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화 〉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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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님!"
본관 쪽 길에서 두 명의 여학생이 마커스 라일라인에게 아는 척을 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으나 그다지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렴풋이 마커스 라일라인의 표정이 짜증스러움과 경멸 어린 시선이 맺혔으나 금세 그러한 표정은 사라진 채 은은하고도 여유 가득한 미소로 변했다.
그러한 변화는 정말 찰나의 순간 이어졌기에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그가 제법 반가운 척 연기하며 말했다. 이미 이러한 연기는 중앙 귀족계에 이르러 수없이 해온 자기 관리였기에 한낱 어린 학생들에게 들킬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베사른 남작 가의 영애 레이디 쉬를린, 사이스럼 남작 가의 영애 레이디 메이린이구나. 오랜만에 보니 반갑구나!"
"호홋! 레이디라니요! 아직 레이디라 불리기에 부족할 따름입니다."
"저 역시 아직 레이디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후작님!"
그의 과분한 호칭에 쉬를린과 메이린이 살짝 얼굴을 붉힌 채 무릎을 살짝 굽히고 고개 숙여 귀족의 예법을 보이며 인사하자 마커스도 인자한 얼굴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 그의 모습은 조금 전 유진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무척 예의 바른 노신사의 모습처럼 보였기에 쉬를린 베사른과 메이린 사이스럼의 얼굴에 존경과 감사의 눈빛이 풀풀 풍겼다.
하긴 이제 곧 후작이 될 사람이 한낱 남작 가의 영애에게 자상한 목소리를 내었고 다 자란 숙녀에게 보이는 예의인 레이디라는 호칭을 칭하는 것을 보기는 제법 어려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쉬를린과 메이린에게 마커스 라일라인은 예의 바른 차세대 하이란을 이끌 권력자이면서도 모두에게 자상한 사람으로 마음속 깊게 새겨진 것 같았다.
그런 이들의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는 모습에 아이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으며 그들을 구경했으나 이들은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침 쉬를린이 경박스럽게 소리쳤다. 그럴 때마다 마커스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으나 이 역시 눈치채는 이 없었다.
"그나저나 어서 제시에게 가보세요! 지금 막 제시가 정신을 차렸다고 들었어요!"
"흠흠! 그래? 그렇다면 당장 가봐야지! 어서 가보자꾸나."
그녀들의 말에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걸음을 옮기려다 흘깃 뒤편에 자리한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비릿한 미소를 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 자신의 연기를 꿰뚫어 보는 것 마냥 비아냥 섞인 웃음은 여전히 심기를 자극했다.
무척 불쾌하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 아이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온몸에 분노의 불꽃이 치솟았다. 그러나 저 아이에게는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하필 이곳이 소아렌이라는 것을 말이다. 아쉬움을 느낀 채 마커스 라일라인은 끝내 고개를 틀어 쉬를린과 메이린과 함께 본관으로 향했다. 그러며 마커스 라일라인이 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분수대 옆에 있는 아이 말이다. 너희가 아는 아이더냐?"
"아이요?"
그의 물음에 쉬를린이 고개를 틀어 뒤편을 바라았다. 그러고는 살짝 인상을 찡그린 그녀가 콧방귀를 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평민 같아 보이는데 아주 무례한 녀석이에요."
"무례한 건 알겠구나. 그나저나 왜 그리 아이를 싫어하지?"
"저 아이가 저희를 비롯해 제시까지 분수대에 빠트린 녀석이에요."
"분수에 빠트려?"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찡그리자 이번엔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히 둘의 대화에 껴들었다. 그러자 쉬를린이 살짝 짜증이 인 얼굴을 보였으나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물론 그러한 표정 변화를 마커스 라일라인이 놓칠 리가 없었다. 속으로 이들의 연기가 하찮음에 빈정거렸고 어떻게든 권력자 앞에 점수를 따보려는 이들에게 경멸감을 느꼈다.
이렇듯 둘은 친구이면서도 권력자 앞에서는 친구 따위는 단숨에 적으로 만들 고약한 심보를 가졌다. 어쩌면 권력을 원하는 귀족으로서는 제법 잘 어울리는 성격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에 이들이 제시에 수족이 되었을 테고 언제가 제시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당연하게도 제시마저 버릴 박쥐와도 같은 배신자의 피가 있다고 느꼈다.
