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237화 (237/1,410)

〈 237화 〉 징계 위원회를 열고 싶습니다.

* * *

"꼭 필요했던 대련이었는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어리다고 한들. 언제고 진검을 들고 훈련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물론 가문에서 검을 배운 이들도 있을 테고, 용병에게 배운 이들도 진검을 들었을 테지만, 진검을 든 상태에 대련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니 학생들에게 좋은 훈련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말을 할수록 별다른 반응이 없는 트루먼의 모습에 점점 자신감이 붙은 마븐이 조금 더 단호하게 말하자 트루먼도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놓인 찻잔을 다시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마븐 선생의 지도 방식을 존중하고 따를 뿐이네. 게다가 검술 학부 총괄 담당은 내가 아니라 발레린 에페엘 선생이라네 그리고 난 그를 믿지, 그러니 발레린 에페엘 선생이 직접 믿고 선발한 마븐 선생이라면 다 뜻이 있고 이유가 있어 그러한 수업을 했으리라 생각하니 존중하겠네."

"..."

입술을 깨물었다. 트루먼 교장의 자상한 배려에 더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 효과? 효율? 이유? 그딴 건 없었다. 오직 제시 라일라인이 아를란을 욕보이고 싶어 억지로 진검 대련 수업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러니 차마 트루먼 교장을 볼 수 없을 정도의 부끄러움이 온몸을 엄습했고 수치심에 당장 이곳에서,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깊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때, 트루먼 교장이 먼저 말을 덧붙였다.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니 아무래도 대련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보군?"

"그, 그게.."

몸을 크게 움찔했다. 잠시 멈췄던 식은땀도 삐칠 흘러 등과 이마를 적셨으며 부리부리한 트루먼 교장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니 다시금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븐 선생?"

트루먼이 처음으로 재촉하자 마븐이 이내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다쳤는가"

"생명에 지장이 될 정도로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다치긴 했나 보군?."

차츰 분위기가 무거워진다. 자연스레 마븐의 마음에도 불안함이 더욱 그 크기를 키웠다. 그 순간 온몸이 아리듯 아팠다. 온몸에 진이 다 빠진 것처럼 아무래도 극심한 감정의 변화를 몇 번이고 겪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지친 것 같았고 잔뜩 경직된 신체는 슬슬 버텨내기 힘들어 쥐가 난 것 같았다.

"그, 그렇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다친 건가?"

"..."

마른침을 꿀컥 삼켰다. 지금만큼은 조금 전에 다 마신 차가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그 정도로 입안이 쩍쩍 마를 정도로 갈증을 느꼈다. 그러며 그 갈증 사이에 다시금 갈등도 유발했다. 진실과 거짓, 이 두 가지의 갈등이 마음에 한바탕 크게 싸움이 일고 있었다.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굳게 쥔 주먹에 핏물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

"마븐 선생?"

다시 트루먼이 불렀을 때, 마븐은 결정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본능에 따라 입술을 놀렸다.

"아를란이란 학생이.. 진검 대련에서.. 규칙을 어기고, 다른 힘을 사용해 상대를 다치게 했습니다. 그녀는 평소 제시 라일라인을 싫어했는데 그게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전 징계 위원회를 열어 아를란을 향해 보복에 의한 행위로 퇴학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퇴학이라."

격한 두려움과 심한 갈등 속에 자기도 모르게 내뱉어진 말은 결국, 거짓의 승리였다. 분명 마음속에 남은 죄책감과 정의로움은 여전히 아를란을 옹호하고 있었지만, 카스트로 라일라인의 달콤한 속삭임, 그에게 받은, 여태 벌었던 것보다 더 많은 금은보화를 생각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끝내 완전히 결심을 끝낸 마븐이 다시 트루먼을 보았을 때였다.

그 어느 때보다 무심하게 뜨여진 트루먼은 순간 거인으로 보였다. 주변을 가득 채우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풀풀 풍겨 온 세상을 짓누르는 거인처럼 마븐은 순간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며 마주한 눈빛, 조금 전의 자상함과 자애로움이 아닌 차갑게 뜨여진 눈빛은 일말의 자비조차 느껴지지 않을 죽음의 신 모티스의 환생처럼 보였다.

"교, 교장 선생님?"

"그래서... 마븐 선생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내게 온 이유가 있을 테지.. 바라는 게 있는가?"

그가 무심하게 물었다. 마븐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 그래서.. 아, 아를란을 위한.. 지, 징계 위원회를.. 여, 열었으면... 합니다."

"징계 위원회라... 5년 만이군.. 아니지 유진이란 학생 때문에 열렸던 약식으로 진행된 위원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가는 징계 위원회는 확실히 5년 만이겠지?"

"..."

마븐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게 느껴지는 권위에 그저 숨죽인 채 그가 알 수 없는 노여움을 풀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를란이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에 빠졌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븐도 그를 따라 다급히 몸을 일으키자 트루먼이 무심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븐 선생이 바란다면.. 좋네 징계 위원회를 열도록 하겠네."

