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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272화 (272/1,410)

〈 272화 〉 지금으로서는 ...

* * *

존칭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마븐은 그러한 사소한 문제에 반응할 수 없었다. 이미 온몸을 짓누르는 불안함은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했다.

오직 자신의 앞에 비릿한 미소를 그리는 유진의 모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트루먼처럼 거대하게 보였다. 이미 그의 눈은 사냥감을 사로잡은 포식자의 눈을 했으며 마븐은 그의 시선마저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했으나 그게 쉽지 않았다.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 말기를 반복했을 무렵 그가 손을 뻗었다. 포식자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오른손을 잡고 거칠게 잡아당겼다. 아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고작 아이의 힘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미 마븐의 세계는 부서져 내리고 있었고 평소 그의 힘은 포식자에 집어 삼켜진 상태였다. 그는 나약했고 미약한 저항으로 꿈틀거릴 지렁이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

"크읏!"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어느덧 유진의 손에 그의 꺼칠꺼칠한 손이 들렸고 그의 손가락을 보았다. 어울리지 않은 은색의 반지에 피식 웃으며 반지를 집었다. 그가 당황하고 저항하려 하는 순간 무언가 그의 몸을 움켜쥐는 기분을 받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마비라도 걸린 것 마냥 굳어버린 몸에 무언가 마법적인 힘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혹여나 싶어 트루먼을 보았다.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힘이었다. 그의 마법이었다. 허나 그럴 리가 없다. 마법이라면.. 당연히 이 반지가 막아줄 터인데! 마법의 흐름을 간섭해 무(無)로 돌리는 힘을 가진 반지였다. 그런데 왜?! 뒤늦게 깨달았다. 한낱 아티팩트만으로 위대한 트루먼의 마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진실의 마법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애초에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망연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을 때 그의 탁한 잿빛의 눈동자가 심장을 꿰뚫는 것 같다.

그 사이로 분노가 보였다.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은 새로운 피 대신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븐은 얼굴이 탈색된 것처럼 하얗게 세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허무하게 반지를 빼앗겼다. 유진이 반지를 보며 제쉬 오언을 보았고 그녀가 반지를 달라며 손을 뻗었다.

목숨과도 같은 반지가 허무하게 제쉬 오언의 손에 이르자 마븐의 얼굴이 더욱 절망으로 가득 찼다.

반지를 받아든 제쉬 오언이 반지를 보았고 움켜쥐기도 했다. 그리고 살짝 마법을 부리려 하자 놀랍게도 반지가 작게 진동했다. 동시에 그녀의 마법이 풀렸다. 그제야 제쉬 오언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븐에게 이르렀고 마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피했다.

그는 거대한 절망감을 마주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일이 끝내 선을 넘어 무너져내린다고 생각했다. 눈을 질끈 감았고 뒤늦은 후회가 마븐의 온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때였다.

"그자가 아티팩트를 사용했군요! 어찌 이럴 수가! 저 아티팩트로 진실의 마법을 무효화시킨 것이지요!"

마커스 라일라인이 한발 앞서서 소리쳤다. 그제야 다른 선생들이 놀란 얼굴을 그렸고 불신과 배신감으로 가득 찬 시선으로 마븐을 보았을 때, 마븐 역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마커스 라일라인을 보았다. 그러며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인 그에게 마커스의 단호한 시선이 마븐에게 쏟아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마븐은 제법 눈치가 빨랐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에도 눈치가 빨라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에 능했다. 그러므로 군대에서도 상급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오늘은 그 빠른 눈치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차라리 멍청했더라면 좋았으련만 이미 마커스 라일라인의 눈빛을 충분히 이해했다. 끝내 입을 닫으며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이 끝났다. 그가 자신을 버렸다. 혼자 떠안고 가라 한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마븐은 왠지 모르게 쓸쓸함과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다.

"마븐 선생님."

제쉬 오언이 그를 불렀다.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미 마븐의 머릿속은 폭풍우라도 몰아치는 것만큼 복잡하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자신을 버린 마커스 라일라인의 시선에 모든 것을 잃은 빈털터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마븐 선생!"

다시 한번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졌을 때,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절망과 좌절에 이른 눈은 공허함을 내비쳤다.

"당신이 한 증언 전부 진실이었습니까?"

"저는..."

머뭇거렸다. 말을 더듬거렸고 그의 눈알이 쉴 새 없이 흔들리며 차마 제쉬 오언을 마주하지 못했다. 입을 덜덜 떨었다.

"저는 ... 그, 그렇습니다. 지, 진실이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로 폭죽이 터져 올랐다. 파바박, 화려한 봄의 불꽃 축제처럼 자그마한 폭죽이 터지며 번쩍였고 모두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리게 했다. 한편 마븐에게는 저 폭죽 소리가 내면세계를 비롯해 자신이 여태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로 들렸다.

