말이다. 혹시, 일부로 이렇게 허술한 경비를 세운 것도 함정은 아니었을까? 아르킨의 등골에 오싹함을 느꼈다. 이 어린아이가 자신의 손이 베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참으로 운명이 얄궂어..."

"무, 무슨 소리지."

아직도 충격에 빠져 멍하게 뜨여진 눈으로 유진이 아르킨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죽을 운명이란 것을..."

"무슨 개소린지 모르겠군!! 크흑.. 조금 전은 내가 방심했을 뿐이다."

"그래.. 당신의 버릇이었지..."

"뭐?"

이 아이는 도대체 뭐길래 자신의 버릇조차 알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방심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군.."

"무슨 소리지... 미치기라도 했더냐?! 네놈은 어떻게 누구냐?! 도대체 정체가 뭐지? 어떻게 날 아는 것이냐!"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소리치자 유진의 눈가가 진득한 살기를 토해낸다. 그리고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너희 교단을 무너트릴 자다."

무심히 토해진 목소리에 아르킨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슈리엘은... 교단을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럴 리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당황스럽고도 의문이 가득하다. 허나 일단 사는 것이 우선이니 그가 다급히 왼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지근 거리 앞까지 다가온 유진의 목을 향해 왼손을 뻗어냈다.

"죽어!"

교단의 비밀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기 전에 아이를 죽여야 했다. 슈리엘 가문?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죽여야만 했고 어떻게든 이 사실을 교단에 말해야 했다! 그러니 악에 받친 외침와 함께 검을 뻗으니 살벌한 궤적이 이어졌다.

허나, 그러한 노력에도 그는 미리 이럴 줄 알고 대비했는지 무심한 얼굴을 들어 너무나 손쉽게 검을 쳐낸다.

"이런!"

제대로 힘이 받지 않은 아르킨의 검이 청량한 소리와 함께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다시금 아르킨의 얼굴에 절망감으로 가득 찼다.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그마저도 허무하게 날려 버리니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동시에 잘린 팔에 흘리는 피가 많아져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끄윽!"

낭패감이 가득 차올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으나 어떠한 해답도 내놓을 수 없었다. 자신 이렇게 멍청했던 걸까? 그래도 교단에서 머리로는 수위를 다툴 자라 생각했거늘..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수가 동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이들과 함께 왔어야 했거늘..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어 들었으나 이미 늦어 뒤늦게 후회한들 소용없었다.

"이번에도 방심했나? 아르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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