사교계에서도 이러한 이들처럼 박쥐 같은 존재들이 제법 많았기에 이러한 성격에 학을 떼는 마커스 라일라인은 아직 어린 쉬를린과 메이린조차 좋게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제시에게 이들과 함께 다니지 말라고 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분명 자신만큼이나 똑똑한 제시라면 무언가 생각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랬다니까요?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더니 제시랑 함께 그대로 분수대에 빠져버렸어요."
"흐음.. 마법을 부린 것이냐?"
"그건 잘 모르겠어요. 제쉬를 비롯해 저나 쉬를린이나 마법은 잘 알지 못해서요. 제시의 말대로는 요정의 힘이라고도 하는데 사실은 잘 모르겠어요."
"호오.. 요정?"
뒤늦게 마커스가 호기심을 가지며 다시 뒤로 돌아보았으나 어느덧 아이는 사라진 뒤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아이를 쫓았으나 도무지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두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그 아이의 이름은 알고 있는가?"
"유진이라고 해요."
"유진?"
"네!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몇 번이고 유진이란 이름을 되새겨 머릿속에 각인시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제고 지금의 치욕을 갚아줄 속셈이었다. 이어 다시금 메이린과 쉬를린이 서로 마커스 라일라인 후작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아양과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와 아부까지 떨기 시작했으나 마커스는 그저 허허 웃으며 무시해버렸다.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 여유를 가진 채 자신에 분노를 자극하던 유진이란 기묘한 아이의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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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란 학생."
제쉬 오언의 근엄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웅웅 울렸다. 그러한 기세에 주눅이 든 아를란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제쉬 오언의 앞에 섰다. 온몸이 아픈 것 같았다. 무거운 회의실 분위기를 비롯해 온몸을 짓누르는 선생들의 날 선 눈빛은 홀로 견뎌내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잘못한 걸까? 억울함을 느꼈다. 그러나 억울함을 피력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평민이자 한낱 망한 가문의 상인이었다. 백작 가의, 아니 이제는 후작 가의 영애를 대련에 다른 힘으로 공격했으니 엄연히 벌을 받는 건 당연히 받아 마땅했다. 분명 퇴학을 당할 테지 차라리 빨리 지금의 시간이 지나고 어서 판결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지금의 이 무거운 분위기를 버텨내기 너무 고통스러웠다.
상석에 자리한 교장 트루먼과 제쉬 오언을 마주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귓가에 쉬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를란이 느끼는 압박감이 너무나 무거웠다.
특히 저번에 유진과 보았을 때에는 제법 자상하고 갈라도를 향한 열의를 내보이던 트루먼과 지금의 트루먼 교장은 사뭇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풍기는 기세가 무척 무거웠다. 그러나 더 두려운 존재는 제쉬 오언의 근엄한 모습이었다. 온통 검은색 복장을 한 그녀는 사형선고를 내릴 판사이자 지옥으로 이끌 사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 그녀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없던 죄라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숨이 턱턱 막히며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다. 당장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긴장해 두통도 심했다. 정말 온몸이 아프다.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고개도 무거워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온몸을 찌르는 것처럼,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것 같다.
그뿐이 아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선생의 날 선 눈빛에는 호의는 물론 그 흔한 연민이나 동정마저 담기지 않으니 벌써 큰 죄악을 저지른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문뜩 자신이 제시처럼 작위를 받은 귀족이었다면 이들이 이렇게 나올까 싶었다.
이들이 미웠다. 원망스러웠고 두려웠다.
"검술 학부 2학년 아를란 학생 오전 11시경, 제시라는 학생과 진검 대련을 했던 사실을 인정하나요?"
근엄한 제쉬 오언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심장을 움켜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친다. 잔뜩 긴장하고 두려움에 빠져 공황상태에 이른 것 같다. 입술을 깨물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니 여기저기서 탄성과 함께 날 선 비난의 목소리가 쇄도했고 나락으로 이끌었다.
이들이 이럴수록 아를란의 정신은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자신을 감추려 했다. 어서 끝났으면 했다. 이 지옥에서 벗어났으면 했다. 그 순간 트루먼이 책상에 손으로 가볍게 툭 쳤다.
들려오는 소리는 거대했다. 마치 동굴 내부에 있는 것처럼 웅웅 메아리치며 날 선 비난을 단숨에 사그라지게 했다. 그 사이 내면 깊은 곳으로 숨으려던 아를란의 영혼에 다시 제쉬 오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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