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백색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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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일이 더 커졌다. 책임이라는 무게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다가왔다. 그리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 같았고 젊은 사내의 패기만으로도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 일은 분명, 가문에도 피해가 갈지 모를 일이었으니 말이다. 당황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고 잠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려 고민했다.
프리실라는 한 왕국의 왕이 노리는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을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쳤고 그녀는 자신에게 책임을 지라 했다. 앞길이 막막하고 책임이라는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양어깨를 짓눌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란 점은 자신의 가문도 만만치 않은 권력이 있는 가문이라는 것이지만, 이런 복잡한 일까지 휩쓸리기에는 앞에 드리워진 일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아무리 슈리엘이 대단하다 한들 한 나라의 왕과 비견할 수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도 좋은 해결책이 없었다. 그러니 부디 다시금 시간을 돌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유진이 피곤함에 입술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
어떡한단 말인가 이 여인을? 착잡함이 일었고 눈가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도 모른 채, 무엇이 그리 기쁜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책임지라는 이 철없는 여인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왜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복잡하게 일이 꼬이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 참으로 사람의 앞날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책임져.. 네가 말한 대로.. 제발..."
이번엔 그녀가 불확실함을 담아 부탁했다. 왕에 이름이 나와 깊은 상념에 빠진 유진을 보며 꽤 조마조마하는 것 같았고 지금이 프리실라로서는 기회라 여기는 것 같았다. 슈리엘이라면, 제국의 공작 가문인 슈리엘이라면 충분히 프레이아의 왕 알리센 프레이아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셀리엘 가문의 억지로부터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유진의 시선이 그녀에게 이르렀다. 불안한 시선이 한데 겹쳤고 유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알았으니까 일어나요. 지금으로서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에요. 우리. 일단은 빠져나가서 그때 다시 대화를 좀 나눠요."
"아니 난 지금이 더 급해! 그러니 지금 확실하게 결정해! 만약.. 네가 날 책임지지 않는다면.. 지금 겪는 모든 일, 그리고 너와 관계를 나눈 일까지 셀리엘의 이름으로 학교와 슈리엘에게도 말할 거야! 그리고 네가 나 책임진다고 했잖아! 사내라면 말을 지켜!"
고집은 여전했다. 이제는 협박까지 서슴없이 했다. 그만큼 조급하다는 뜻일까? 피곤함에 눈매를 만지작거렸다. 꼬여만 가는 일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두통이 일었다.
"네가 그 대단한 슈리엘의 가문의 사내라면 진정한 기사도를 가진 가문의 사내라면 말한 것은 지켜!"
기사도, 기사, 솔직히 자신은 기사가 될 생각은 없는데.. 그리고 어느 기사가 요즘 기사도로 한 여인에게만 충성을 맹세한단 말인가? 그건 옛 시대의 전유물이고 이미 기사들에게 잊힌 구시대의 흔적인 것을.. 시대가 변하면서 기사도 역시 시대에 맞춰 변했거늘..
이제 기사라고 한 여인에게만 충성의 서약을 맺진 않는단 말이다. 억울함에 무어라 반박하려 했으나 고개를 내저었다. 괜히 여기서 말싸움할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덧 슬슬 날이 밝고 있었고 밤사이 내린 거센 눈보라도 차츰 잠잠해지는 것 같았다.
어서 결정해야 했다. 여기서 무의미하게 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결국, 진중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에 다시금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고 천천히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저로.. 괜찮다면.. 좋아요! 책임질게요."
"정말이지?"
그제야 그녀가 환한 미소를 그리며 되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면 무척이나 아름답기도 하다. 마음이 이리도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한데 그녀의 웃음을 보면 또 설레는 건 또 뭐람.. 이젠 자신의 마음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솔직히.. 프리실라를 다시 저버리기엔 너무나 안타깝지 않은가? 괜한 욕심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기도 했다.
솔직히 알리센 프레이아만 아니었어도 이미 예전에 결정하고 이 동굴을 나와 설산을 올랐을 텐데, 아무래도 알리센 프레이아가 무척 걱정이긴 했다. 유진도 잘 아는 알리센 프레이아의 집요하고도 탐욕적인 성격을 잘 알았다. 언제나 권력을 원하고 힘을 원하며 특히 여자를 향한 집착과 욕망은 그 누구보다 심했다. 물론 그 욕심많은 배불뚝이 왕의 결말은 교단의 암살로 허무하게 끝났지만..
