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 고지식한 옛 기사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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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에일린 공주 역시 그 미모가 프리실라 못지않으니 학생들이나 선생들 사이에는 꽃들의 결투라는 유치한 명칭을 달기도 했다.
그러니 축젯날이 아니라면 가득 차지 않을 제1 검술 훈련장은 마치 무주엘라의 결투 경기장인 콜로세리움처럼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중앙을 기준으로 가장 북쪽에 높은 단상 위, 상석에는 선생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이 따분한 나날의 연속 속에 특별한 파란을 꽤 반기는 얼굴이었다.
선생들 역시 얼굴이 잔뜩 상기 되어 있음은 물론,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발레린 에페엘의 얼굴은 살짝 긴장감을 내비치고 있었으나 그런 발레린 에페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하나의 축젯날처럼 간단한 군것질거리만 없다 뿐이지 그때와 제법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주인공이 입장했다.
"와!!!"
여기저기 들려오는 함성, 벌써 팬클럽이라도 결성되었는지 에일린을 응원하는 학생들도 제법 많았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매끈한 구릿빛 피부는 탄탄한 잔 근육이 새겨진 균형 잡힌 몸매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으며 그 못지않게 눈이 부시는 미모가 제법 아름다웠다. 허나 대체로 프리실라 선생을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엄연히 소아렌에서 부동의 미모 1위를 자랑하는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콘크리트 층의 팬심이라 할 수 있겠다.
둘은 무척이나 결연한 표정으로 잠시 서로를 바라보고는 이어 몸을 틀어 단상 위를 보았다. 무겁게 짓누르는 분위기에도 둘 다 주눅이 든 모습은 아니었다. 마치 이러한 분위기가 익숙하고 오히려 즐기는 느낌이었다. 마침 트루먼 교장이 아닌 부 교장 제쉬 오언이 자리에 일어서 상석에 마련된 단상 위에 섰다. 오늘도 그녀는 검은 계통에 품이 큰 드레스와 등에는 허리까지 오는 검은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트루먼 교장과는 조금 다른 검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갈색빛으로 빛나는 시선을 내려 에일린과 프리실라를 보았다. 그녀 역시 근엄함이 가득한 시선이지만 제법 기대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소아렌 아카데미의 프리실라 선생"
그녀가 말을 하자마자 마치 음 소거 버튼을 누른 라디오처럼 환호성과 웅성거리는 소리가 멈추며 모두의 시선이 제쉬 오언에게 이르렀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프리실라는 마치 역전의 용사이자 명예로운 기사가 된 것처럼 멋들어지고도 정갈한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엄이 넘치고 경건한지, 마치 황실의 기사 직위를 받는 모습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러니 주변의 오오! 하는 작은 탄성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휴센의 에일린 공주."
다시금, 제쉬 오언의 목소리가 이번엔 에일린 공주를 부르자 그녀 역시 프리실라처럼 한 치의 오차 없이 한쪽 무릎을 꿇어 보인다. 지금의 모습은 한 나라의 공주가 아닌 명예롭고도 투기로 가득 찬 기사의 면모를 하고 있었고 검을 든 이들은 모두 그런 에일린 공주와 프리실라 선생의 모습에 만족스러움을 내비쳤다.
그만큼 지금 이러한 기사들의 결투를 쉬이 볼 수 있는 이벤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와!!"
여기저기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졌고 제쉬 오언 역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리며 마저 말을 이었다. 자연스레 박수 소리가 거치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 아무래도 마법적인 힘을 사용했는지 웅웅 울리는 제쉬 오언의 목소리가 훈련장을 가득 채웠다.
"한 분은 이 소아렌 아카데미의 선생이며, 다른 한 분은 휴센의 공주의 신분이지요."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프리실라와 에일린을 바라보다 다시금 훈련장 아래 임시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무대를 빙 둘러싼 학생들을 보기도 했다. 모두가 숨을 죽여 제쉬 오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참으로 경이롭고도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접점이 없을 사람들이지만, 운이 좋게도, 또 인연이 어떻게 닿아 소아렌이라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 운명의 신 칼리아스님의 끈이 닿게 되어 모두가 이 한 자리에 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 말입니다. 물론 서로 뜻하지 않았던 일일지도 모르겠지요."
그녀의 두 눈이 둘에게 이르렀다. 한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스승의 등떠밈 때문이었으면, 다른 한 여인은 제자가 아닌 그 스승과 대결하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음에 정말 운명의 신인 칼리아스의 장난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상황이 오묘하게 흘렀다.
그러나 제쉬 오언은 이러한 만남을 운명의 신 칼리아스의 축복으로 보고 있었다.
"허나, 이 모든 것이 운명의 신 칼리아스님이 만들어주신 뜻이자 운명의 끈이 이어진 영광이 아닐까 싶습니다. "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 그녀가 느긋하게 모두를 훑고 앞에 놓인 물컵을 한잔 마시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숨에 말을 다 끝내기에는 그리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동시에 그녀의 연설?을 듣는 학생들의 얼굴에도 슬슬 지루함이 서린 것 같았으나 여전히 에일린과 프리실라는 요지부동으로 처음 한쪽 무릎만을 꿇은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모습을 보던 유진은 늘어진 하품과 함께 다리가 저리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언제 시작하는 거야?'