죄악을 지어 신께서 내린 호통이었다. 그간의 경력이며 여태 쌓아 올렸던 모든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며 붕괴하는 소리이자 형체조차 남지 않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였다. 허탈함이 맴돌았으며 씁쓸한 공허함을 느꼈다.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누군가 다시 물었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 거지?"

프리실라의 목소리였다. 이어 이들의 시선이 마븐에게 이르렀고 다시 아를란에게 이르렀다.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쌓였고 이내 혼란에 휩싸였다.

"무언가 위증이 있다고 한들 결론은 아를란이란 학생이 제시를 공격했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은 사실이지 않습니까?"

마커스 라일라인이 다시 껴들었다. 유진이 불쾌감이 인 눈으로 그를 보았으나 그의 조급한 시선은 제쉬 오언과 트루먼에게 이르러 있었다. 조급한 모습이 꼭 똥줄이라도 타는 것처럼 추잡스럽게 보였으나 한편 마커스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모르는 것 같다.

그는 오직 어서 판결을 내려 그만 징계 위원회를 끝내라고 닦달 했으나 제쉬 오언과 트루먼은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피곤한 눈을 매만지거나 흘러내리는 안경을 다시 추어올리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다른 학생들의 증언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분명 스물여덟 명의 학생들이 마븐 선생의 증언에 동조했습니다!"

그가 다시 소리쳤을 때, 유진의 시선이 그에게 이르렀다가 모두를 훑고는 트루먼을 보았다. 마침 트루먼이 또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 같다. 어찌 할 말이 없을까? 너무나 많았다.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리도 필요하지 않았다.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흘러간 일은 너무나 완벽하게 딱딱 들어맞았고 오히려 더 의심을 사게 했다.

동시에 소아렌의 추악한 내면을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유진이 낯빛을 굳히며 말했다. 이번엔 마븐도 마커스 라일라인에게도 하는 소리가 아닌 선생 전체에게 내리는 호통이었다.

"소아렌은 지금 썩어가고 있습니다."

"저 녀석이!"

웅성거림이 커진다. 벨른의 날 선 목소리도 들리지만, 봇물 터진 유진은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역겨울 정도로 썩어들어가고 있습니다. 소아렌은 권력 앞에 더는 모두에게 내리는 기회의 장이 아닙니다. "

"어찌 그렇게 생각하는가?"

트루먼이 묻자 유진이 냉소를 보이며 마븐을 보았다가 이내 마커스 라일라인을 향했다. 그들이 흠칫 놀라 했다. 이어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며 유진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겁니까? 이 썩어버린 곳은 고작 1학년 학생이 보아도 역겨운 내가 풀풀 풍길 정도로 진동하는데 말입니다.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역겹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된 겁니까? 아니면 정말 순진하고 멍청하고 병신같이 모르는 겁니까?"

"보자 보자 하니까! 네놈이 선생들을 우롱하는가!"

가만히 보고 있던 크레이아스가 사납게 소리쳤다. 잠시 유진의 시선이 그에게 이르렀고 잠시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말이 너무 심했습니다. 그런데 왜 저에게 화를 내는 겁니까?"

"아무리 네놈이 소아렌의 치부를 알고 있다고 해도. 모든 선생이 그러지 않을 터! 그런데 넌 모든 선생을 욕보이고 있다!"

그의 사나운 호통에도 유진은 빈정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그럴수록 크레이아스에게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거친 기세가 한 마리 짐승처럼 포효하며 다가오나 유진은 그러한 기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비아냥 섞인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렇군요. 1학년 학생이 고작 한 달도 안 돼서 알아낸 내용을 이곳에 선생이란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군요. 그러므로 자신은 죄가 없다? 몰랐다는 이유로? 선생이 되어서 한 학생이 전체 학생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와중에도 몰랐다는 이유로 이 터무니없는 죄에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게 억울하면 조금만 관심을 가져보지 그랬습니까?"

유진이 나지막이 묻자 선생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된 채 유진을 향해 불쾌감을 내비쳤다. 그러한 모습에 유진은 더욱 추악하게 보였다.

"남의 학생이라 그렇습니까? 남의 학생이라고 학생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음에도 모른 척하는 겁니까? 그러고도 선생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러고도 학생을 관리하는 직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 괴롭힘을 같은 교사도 껴 있는데도! 수치스러워해야 합니다. 분노해야 합니다. 저에게 아닌 자기 자신에게! 같은 선생에게!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군요! 그러니 무의식이라는 헛소리를 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히려 피해자인 아를란을 비난하겠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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