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7화 〉 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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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층계와 더불어 1층은 양옆으로 복도가 이어져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구조의 저택은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자연스레 둘의 시선이 한데 겹치며 왼쪽과 오른쪽을 정하려 하나 유진이 먼저 결정을 내리고는 프리실라의 손을 잡고 함께 왼쪽 복도로 향했다.
그녀와 떨어져 있기 싫었다. 프리실라 역시 그러했는지 발그레하게 변한 얼굴로 유진의 손길을 따랐다. 왼쪽 복도에는 퉁명한 타일이 깔려 있었다. 천장으로는 두 개의 샹들리에가 띄엄띄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달려 있었다. 왼편 벽 쪽으로 세 개의 크지 않은 방이 있었다.
프리실라와 유진이 가장 앞선 방에 이르렀고 문을 열었다. 안쪽으로는 뒷마당이 고스란히 보이는 넓은 창문이 보였으나 창문은 조각조각 깨져 찬바람과 창문 아래 책상 위에 눈이 쌓여 있었다.
여기저기 드레스며 여러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의자는 흉하게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바닥 역시 진창으로 질퍽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방에서는 따듯하게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을 닫고 다시 복도로 향했다. 오히려 양옆으로 막힌 복도가 더 따듯할 정도였다.
이들의 걸음이 다음 방으로 향했다.
왼쪽 복도 중앙 방을 열었다. 전 방보다는 조금 나았으나 불을 피운다 해도 창문에 빛이 투과하여 바깥에 고스란히 보일 것 같았다. 모두가 바라는 곳은 방안에 불을 피워도 괜찮을 방이었다. 허나 이 저택은 뒤편 마당이 보일 수 있게 1층이 꾸며져 있었기에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다음 방도 그러했고 이어 왼편 끝쪽에 이르렀을 때, 둥그런 홀처럼 꾸며져 있는 곳에 이르렀다. 벽이 온통 창문으로 되어 있었다. 물론 군데군데 부숴져 있었고 바닥은 진창이지만, 예전 이 공간이 어떻게 사용 되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고급스러운 복장을 하고 이곳에 이르러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었을 것이다.
사교를 위한 공간이 분명했다. 뒤편으로는 한때 아름다웠을 마당이 보였을 테고 왼편 끝쪽에 살짝 턱이진 곳은 음악대가 은은한 음악을 들려줄 것이 분명했다. 조금 더 안쪽에 이른 직사각형 기다란 식탁에는 수많은 음식이 쌓여 있을 테다. 이러한 곳에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때를 즐겼을 것이다.
웃음이 끊임이 없었겠지.. 몇몇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며 늦은 밤, 조금은 으슥한 화단에 이르러 사랑을 나누기도 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처음 본 여인과 사내에게 사랑의 싹을 틔우게 했을지도 모르고 때론 슬픔 나누고 행복을 나누며 즐거움을 나누었을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이들은 이렇게 부지불식 순간에 몰락할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며 애초에 몰락하리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유진의 걸음이 중앙에 이르러 멈췄다. 다시 참혹하고도 잔인한 현실이 눈앞에 드리워졌다. 따듯함이 가득할 공간에 한기가 휘몰아쳤고 진창이 된 바닥은 이들의 운명처럼 더럽혀져 있다. 퀴퀴한 곰팡내, 물비린내가 진동한다. 날카로운 공기가 폐부를 깊숙이 찌른다.
웃음이 가득해야 할 홀은 억울함이 가득한 바람의 귀곡성만이 맴돌았다.
과거와 현재가 겹쳐 보이며 씁쓸함을 느꼈다.
최후의 날이 오기 전 밤, 이들은 무슨 말을 속닥이며, 어떠한 미래를 그리며 어떤 사랑의 약속을 했을까? 몰랐겠지? 두려웠겠지? 무서웠을 거야..
귓가에 비명이 들린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가 이어지고 세상은 천둥이 치는 것 마냥 사방에서 비명과 요란한 소음이 이어진다. 창문이 깨지고 내리는 눈발은 거세며 부는 바람은 무척 차갑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괜찮을 거야. 이겨낼 수 있을 거야, 버텨낼 거야.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을 테다. 하물며 갈라도의 마지막 황제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은 하나같이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며 예전처럼 이 홀에서, 따듯한 공간에서 만찬을 즐기고 서로 춤을 추며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생명을 싹 틔울 것이라 꿈을 꾸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괜찮다는 거짓말을 하며 점점 차오르는 불안을 속이려 했을 것이다.
"유진 괜찮아?"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상념을 깨었다.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꾀죄죄한 얼굴이 안쓰럽게 보이는 그녀가 걱정스런 얼굴을 하며 다가오자 유진이 피식 웃더니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손을 건넸다. 프리실라의 눈이 무슨 뜻인가 싶어 망연하게 껌뻑껌뻑 눈을 뜨자 유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와 한 곡 추시겠나요? 프리실라님?"