"아... 가,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도 속에서는 안도감과 함께 갑작스레 기세가 변한 트루먼 교장을 향한 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과연 무엇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진검 대련? 또는 대련으로써 발생한 사건을 사전에 막지 못한 자신을 향한 분노? 아니면 대련의 규칙을 어기고 다른 힘을 사용해 상대를 다치게 한 아를란을 향한 분노일까?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분노일지도... 그러나 진실을 말하기에 이미 선을 넘어버렸다. 더이상 돌아설 길이 없음을 깨달은 마븐은 점점 확고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겨, 이 광활한 숲 속에 덩그러니 남겨진 이질적인 고동색 문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 마븐이 들어온 문이었다. 마침 트루먼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나가지. 마븐 선생. 그리고 선생들을 전부 회의실로 불러주게."

"아.. 예!"

////

"유진.."

달콤한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닿았다. 그 간드러진 음색이 어찌나 고운지 유진 역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에메랄드 빛 눈빛이 당장 자신을 유혹하는 여인을 탐하고 싶어 안달 났다. 한편으로는 수업 때 그렇게나 못살게 굴었던 그녀가 맞을까 놀라울 정도였다. 그만큼 지금의 프리실라는 수업 시간 중에 보이던 날카로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그러나 슬슬 이러한 변화가 차츰 익숙해진 유진이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자연스레 그녀의 허리에 얹었다. 이어 서로의 시선이 하나가 되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푸른 눈빛이, 이어 유진의 에메랄드 눈빛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어 이마를 맞대고 서로의 미소가 하나가 되어 입술이 마주했다. 춤을 추듯 둘의 입술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어 분홍빛 입술 사이에 서로의 혀가 비집고 나와 서로를 휘감고 타액을 건네자 짜릿한 감각 속 야릇한 흥분감이 샘솟았다.

둘이 있는 곳은 수업이 끝나고 훈련장 뒤편에 자리한 작은 틈이었다. 뒤에는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었고 원형 경기장과도 벽의 틈새, 즉 훈련장에 담벼락이 있는 곳과 높다란 산이 난 틈 사이였다. 그리고 언제나 수업이 끝나고 유진과 프리실라가 만나는 비밀의 공간이기도 했다.

한창 점심시간이 이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둘은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 이제는 하나의 또 다른 일과이기도 했다. 물론 근래 프리실라가 스승인 발레린 에페엘과의 수련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았지만,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레린 에페엘이 보이지 않았기에 프리실라는 이러한 여유를 놓칠 수 없었다.

마침 유진이 물었다.

"쉬는 시간에 그렇게 해놓고 또 원하는 거에요?"

"치.. 난 아직 부족한데.. 넌 안 그래?"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손은 자연스레 유진의 몸을 훑다가 천천히 그녀의 어깨에 올려 목을 감싸 안았다. 유진의 손은 그녀의 허리에 프리실라의 손은 자연스레 목을 감싸 쥔 형태가 되어 둘은 무척이나 안정적인 자세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둘의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서로의 뜨거운 살결이 겉옷을 넘어 다가왔고 뜨거운 숨이 서로의 얼굴을 괴롭혔다. 유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누나 때문에 친구들이 오해하고 있어요."

"친구? 룸메이트 말하는 거야?"

"네, 바리오스랑 롤랜드가 의심해요. 수업이 다 끝날 때마다 사라지니까요."

"흐음.."

그녀가 나름 고민하는 척한다. 그러더니 대충 어깨를 으쓱였다. 그다지 깊게 고민한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더 익살스럽고, 조금은 야릇하며 고혹적인 표정을 그렸다. 그러고는 조금 더 달라붙어 그녀의 가슴이 유진의 가슴팍에 완전히 달라붙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녀가 간드러진 목소리를 살랑살랑 흘려보냈다.

"꼭 내 탓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요?"

"응.. 요즘은 유진도 점점 적극적이지 않아? 난.. 그렇게 느꼈는데? 아니야?"

"흐음. 그랬나요?"

조금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흘깃 그녀를 보았다. 고혹적인 푸른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답게 껌뻑였다. 마치 푸른색 크리스탈 결정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고 그녀의 하얀 피부 사이에 달싹이는 붉은 입술은 무척이나 탐하고 싶어 욕심이 일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말에 인정해야 했다. 확실히 그녀의 말마따나 요즘, 아니 아직 소아렌에 남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프리실라의 공이 컸음을 말이다. 프리실라를 쉽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유진이 백기를 들며 인정했다.

"인정해야겠네요."

"그렇지?"

그녀가 키득키득 웃으며 되묻자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한 번 더 그녀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여전히 짜릿한 흥분을 불러일으키는 감각이 입술에 닿았고 심장을 찌릿 울리며 이성을 불태워갔다. 자연스레 유진의 손이 그녀의 탄력적이고도 부드러운 둔부 닿아 강하게 움켜쥐었으며 다른 한 손은 가슴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녀의 입가에 뜨거운 숨이 토해졌다.

"흐음.."

자연스레 토해지는 거친 소음과 함께 자연스레 유진은 입고 있는 레더 아머를 대충 벗어던지고 이어 드러난 하얀색 셔츠 역시 단숨에 벗어 던졌다. 프리실라 역시, 갈색 빛이 돋는 레더 아머를 벗어던지고 난 뒤, 하얀 셔츠를 열어젖혔다. 그러자 드리워진 하얀 피부와 하얀 붕대로 가슴을 칭칭 동여맨 모습이 보였다.

잠시 붕대를 보던 유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붕대 불편하지 않아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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