그는 죽어서도 욕심은 끊이질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덤에 묻힐 때 살아있는 열 명의 아내와 함께 묻히길 바랐다. 아마 자신의 아내가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는 꼴을 죽어서라도 보기 싫었나 보다. 그런 터무니없는 유언인데도 프레이아라는 어처구니없는 나라는 그토록 고귀하고 성스럽게 여기는 여인이란 존재를 왕의 유언이라는 이유로 모두 생매장까지 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진의 머릿속에 그려진 알리센 프레이아는 역겨운 노인네였으면 난생처음으로 누군가 죽었다는 소식에 꼴 좋다. 라는 생각과 처음으로 교단이 잘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게 한 유일한 사내이기도 했었다. 그만큼 그 노인네에게 프리실라를 주기엔 아까웠다. 물론 이럼으로써 어떻게 미래가 변할지 모르겠지만, 이미 자신의 손길을 탄 여인을 다른 이에게 주고 싶진 않았다. 특히 그 욕심 많은 왕에게는 말이다.
'될 대로 대라지... '
덥석 프리실라의 손을 붙잡았다.
어차피, 자신의 것이 된다면 확실하게 하리라.. 엘리시아처럼.. 그리고 어머니 무리슈엘라는.. 어머니는 예외로 치자.. 그래 예외로 쳐야 한다. 어머니만 생각하면 착잡하다. 불륜이다. 그것도 남편이 살아 있음에도 그것도 슈리엘 가문의 가주이자 아버지의 아내.. 만에 하나 어머니와 자신의 관계를 들키게 된다면... 쫓겨나지 않을까? 죽진 않겠지?
머리가 복잡하고 두통이 심해졌다.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어머니의 일을 지우고 다시 프리실라를 바라보았다. 일단 앞에 놓인 일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기로 하자 무척 결심에 찬 눈동자가 그녀에게 닿았다. 그녀가 흠칫 놀라 했다. 조금 날카로운 눈매가 놀란 토끼 눈 마냥 커져 있어 눈을 바라보니 참으로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저 푸른 눈이, 마치 푸른 창공을 닮은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태생적인 근본이며 셀리엘에게는 파란이며 미꾸라지 같은 존재이리라..
'그래 책임진다 책임져! '
"...유, 유진?"
그녀가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유진을 부르니 그가 무척이나 진중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책임질게... 무슨 일이 있어도... 대신 당신도 내게서 못 벗어나."
"어....응.... 뭐야.. 갑자기.."
진지하게 책임지라 해서 말했더니 또 부끄러워한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여인이지만,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아도 좀 쉬다 보니 다시금 하체에 피가 쏠리려 하는데...잠시 고민하던 유진이 이내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이 다시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서도 움켜쥔 두 손은 유진을 밀어내지 않았고 그녀의 달콤한 입술도 천천히 유진의 키스를 받아내기 시작했으며 이내 유진의 손이 간신히 벗어던진 그녀의 옷을 다시금 벗기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모습을 보던 엘리사는 여전히 동굴에 치고 들어오는 바람을 막으면서도 유진과 프리실라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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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키스 이후로 한 번 더 정사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나름 서로 가까워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도, 프리실라가 유진을 꼭 끌어안은 채 설산을 오르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추위 탓이 가장 크지만 말이다.
"으.. 추워.."
"곧 도착해.. 조금만 참아."
허벅지까지 쌓인 눈은 여전히 움직이기 힘들었고 강하게 치는 눈보라는 엘리사의 도움으로도 살며시 투과해 들어와 몸을 시리게 했다. 아무래도 추위까지 막아주진 못했으니 몸을 데운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금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옷이 얇았던 프리실라가 더욱 고통스러워 하니 결국 입고 있던 기다란 남색의 교복 코드마저 프리실라에게 벗어준 유진으로서는 이제는 온몸이 오한이 들어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자칫, 이러다간 정상에 오르지도 못한 채, 쓰러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을 아리는 추위는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심해졌다.
"괜찮아?"
걱정으로 가득 찬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그러나 대답하기 힘들었다. 추위에 온몸이 얼었고 입마저 얼어 그저 뻑뻑한 고개를 힘겹게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고 그저 기계처럼 걸음을 옮겨 허벅지까지 차오른 눈을 해치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유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저기 봐!!"
그때였다. 프리실라의 놀라고도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유진도 고개를 들어 그녀가 가리키는 설산의 위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저만치 끝에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태양광이 눈에 반사되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저만치 끝에 마치 옛 고대의 신전처럼 지어진 여러 개의 기둥으로 바쳐진 거대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하자 유진의 얼어붙은 입가에도 살며시 미소가 그려졌다.
"하..하하.. 다 왔다."
회반죽으로 만들어진 몇 미터나 되는 여러 개의 기둥이 아치형으로 된 지붕을 떠받들며 아래에는 투명한 대리석으로 얼굴까지 비춰 보일 정도의 건물, 하얀 눈의 위에 지어진 옛 신의 신전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 설산의 최종 목표이기도 했고 이 설산의 클라이맥스와도 같은 곳이었다.
"좋아.. 어서 가자.. 후우.. 후우.."
거칠어진 숨으로 다시금 유진이 걸음을 옮긴다. 걸음 하나하나가 천근만근이지만, 프리실라의 도움과 엘리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후우..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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