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 * *
앞에 드리워진 자작나무를 보았다. 가지 위에 덮인 눈은 꼭 이들이 눈으로 된 코트를 입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추억에 그리워했고 심해지는 외로움에 여러 사람의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제는 가족과 프리실라와 더불어 트루먼과 처음으로 사귄 롤랜드와 바리오스까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에일린의 모습도 떠올랐다.
문뜩 고민이 일었다. 과연 그녀의 마음의 진실은 무엇일까?
모호한 어투로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던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으나 불어오는 한기 속에 담긴 절망이 잠깐의 태평한 여유를 지독한 어둠으로 물들여 버렸다.
결국,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그럴수록 가슴이 미어지며 뼈마디가 저릿한 감각에 휩싸였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리운 이들의 모습은 계속해서 떠나가질 않아 더 큰 절망을 남기니 외로움이란 고통이 더 날 선 비수가 되어 심장을 후벼 팠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제법 굵직한 자작나무에 몸을 기대었다. 그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요하다. 흔한 산새의 울음소리며 벌레 소리도 없는 눈 덮인 자작나무 숲은 눈발이 떨어지는 소리와 웅웅 거리며 스산하게 우는 바람 소리만이 전부였다. 그만큼 적막감은 더 깊은 상념에 잠기게 했고 더 큰 외로움에 사무쳐 모두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외로움을 참지 못하고 다시금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렸다. 듬직한 아버지를 비롯해 귀여운 아리사가 떠올랐고 뒤이어 어머니 무리슈엘라가 떠올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한 미소를 그리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얹히게 했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끼고 아꼈던 엘리시아의 모습이 떠올렸다.
온통 걱정으로 뒤덮인 그녀가 유난히 보고 싶은 날이었다.
지금도 걱정으로 가득 차 있겠지? 소아렌으로 향하는 그날까지 온통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던 그녀는 몇 번이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후회가 일었다. 언뜻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더욱 씁쓸하다. 끝내 입가에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이어 바리오스와 롤랜드가 떠올랐다. 소아렌에 이르러 처음 사귄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문뜩 고개를 갸웃하다 피식 웃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겠네.."
말마따나 바리오스와 롤랜드를 이어 더는 친구라고 할 법한 사람이 없었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마지막이 될 것이니 말이다. 조금은 멋쩍은 얼굴로 헛웃음을 그렸다. 그래도 바리오스나 롤랜드라면 제법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고 생각해 아쉽지 않았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수십 명의 친구가 있다고 한들 마음 넣고 터놓을 수 있는 한두 명의 친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바리오스와 롤랜드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지금 자신의 생각은 하고 있을까 싶다. 아무렴.. 유진은 바리오스와 롤랜드가 제법 마음에 든 상태였다. 될 수 있다면 그들과는 평생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둘의 생각을 하며 엷은 미소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눈밭이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눈 하면 잊히지 않을 여인이 다시금 떠올랐다. 애써 잊으려 했고 어떻게든 떠올리지 않으려 했거늘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녀 역시 엘리시아 만큼이나 사랑하는 여인인데, 하물며 눈과는 가장 인연이 깊은 여인이지 않은가? 내리는 눈과 쌓인 눈을 보고 있자니 사실 가장 먼저 떠올랐고 최대한 잊으려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던 여인이지 않은가?
착잡함에 깊은 한숨이 토해졌다. 잿빛의 숨결이 입가 주위를 맴돌다 내리는 눈과 한데 어우러져 사라졌다. 그 사이로 그리운 이의 이름이 새겨졌다.
"프리실라.."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속삭였다. 당연하게도 닿지 않을 목소리는 공허한 자작나무 숲 사이를 맴돌다 허공에 사라졌다.
푸른 눈동자가 그리웠다. 푸른 머릿결과 꽃 내음이 물씬 풍기는 체취도 그리웠다. 말을 할 때마다 다가오는 따스한 숨결도 그리웠다. 그러며 흰 눈처럼 하얀 살결은 어떠할까? 어쩌면 지금은 엘리시아 보다 더 그리운 여인일지도 모르겠다. 예전부터 언제고 순위를 따지자면 1순위는 엘리시아라고 단언할 수 있겠지만, 지금만큼은 이렇게 눈이 내리고 눈 덮인 날이면 프리실라가 가장 그리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아.."
