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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201화 (201/1,410)

〈 201화 〉 검이 좋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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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침을 꿀컥 삼킨 에일린이 열정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내보이며 되물었다. 마치 그의 가르침을 단 하나라도 빼먹지 않겠다는 열의가 가득해 보이니 지루드 슈리엘 역시 만족스럽게 씩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올곧지 않은 검을 든 검사는 마음도 올곧지 못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 순간 그가 자리에 서서 빠르게 검을 찔러 들어갔다. 거대한 광풍이 휘몰아치며 에일린의 검붉은 머리카락과 갈색의 가죽 바지, 남자처럼 입은 하얀 셔츠가 거칠게 펄럭였으며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흠칫 놀라 멍한 시선으로 지루드를 바라보았을 때 그가 미소를 그리며 다시 그녀를 보았다.

"제가 아는 몇몇 후배가 그러한 단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재능이 있음에도 몸을 망가트리고 있었지요."

그가 다시 검을 뻗었다. 시원스러운 파공성이 다시 이어졌다.

"어찌나 안타까운지.. 이미 고치기에는 버릇으로 굳어져 버린 자세는 쉽게 고쳐지지 않더군요."

검이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며 기다란 궤적이 그어졌다. 이어 한 차례 몸을 빙그르르 돌린 그가 다시 검을 뻗어 에일린의 미간 앞에 멈추었다. 그 일련의 동작은 찰나의 펼쳐졌고 너무나 눈부실 정도로 완벽했다.

"심지어 기사가 되어서도 말이지요! 그러므로 검사에게는 좋은 스승과 좋은 검이 필요한 이유랍니다. 그러나 확실히 에일린 공주님의 자세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었으며 자세의 완성을 도와주는 목검 역시 장인의 솜씨로 올곧고 완벽한 균형을 맞추어져 있답니다. 분명, 이 목검을 만든 장인이라면 멋진 진검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장담하지요."

"아..... 네.. 가, 감사합니다."

"검이 좋습니까?"

검을 갈무리한 그가 물었다. 에일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루드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 역시 검이 좋다고' 말한 뒤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풀잎이 나풀거리는 것처럼 사뿐사뿐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내질러지는 검에 담긴 기세는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준엄함이 있었으며 그의 움직임은 마치 검무를 추는 여신이 되다가도 세상을 굽어보는 근엄하고도 위엄이 서린 황제가 되어 있었다.

그랬다. 에일린은 그때부터 검술에 사랑을 빠졌다. 정확히는 그의 검술에 매료되어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검술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느꼈다.

그의 검은 수많은 변화를 가져갔다. 거대한 광풍이 되기도 했으며 어떨 때는 봄날의 미풍이 되어 팔랑 이는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그러다가도 날렵한 벌새처럼 허공에 수많은 점을 만들었으며 어느 순간 때를 기다리는 웅크린 사자가 되기도 했다. 이어 몸을 튕기듯 강하게 앞을 내디뎠고 손을 뻗어내며 갈색의 목검이 궤적을 그릴 때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발아래에 세상을 굴복시킨 위엄 서린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수많은 얼굴을 가진 그는 검의 신이었다.

달빛 아래, 검을 들고 검무를 추는 노신사 지루드 드왈즈 슈리엘을 보며 그는 나중 되어서 그처럼 멋진 검무를 추는 여인이 되리라 다짐했다. 그 노신사 지루드 슈리엘에게 별거 아닌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답답한 연회장을 몰래 빠져나와 바깥바람을 쐬려다 치기 어린아이의 보잘것없는 검술에 슬쩍 자신의 깨달음을 보여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렸던 에일린에게는 마음을 홀리고 눈을 멀게 했으며 머릿속은 온통 검만을 생각하게 했다. 한 나라의 공주에게 검의 신이 직접 현세의 강림해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선사한 격이었다.

검이라는 운명! 그리고 미래의 대륙 최고가 되리라는 여검사의 모습을 꿈꾸는!

그날 어린 에일린은 꿈을 꾸었다. 그녀는 지루드 드왈즈 슈리엘이 되었으며 그가 뻗어낸 손은 그녀의 손이 되었고 그의 목검은 세상을 가르는 신검이 되어 달빛의 반사광을 한껏 뿜어내며 한껏 날카로운 기세로 세상을 베어내었다.

숨을 쉴 수 없는 경이로움! 감히 바라볼 수 없는 위엄이 지루드 슈리엘의 몸을 통해 그녀에 손끝에서 뿜어져 세상을 뒤덮었다.

에일린은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 조금 더 집요하게 검에 매진하게 되었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추파는 단칼에 거절하곤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역시 에일린의 꿈을 위해 무엇이든지 도와주겠다 했다.

그렇게 나이가 먹고 성혼할 나이가 되었음에 슬슬 혼사를 단칼에 거부하기 힘들어졌을 무렵 에일린은 하나의 꾀를 내었다.

자신을 이기는 자를 만나볼 의향이 있다고!

그 이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결투 신청이 왔고 그녀는 흔쾌히 결투를 받았다. 처음에는 질 뻔도 했었다. 몇몇 위태로웠던 적도 많았으며 자칫 운이 아니었으면 졌을 뻔한 일도 있었지만, 그러나 이렇듯 단 한 번도 남자를 만나지 않게 된 이유처럼 끝내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답답함을 느꼈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기 시작했다.

