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7화 〉 지금으로서는 ...
* * *
"넌 어떻게 생각하지?"
"당연히 우린 친구라 생각해."
"그럼 되었다. 네가 여기서 나간다면 나 역시 나가는 게 좋겠다. 어차피 배울 것도 없어. 여기서 귀족들이나 할 법한 검술 훈련보다는 난 실전에서 배우는 검술이 더 편해."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유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한창 사선을 넘나들며 검술을 배운 바리오스에게 이러한 훈련 방식은 쉬이 적응하기 힘드리라 생각했다. 무척 시시하게 느껴지겠지.. 하지만 유진은 말로는 동의했지만, 바리오스에게도 이렇게 여유를 가진 훈련이 더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는 모르겠지만, 사선을 넘나들며 배운 검술은 몸이 기억하더라도 머릿속으로 다시 되새길 여유가 필요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성장한다면 그는 더욱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잔뜩 긴장한 몸을 잠시 여유로운 상황을 만들어 쉬게 해주고 풀어주며 지난 배운 점을 되새기라는 소리였다.
어쩌면 바리오스의 스승도 이러한 방식을 떠올린 게 아닌가 싶었다. 만약 이러한 일까지 생각했다면 바리오스의 스승이 제법 유명한 용병이지 않을까 싶었다. 보통 이러한 방식은 한낱 용병이 생각할 수 없는 방식의 훈련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바리오스가 깨달아야 할 테지만 말이다.
힐끔 바리오스를 바라보던 유진이 다시금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소아렌에 나가면 어쩌면 우린 만나기 힘들지도 몰라."
"그렇겠지.. 각자의 할 일이 있으니까. 허나 또 모르는 일이다. 어디에선가 우연히 만날지도.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유진이 잠시 바리오스를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고운 선을 가진 그의 하얀 얼굴과 더불어 붉은 머리카락이 살짝 부는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유난히 이질감이 느껴졌다. 변해도 너무 변한 것 같은 모습에 어색함을 느꼈을 때 유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너 술 마셨냐?"
"언제나 너는 진지한 말을 할 때마다 개소리를 하는군."
"아니.. 그냥.. 평소 네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지."
"그저 내가 아는 바가 있어 널 도와주었을 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흐음 그러셔? 이리도 황송할 줄이야~ 나쁘지 않은 조언이었어. 그래 아를란이 퇴학당한다면 나도 소아렌을 나가는 게 좋겠어."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심각해진 분위기에 장난을 더한 유진의 말에 바리오스도 말할 생각이 없는지 어느덧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볼품없는 철검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유진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이내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하필 여태껏 피해온 프리실라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그의 짙은 파문이 이는 눈동자가 다가왔고 끝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훈려장을 나섰다. 아무래도 지금의 대화를 몰래 훔쳐 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곧 다시 훈련이 시작할 때인데도 그녀는 끝내 훈련장을 벗어나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날 수업은 에일린의 주도하에 이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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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실라의 기숙사 방 안이었다.
'떠난다고?.... 정말?.. 이대로 헤어진다고?'
프리실라의 마음에 균열은 더욱 커졌다. 영혼에 흉이 진 것처럼 허한 마음속에 짙은 슬픔이 차올랐다. 슬픔은 눈물이 되어 마르지 않은 샘이 된 것 마냥 멈추지 않았다. 차마 아이들에게 눈물을 보일 수 없어 도망치듯 나왔다. 분명 에일린이 꽤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차오르는 슬픔은 쉬이 견딜 수 없었다. 특히 그랬으면 안 되었지만, 괜히 호기심이 일어 바리오스와 유진의 말을 훔쳐 들었는데 차라리 듣지 말았으면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이 망할 호기심은, 절망의 수렁으로 이끄는 호기심은 끝내 선을 넘고 듣지 말았어야 할 것을 들어버렸다.
그는 바리오스의 말마따나 떠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이제는 괜스레 바리오스를 향한 원망이 생길 정도였다.
"나쁜 놈.. 네까짓게 뭔데 유진한테 그딴 조언을 하는 건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한편으론 그러한 조언에 동의한 유진이 밉다. 정말 그는 아를란이란 여인 때문에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을 생각일까? 정말? 진심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이미 유진의 안중에는 자신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은 걸까? 그만큼 아를란이란 아이가 소중하다는 걸까?
수많 가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며 답변을 바랐다. 그 사이 거대해진 배신감은 고통이 되어 온몸을 난도질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눈물은 자꾸만 흐른다. 몇 번이고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겼다.