마치 나이 많은 귀족이 된 것 마냥 예의를 담아 정중하게 부탁한다. 뜬금없는 부탁에 그녀가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금세 피식 웃으며 유진의 손에 거칠어진 손을 얹었다. 유진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등에 키스를 하며 차츰 앞으로 향했다. 이어 유진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에 이르자 프리실라가 난감한 얼굴을 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나 추, 춤은 아무것도 몰라.."
"어깨에 손을 올리면 된답니다. 그리고 저도 사실 잘 몰라요. 그냥 잠깐만 즐겨요."
서로 키득키득 웃고는 프리실라가 서툰 손길로 유진의 어깨에 손을 얹자 유진이 숫자로 박자를 맞추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둘의 신형은 조심스럽게 원형을 이루었다.
"오른발부터,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아직 갈라도가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때의 남녀처럼, 이제 막 사랑을 알게 된 풋풋한 연인들의 춤사위처럼 둘의 서툰 움직임이 춤을 표방했다. 몇 번이고 프리실라의 가죽 신발이 유진의 발등을 찍었다. 유진 역시 몇 번이고 자신의 발과 발이 엇갈려 몸이 휘청였으나 둘은 그럼에도 제법 그럴싸한 춤사위를 멈추지 않았다.
음악이 들리는 것 같다. 꾀죄죄한 셔츠와 입고 있는 가죽 갑옷은 어느덧 드레스가 되었고 예복이 되어 있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차분한 노란빛을 내리쬐어 주었고 잔잔한 음악은 풋풋한 연인의 용기가 되어 준다. 그 아래 사뿐사뿐 밟히는 붉은 카펫, 그 위를 노니는 많은 이들 사이, 둘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어색한 몸집에 사랑이 만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진의 입가에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을 박자에 맞춰 소리 냈다.
"딴단단 딴단다 따다단. 하나 둘 셋, 턴!"
"히힛!"
잠시 근심과 걱정을 잊었다. 오랜만에 둘 사이에 웃음이 맺혔고 다른 의미로 땀이 살짝 흘렀다. 부는 찬바람은 그날, 그때의 따사로운 바람처럼 다가와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하나의 곡이 끝나고, 이어지는 다음 곡에도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춤을 추었으며 두 곡을 더 끝냈을 때, 거칠어진 숨 사이로 서로의 시선이 마주했다.
더는 춤을 추기엔 시간도 없었고 지치기도 했다. 허나 둘은 그 어느 때보다 활짝 미소를 그렸고 이내 입술이 한데 겹쳤다.
평범한 입맞춤이나 짧은 키스가 아니었다. 잔뜩 상기된 마음속, 늦은 밤, 어두운 화단에서 밀회를 즐기는 풋풋한 연인들처럼 서로를 향한 이끌림이란 불길이 치솟은 상태의 키스였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서로의 혀가 한데 겹쳤다. 얼마 만일까? 이렇게 키스를 나누는 것이? 둘은 얼마 만인지 떠오르지 않았으나 아무렴 상관하지 않았다.
기다렸고, 고대했던 순간이었으니 잠시 모든 생각을 지웠다. 서로의 달콤한 타액과 숨결이 한데 겹쳐지고 이내 하나가 되는 느낌은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아 심장을 미친 듯이 요동치게 했다. 이어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거칠어진 숨 사이로 몽롱하게 뜨여진 둘의 시선이 한데 겹쳤다.
"어느새 네 키가 나랑 똑같아졌어."
프리실라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진의 키와 프리실라의 키가 똑같아졌다. 예전에는 더 작았는데 간신히 170cm 정도는 되었나 보다.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모습이 유진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동안 힘을 안 써서 그런지 다 키로 갔나 봐요."
"응? 아앗.... 음.."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고 얼굴을 붉혔다. 아무래도 무슨 뜻인지 눈치챈 것 같자 익살스러운 유진의 웃음이 그녀를 놀렸다. 그녀도 입꼬리를 실룩이며 히죽히죽 웃으며 유진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이 가득한 푸른 눈동자를 들어 마주했다. 서로 마주한 눈에 거대한 욕정이 어슴푸레 맺혀 있었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넌 모를 거야. 너와 싸우고 난 뒤에도 언제나 너와 함께 있고 싶었어,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 너와 단둘이 있고 싶었어. 그리고 널 느끼고 싶었어.."
"저도 그래요. 매일 누나 생각에 잠도 못 잤어요. 밥도 잘 못 먹었어요. 매일 누나 생각에 미칠 것 같았어요."
그녀가 씁쓸한 미소를 그려 대답했다.
"... 미안해."
유진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제가 더 미안하죠."
이어 마주한 시선, 꿀이 떨어지는 애틋한 시선 뒤 다시금 입술이 한데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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