그때, 유진의 뒤편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느샌가 아를란과 함께 로아나가 뒤에 서 있었다.
"뭐야? 둘은 또 언제 만난 거야?"
"요 앞에서 서성이고 있길래 같이 왔어."
아를란이 난감함을 그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또 기숙사에서 도망쳐 나왔나 보다. 한편 로아나가 잔뜩 심통이 난 표정과 불만이 가득하다는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팔짱을 낀 채, 유진에게 이르렀다.
"흥! 이런 재미난 구경거리를 나 혼자만 두고 가려고 했지?"
"들키면.. 곤란하다니까?"
"칫! 흥이다! 흥이야!"
마치 새침데기 아가씨처럼 콧방귀를 뀌는 로아나를 보니 아무래도 꽤 삐친 것 같자 유진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러며 아를란은 그런 새침데기 아가씨의 어머니라도 된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정리해주며 유진의 옆에 자리했다.
로아나는 유진의 옆이 아닌 아를란의 옆에 앉아 여전히 새초롬하게 앉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왠지 뜻하지 않게 말 안 듣는 천덕꾸러기 아이를 한 명 키우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에 아를란이 재밌다고 까르르 웃었을 때 슬슬 부 교장 제쉬 오언의 연설이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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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승부도 중요하지만, 부디! 젊은이들의 혈기로 인해 이 평화의 상징인 소아렌에서 피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그럼.."
인연과 운명의 신을 두둔하고 이어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 행운이며 운명이라는 뜻을 빙 돌려 말하던 그녀가 길고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을 끝내고 뒤로 돌아섰다. 학생들은 드디어 지루한 연설이 끝나고 결투가 시작되는구나! 라는 희망을 품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엔 트루먼이 자리에 일어섰다. 금세 한숨 소리가 이어졌고 몇몇 선생들이 한숨 소리를 듣고 당황해 살짝 언성을 높이려 하나 트루먼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역시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느긋하고도 고고한 모습 사이 짙은 피로감을 가진 모습이 아닌 마치 젊었을 적으로 돌아간 듯이 잔뜩 익살스러운 혈기왕성한 학생들처럼 기대감으로 변한 시선을 들어 둘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변에 모인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학생들은 무례함도 잊은 채 지루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몇몇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고 몇몇은 심통이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잠시 그런 이들을 보며 품에 하나의 완드를 들어 보였다. 완드는 그의 팔목보다 얇았고 심지어 손가락보다 얇았다. 그러한 지팡이는 기다란 마법 스태프에 비해 반의반 치도 안 될 짧은 길이에 지팡이었다.
그래도 제법 고급스러운 완드로서 손잡이는 매끈하고도 짱짱한 검은 가죽이 덧씌워져 있었으며 검이라면 폼멜 부분일 부분에는 멋들어진 독수리가 조각이 새겨져 있는 고동색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완드였다. 그가 완드를 번쩍 들어 보였다. 그 순간, 수많은 별 가루가 주위에 퍼지니 마치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아침에 은하수가 내려앉은 모습이었다.
지루해하던 학생들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특히 마법을 배우며 잘 아는 학생들은 트루먼의 마법을 견식 한다는 것에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그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축복을 내리는구나."
여기저기서 축복이란 단어를 내뱉으며 경이로움을 담은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보통 축복은 사제들의 고유물이라 여길 테다. 그러나 마법사들도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물론 사제들과는 다르고 그에 대한 효과 사제들의 기도보다는 특별하게 뛰어난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적어도 몸의 활기를 북돋아 주며, 없던 용기를 주기도 했고 때로는 자그마한 치유의 힘도 주기도 했다.
허나 그러한 것들 보다는 마법사의 축복이 갖는 장점은 믿는 신이 다름에도 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었다.
"멋져.."
아를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또 장점이 있다면 저렇게 멋이 있겠다.
마치, 수많은 별 가루가 흩날리며 프리실라와 에일린의 주변에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별 가루가 바람에 흩날리며 서서히 모습을 감추었을 무렵 트루먼의 중후한 목소리가 모두 그의 마법에 넋을 잃은 이들의 귓가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이 역시 신비하고도 경이로운 마법이지 않을까 싶었다.
"굳이 내가 할 말까지 부 교장이 했으니 딱히 할 말은 없겠네.. 부디 좋은 마음가짐으로 아쉬움이 남지 않는 명예로운 기사의 결투를 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네.."
그는 그렇게 짧은 말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 순간, 침묵은 끝나고 다시금 환호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프리실라와 에일린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들만을 위해 준비한 무대 위에 몇 걸음 떨어져 선 채 서로를 마주했다. 이어 각자 검을 뽑아든 순간, 훈련장이 떠나가라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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