"흑...흑.."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도 자꾸만 숙여지는 고개를 따라 흘러내렸고 그 사이 투명한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절망감, 배신감, 수많은 감정이 한데 모여 온몸을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그 아이가 미웠다. 그 아이가 너무나 미웠다.
유진에게 자신은 무엇이었을까? 고작 하룻밤 즐기는 창녀나 다름없던 걸까? 이렇게 쉽게 헤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쉬운 여자였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생각이 편집증처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낳게 했다. 동시에 슬픔과 배신감은, 그를 향한 분노로 뒤덮인 채 몇 번이고 그를 향해 욕지기를 토해냈다.
그래 꺼져버리라고 떠나도 상관없다고 속으로 외쳤지만, 끝내 지독한 슬픔이 마음을 뒤덮었다.
"흑...흑흑.. 나쁜 놈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떻게.."
마음이 아프다.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았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첫사랑의 고통은 평생을 간다던 음유시인들의 터무니없는 소리가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고 인정했다. 이 아픔은, 상처는, 흉터는 심장을 도려내고 영혼에 새겨졌다.
그를 향한 거대한 사랑은 더 큰 배신감으로 더럽혀졌고 물들었으며 끝내 분노로 변했지만, 그 끝에 남은 건 참을 수 없는 슬픔의 웅덩이며 그 웅덩이에 허우적거리는 자기 자신이 전부였다.
이제 싫었다. 이런 고통도 싫었다. 차라리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더이상 이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검도 들기 싫었다. 옆구리 버클에 달린 검을 뽑아들었다. 하얀 검신이 매력적인 그랑베르의 모습을 보던 프리실라는 검을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그랑베르가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흉하게 굴렀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요한 방안에 내려앉은 고독이 짙은 외로움과 함께 온몸을 휘감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어 무릎에 얼굴을 박아 흐느꼈다.
"프리실라 선생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프리실라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기 싫었다. 하기엔 온몸이 너무 지쳐 힘들었다. 깊은 절망은 몸을 천근만근 짓누르는 기분이었기에 홀로 있고 싶었다.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집요하고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자꾸만 방해했다.
"찾는 분이 있는데.. 혹시 안에 없으신가요? 이상하다. 분명 들어오는 걸 봤는데.. 프리실라 선생님?"
분명 여자 기숙사 사감인 케일린 사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는 침대 옆 책상 위에 놓인 주먹만 한 마법 통신구였다. 프리실라는 부디 그녀가 자신을 내버려 두었으면 했다. 지금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혼자서 깊게 새겨진 상처를 보듬고 싶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만나서 가식적인 면모를 내보일 자신이 없었다.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따라 유난히 케일린 사감 선생이 무척 집요했다.
"프리실라 선생님? 유진이란 학생이 찾아왔어요. 1학년 검술 학부 학생이라고 하는데 담당 선생님 아닌가요? 프리실라 선생님?"
화들짝 놀랐다.
유진이 왜?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이유가 없었다. 이미 우리는 헤어졌으니까... 더이상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선생과 제자.. 아니 그마저도 이제 끝이겠지.. 다시 몸을 움찔했다.
설마.. 이대로 떠나겠다는 말을 하려는 걸까? 그 바리오스의 조언대로 아를란과 떠나겠다는 말을 하려고 온 것일까? 벌써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고? 자신은 이리도 아파서 갈팡질팡하는데?! 정말 이렇게 이른 시간에 마음을 정한 거라고? 이대로 떠날 거란 말인가? 분노로 뒤덮인 채 몸을 튕기듯 일으켜 마법 통신구에 이르렀다.
여러 망상이 온몸을 헤집어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통신구 앞에 선 채, 입술을 달싹였지만, 차마 턱 끝까지 차오른 말문은 입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되지 않았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단숨에 토해질 것 같았다. 속이 체한 것 마냥 답답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 아이를 잡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이미 그 아이의 마음속에 자신은 없는 것 같으니까.. 구차하게 느낄까 봐 오히려 유진이 자신의 집착에 더 실망할까 봐.. 차마 그 아이를 잡지 못하겠다.
통신구를 만지작거렸으나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프리실라 선생님?... 이런 혹시 잠들었나?"
결국 통신구의 빛이 사라지고 연락이 끊겼을 때, 결국, 프리실라도 쓰러지듯 주저앉아 서럽게 눈물을 토해냈다. 이제 정말 그 아이와 끝이었다. 유진과의 인연은 이대로 이렇게... 완전히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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