차마 고개를 내저으며 엷은 한숨으로 뒷말을 가리려 하나 그게 쉽지 않았다. 계속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가 애석하게도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을 싫어하리라... 크나큰 실망감에 더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분명 그러하리라..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훈련장에서 더는 꼴도 보기 싫다며 나가라던 모습은 정말이지 큰 충격과 실망으로 다가왔다. 그녀에게 미안함도 컸다. 분명 진실이 아닐 거라 믿었으나 여전히 눈앞에 어른거리는 날카로운 눈매와 그 어느 때보다 더 잔인하고도 서슬 퍼렇게 다가온 목소리는 절대 떨쳐낼 수 없었다.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얼마나 큰 실망감을 느꼈는지 모를 것이다. 얼마나 큰 죄책감에 휩싸였는지 모를 것이다.아직도 그때의 날 선 목소리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여전히 심장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고 있으니 말이다.
더는 그녀와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으리란 생각도 했다. 심장이 도려내진 기분이었다. 무언가 마음 한편에 자리한 것이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평생 잊지 못하겠지..
다시금 짙은 한숨이 입가에 맴돌아 토해졌다.
잠시 걸음을 멈췄고 뒤를 돌아보았다. 긴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제법 먼 거리를 온 것 같다. 그럼에도 저만치서 곡괭이가 땅땅! 거리며 얼어붙은 땅을 힘겹게 파는 소리가 들렸고 삽으로 흙을 퍼내는 소리도 그 사이사이마다 들려왔다. 왜 드워프들이 이 일을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알 것 같다. 아무리 조용조용 조심히 한다고 해도 고요하고도 적막한 숲에서는 자그마한 소리도 마치 확성기를 단 것 마냥 크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유진의 표정이 다시금 진중해졌다. 이제 더는 상념에 잠길 상황이 아님을 깨닫고는 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런 바람이 유진의 앞에 이르렀고 바로 코앞에 엘리사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소리쳤다.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어!
"어디에서?!"
당황한 유진이 소리쳤다. 그러자 엘리사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온통 자작나무만이 드리워진 곳이었다. 그 끝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며 하물며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믿어야 했다. 요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조급해진 유진의 시선이 여전히 요란한 소음을 내며 얼어붙은 땅을 파는 이들에게 닿았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모른 채 요란한 소음을 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야 했다.
"모두에게 알려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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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뚝 떨어지자마자 프리실라는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뒤로 돌아볼 때마다 거친 굉음과 함께 자작나무를 부수고 달려오는 기형 괴수들의 흉흉한 안광이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번들거리고 있음이 보였다. 그러한 모습에 프리실라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달리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저들에게 유진이 당하진 않았을까 공포심과 절망감이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애써 부정하려 하나 저들의 위용을 눈앞에 마주한 순간 점점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감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하물며 이렇게 달리는 와중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쉬이 포기하지 않은 그녀는 바로 코앞에 붉은 바탕의 동그란 검은 무늬가 새겨진 무당벌레를 보았다. 트루먼이 주었던 벌레였다. 이곳에 오자마자 상자를 열어 유진을 찾기 위해 날려 보냈다. 마침 벌레가 흔적을 발견했는지 처음 보는 자작나무 숲에서도 자신의 집인 것 마냥 이리저리 제법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향했다.
프리실라는 그런 벌레의 뒤를 쫓았으나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의 뒤에 불청객이 껴들었다. 차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은 기괴한 모습을 가진 괴수들은 한둘씩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괴수들이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마침 벌레가 방향을 틀었다. 프리실라 역시 방향을 틀어 곧장 몸을 날렸으나 집요한 괴수들은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프리실라의 뒤를 쫓았다.
"하아.. 하아!"
그렇게 제법 오랜 시간 달렸을 무렵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고 폐부를 찌르는 한기는 칼날처럼 다가왔다.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하나의 거대한 자작나무 거대한 파공성을 남기며 쏘아져 날아온다. 프리실라는 벨트에 찬 검을 꺼낼 생각조차 못한 채 우스꽝스럽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연이어 여러 개의 자작나무가 마치 화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형 괴수들이 프리실라의 속도를 쫓지 못해 다른 방법을 고안해낸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은 제법 효과가 좋았다. 마치 화살 비처럼 내리는 자작나무에 프리실라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몇 번이고 눈 덮인 바닥을 굴러야 했다. 하물며 사방에서 울리는 쿵쿵거리는 진동에 자꾸만 균형을 잃어 넘어졌고 더불어 튀어 오르는 나무 파편에 온몸에 작은 생체기가 무수하게 쌓이기 시작했다.
점점 프리실라의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꺄아악!"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