휴센의 검술의 나약함을 목도해서 그럴지도 모르나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랬다. 결투 신청한 사내들은 자신이 공주라는 신분과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생사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결투를 하려 하지 않았다. 검을 든 사내가 터무니없게 예의 바른 신사처럼 행동하려 했고 때론 공주라는 신분에 난감함과 두려움을 느끼며 본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몇몇은 자신을 얕보았다가 큰코다치기 일 수였다. 그렇다고 휴센의 왕실 기사단과 결투를 하려 하면 그들 역시 감히 공주의 눈을 마주치려 하지도 않았고 감히 공주에게 검을 뻗어내지 않았다. 기사는 공주에게 검을 들이대는 존재가 아닌 공주를 지키는 존재라나 뭐라나.

그러므로 쌓이기 시작한 거품 가득한 명성, 휴센 최고의 검은 에일린 공주에게 있다는 허명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에일린은 그 허명이 점점 진심으로 느껴지는 오해가 쌓이려 하자 슬슬 자신의 부족함과 무언가 아쉬움을 느끼고는 이대로 있으면 자신이 나태해짐을 느꼈다.

조급해졌다. 진정으로 휴센 최고의 기사가 되기 위해, 아니 대륙 최고의 여기사이자 그날 보았던 노신사 지루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기 위해서 자신과 제대로 싸워줄, 실력을 높여줄, 적어도 제대로 된 결투로 자신의 실력을 돌아보게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소식을 들었다. 대륙 최고의 검사 중 한 사람, 지루드 슈리엘과 비견 된다고 소문이 자자한 발레린 에페엘이 소아렌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에는 지루드 슈리엘을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그는 어렸을 때 이후로 어디로 갔는지 깜깜무소식이었다. 듣기로는 무주엘라의 그로니악과 발키리의 검술을 조금 봐주고는 또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소식도 있었고 또 어느 날은 마물의 숲이자 미지의 숲인 마벨의 숲에 들렸다는 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데리고 요리조리 대륙 여행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찾기 힘들어 차선책으로 다이크 슈리엘을 찾으러 가볼까 했지만 그래도 지루드를 제외하고 대륙 최고라 칭송하는 발레린 에페엘의 패도의 검을 먼저 보고 싶어 소아렌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소아렌으로 향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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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와 제대로 검술을 나눠보기도 전에 그의 제자에 패배를 면하지 못했다. 억울함도 있고 분함도 있었다. 허나 후련함이 더욱 컸다. 처음이었던 것 같다. 제대로 된 결투를 그러므로 인정해야 했다. 트루먼 교장, 또는 발레린 에페엘의 말마따나 자신은 허명이 쌓이기 시작한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결투 방식 역시, 휴센의 방식은 분명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던 아버지나 어머니의 뜻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은 정말 우물 안 개구리였고 정당한 결투로써 후련하게 패배했다. 억울함과 분함은 사라지고 속이 다 후련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대륙 최고 중 한 명인 발레린 에페엘에게 가르침을 받을 기회까지 생겼는데. 왜? 이제 와서 무언가 잊었던 감각과 부러움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점점 멀어지는 유진과 프리실라를 보며, 에일린은 점점 색다른 감정이 꽃을 피우고 있었으나 그러한 일에 숙맥인 그녀는 이러한 감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애써 잊으려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그녀가 흠칫 놀라 하며 다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다 문뜩,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아 어지럽혀진 교실을 보았다. 나름 정리한다고 한 것 같은데 여전히 교실 한 곳에는 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대로 닦지 않아 하얗고 점성이 짙은 그리고 비릿한 향이 물씬 풍기는 정액 몇 방울을 비롯해 프리실라의 멀건 애액까지 몇 방울 바닥 한 곳에 남아 있었다.

당황한 모습으로 그 흔적을 힐끔 보다가도 더는 모습이 보이지 않은 둘을 쫓던 에일린의 시선이 다시 그들이 만들어낸 흔적으로 향했다. 얼굴을 붉히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돌아갈까 고민했으나 끝내 흔적을 신발로 슬쩍 문질러 닦아냈다. 그러고는 어질러진 책상과 의자를 가지런히 놓고는 곧장 교실을 나왔다. 그러고는 한 차례 더 창문을 통해 교실을 보았다.

고요하기만 교실은 조금 전 그 후끈한 열기와 야릇한 행위의 배경이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고 적막감이 가득했다. 에일린은 괜한 고독감을 느꼈다.

"..."

잠시 그 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그 둘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목이 탔다. 당장 차가운 물을 마시고 싶을 정도로 갈증이 일었다. 가슴이 턱턱 막히는 답답함을 느꼈고 온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더웠다. 휴센에 비해 비교적 덥다기보다는 따듯하다고 할 수 있는 하이란 제국인데 처음으로 더위를 느꼈다. 뺨에 양손을 얹었다. 손이 익을 것처럼 뺨과 광대뼈 부분이 뜨거웠다. 이마 역시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뜨거웠다. 아니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삐칠 땀까지 흘렸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왜 자꾸 둘의 행위가 눈앞에 아른거리는지 몰랐고 그들의 서로를 향한 애틋한 목소리와 시시덕거리는 애정행각의 소리가 자꾸 들려오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정말 부러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슬슬 20대가 넘어갈 시기에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을 눈앞에 목도했으며 남자라는 것에 눈이 뜬 것일지도 모르겠다.

"흠흠.... 돌아가자."

그녀가 나지막이 헛기침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아쉬운지 힐끔 교실을 몇 차례 바라보다 끝내 걸음을 옮겨 건물을 나왔다.그때까지 그녀의 마음은 미친 듯이 요동치다 못해 폭발할 것처럼 쿵쿵 울렸다. 마침 요란한 음악을 튼 것처럼 그 쿵쾅거리는 소리가 바깥에 들릴 것 같았다.

"내가 미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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