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첫 인상은 그저 특이하다. 였었다..
* * *
"이쪽으로 가면..."
조심스럽게 발꿈치를 든 걸음을 옮겨 자연스럽게 지하로 향했다, 그리 어렵지 않았고, 으스스한 분위기는 곧잘 적응되었다. 기나긴 복도를 지나 지하로 가는 입구에 이르렀다. 마치 지옥의 입구로 들어서는 듯한 섬뜩한 분위기를 느꼈다. 조금 전부터 강해지는 바람은 자꾸만 웅웅 거리며 누군가의 곡소리로 들렸지만, 더 걱정인 것은 경비가 언제 문을 잠글까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무서워할 새도 없이 곧장 아래로 향했지만, 긴장 때문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고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며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등 뒤가 축축해져 찝찝함이 일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뎌 지하에 이르렀다.
지하는 다른 층과는 달리 거대한 운동장처럼 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수많은 기둥이 건물을 바치고 있는 형태였으며 놀랍게도 그 널찍한 공간에 거진 반 가까이 가득 채울 정도로 여러 폐자재를 비롯해 망가진 책상과 의자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도중 희미한 등불은 언제 꺼질지 모른 채 몇 번이고 깜빡깜빡거렸고 그 사이로는 수많은 집을 지은 거미들이 도시를 이루고 있었다. 그 도시에는 각종 벌레들과 쥐들도 함께해 역겹고도 섬뜩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벌레와 쥐들의 지하 도시였다.
"이크.. 이걸 생각하지 못했네."
그러한 터무니없는 광경에 몸을 부르르 떨며 유진이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회귀 전에는 거슬리는 것들은 다 검으로 베어내었고 귀찮은 일은 다 수하들에게 시켰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였고 당연하게 수하는 없었다. 게다가 그때만큼 요란스럽게 할 수 없었고 오히려 최대한 소음을 줄여 몰래 해야 했으니 더욱 난감했다.
만약 조금이라도 소음이라도 냈다가는 당장 학교 경비병을 비롯해 소아렌을 지키는 황궁의 기사단까지 출동해 자신을 도둑으로 오해할 테다. 어쩌면 신분이 증명될 때까지 이곳보다 더 시궁창인 하이란 제국의 황성 지하에 있는 감옥에 며칠 밤을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신분이 증명되어도 걱정이다. 놀랍게도 슈리엘 가문의 후계자가 도둑이었다며, 대륙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얻게 되리라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어머니와 누나가 자신을 좋게 봐준다 한들 그마저도 좋게 봐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특히 조금 고지식한 면모가 있는 아버지 다이크라면 자칫 슈리엘의 명성을 먹칠했다며 크게 혼내거나 어쩌면 먼 곳에 외딴 영지에 있는 슈리엘의 외진 별장으로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최악으로는 슈리엘이란 이름을 다신 사용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렇기에 소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최대한 조용히 혼자서 이 창고와 같은 지하실을 가득 채운 폐자재들을 저 미세하게 보이는... 이런 재수도 없지 미세하게 빛나던 전등도 방금 불이 나갔다.
"시발.."
결국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홀로 잡동사니들을 치우고 저 안쪽 끝에 숨겨져 있는 비밀의 문을 들어서야 했다.
막막하기만 하다. 특히 아무리 유진이라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거미줄과 수많은 거미, 각종 벌레와 쥐들까지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다. 유진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벌레와 쥐였다. 그 지옥의 동굴이었던 헬리글에서도 쥐를 가장 조심해야 했다. 자고 있다가 어느 순간 여린 살 부분을 쥐들이 다 파먹기 때문이었다. 몇몇 그런 애들이 있어 치료받은 이들이 많았고 유진 역시 손톱과 발톱을 쥐들에게 먹힌 기억이 있었다.
그러기에 헬리글에서는 자면서도 깊게 잠들 수 없었고 매일 경계 어린 모습으로 있어야 했다.
어쩌면 이러한 기억 때문에 거미며, 벌레 그리고 쥐들을 무서워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트라우마, 트라우마라 할 수 있겠다. 이어 어두컴컴한 지하는 빛 한 점 없으니 마법으로 빛을 만들까 했다가도 괜히 빛이 1층에 새어 나가면 또 어쩌나 하는 생각에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국, 이 어둠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를 곳에 오직 감각만으로 이 잡동사니들을 치워야 했다.
"돌아버리겠네..."
이러한 문제가 있을 줄이야,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 가로막으니 절로 헛웃음을 토해졌다.
"제기랄! 이젠 별것이 다 귀찮게 하네.."
나지막이 욕지기와 함께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거대한 잡동사니의 산을 보며 혼자서 이걸 다 치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들었지만, 결국,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어서 어셉터를 찾고 당장 소아렌을 자퇴할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건물 순찰을 끝낸 경비병들이 문을 잠글 시간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어서 조금이라도 치워 놓고 나와야 했다.
"제길."
결국, 다시금 욕지기를 토해내며 일단 앞에 놓인 의자를 붙잡았다. 그 순간 무언가 무너지듯 우당탕거리며 마치 천둥과 벼락이 치는 거친 소음이 일었다. 동시에 뽀얀 먼지가 확 부풀어 얼굴을 뒤덮었다. 거친 기침과 잠시 몸이 움찔했고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췄다. 혹여나 누군가 이 소음을 듣고 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기다렸지만,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시발...."
또 욕지기가 토해졌다.
////
붉게 노을이 지던 시각이 지나 대지 위에 짙은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시각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문이 잠기기 전에 건물을 빠져나온 유진의 모습은 마치 맨땅에 수십 번 구르기라도 한 듯, 머리와 몸에 뽀얀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마와 등에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그 먼지를 쉽게 털어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거지도 이런 거지가 없을 정도로 무척 추레한 얼굴은 놀랍게도 최대한 먼지와 여기저기 묻은 거미줄을 걷어낸 상태라는 것이었다.
"에... 에취!! 제기랄!"
먼지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침이 나왔다. 이어 검댕이 붙은 듯한 얼굴에 균열이 일었고 툭 뭉텅이 진 먼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짜증스런 욕지기도 토해졌다. 한시가 바쁜데,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회의감까지 들 정도였다.
문이 잠기기 고작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시간 내내 급히 잡동사니들을 치우기 시작했지만,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부족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조심한다고 조심한지라 경직된 몸은 곳곳이 쑤셔오기도 했다. 참으로 곤욕스러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급해지다 보니 먼지란 먼지는 온몸으로 뒤집어써야 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만에 하나 그곳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면 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내야 하거니와 기숙사에 학생이 없어졌다고 한바탕 난리가 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결국 자신이 본관에 갇혀 있다는 것을 발견된다면?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분명 놀림거리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프리실라에게 찍혀 착잡한 데.. 여기서 더 눈에 띄는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막막한 상황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다. 다시 마음에 조급함이 일었다.
"정말 이러다간, 끝이 안 보일 텐데.. "
이때 담배라도 있었으면 조금 후련할 텐데 무언가 아쉬움이 일었다.
그때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엘리사가 갑작스런 미풍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는 먼지와 땀으로 뒤덮여 있는 유진을 향해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소아렌에 입학하면서 괜스레 이목을 끌지 않으려 요정의 존재는 숨기고 싶었다. 그러나 한동안 자신을 부르지 않은 유진에게 꽤 불만이 있었는지 멋대로 모습을 드러내자 꽤 당황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입가에 토해졌다. 그러며 엘리사에게 속삭였다.
"내가 함부로 나오면 안 된다고 했잖아?"
엘리사는 여전히 뾰로통한 얼굴을 들어 유진의 어깨에 자리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심심한걸...
저택에서는 아리사와 함께 놀았던지라 심심할 새가 없던 그녀였는데 이곳에서는 그러지 못하니 꽤 심심했나 보다. 하긴, 장난기 많고 활발함을 가진 그녀의 성격을 봐서라도 여태까지 참은 것도 용할 정도였다. 허나, 유진은 엘리사를 자신의 최후의 보루이며 비장의 한 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최대한 숨겨 만에 하나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도 있다면 이 비장의 한 수를 사용하리라 생각했었다. 사실 이러한 것은 교단에서 훈련을 받을 때마다 매번 강조되었던 말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힘을 30퍼센트만 사용하고 그 나머지는 철저하게 숨겨, 상대의 방심을 이끌어내라! 라며 가르침을 내었고 그러한 가르침은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분명 이러한 유용한 가르침이 지난 삶에서 유진에게 꽤 많은 목숨을 지켜낼 수 있게 했었다. 그때에도 비장의 한 수는 언제나 요정이었고 요번에도 버릇처럼, 엘리사를 숨기게 된 것인데 엘리사는 꽤 불만이 많았나 보다. 여전히 뾰로통해진 얼굴은 불만이 가득했고 토라진 얼굴은 심심하다고 아우성이었다. 결국,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담아 대답했다.
"미안해, 이번 일만 끝나면, 한동안 아리사와 함께 있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줘."
언제까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되묻자 유진이 씁쓸하게 미소를 그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창고를 보니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듯싶기도 했다.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매일 나와 이 짓을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만약 매번 이렇게 몰래 빠져나와 몇 시간씩 사라졌다가 돌아오면 누구든 오해할 테니 말이다.
결국 기약할 수 없는 약속에 유진의 입가에도 절로 한숨이 토해졌다.
"미안해... "
힝...
칭얼거리듯 입술을 삐죽였다. 유진은 괜스레 걱정이었다. 이러다가 엘리사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떠나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했다. 자신의 비장의 한 수가 자신의 행동으로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요정과 친구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친구에서 다시 깨어지는 일은 쉬웠기 때문이었다.
요정과는 유대감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고 요정은 계약자와 유대감이 깨지는 순간 언제든 계약을 파기하고 떠나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요정을 달래는 것도 일이라면 일일 수 있었다.
"조금만 참아줘... 그리고 가끔은, 바깥에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야!
그럼 약속!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아주 자그마한 손을 들어 보인다. 그 손은 그녀의 자그마한 몸과 같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손이었으며 아리사에게 배웠는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유진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피식 미소를 그리고는 그녀를 따라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차마 손가락끼리 걸 순 없어 그녀가 작은 손가락을 들어 날개를 펄럭이며 유진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닿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차츰 엘리사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유진 역시 그러했다.
"응! 약속! 조금만 더 기다려줘!"
좋아... 기다릴 게!
"응!"
그 말을 뒤로 다시 엘리사가 모습을 감추니 깊게 한숨을 토해낸 유진이 대충 머리와 몸에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고는 걸음을 옮겨 기숙사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오늘은 수업부터 지금까지 참으로 피곤한 날이었다. 당장 기숙사로 들어가 씻고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