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5화 〉 칼의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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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이 보이더냐?"
목소리가 한층 더 위엄이 서렸다. 젊음이 녹이 슬듯 나이가 들고 있었고 호탕한 목소리에 무게감이 실리며 쇳소리가 섞였다. 로아나는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었으나 그저 고개를 저었다. 사내가 조금 아쉬움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붙인 이름 역시 모르겠구나?"
놀라웠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검의 바람이 지금에서야 들어주는 것일까? 한낱 꿈으로?
"대대로 너에게 여러 이름이 있었다. 너는 왕의 검이니까 그리고 널 인계 받는 순간, 즉 다음 세대의 왕이 되는 순간 너에게는 새로운 이름이 생기는 것이지.."
무슨 소린지 몰라 그저 멍하니 그의 말을 들었다. 대신 무언가 그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침묵하니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의 얼굴에 아스라이 맺혔다가 사라지는 안타까움은 로아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 이유를 몰랐다. 그의 목소리가 연실 이어졌다.
"팔콘, 프라우드, 슈라우드, 슬레이어, 여러 이름이 너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더니 슬쩍 시선을 돌려 다시 샛별이 내려앉은 도심을 바라본다. 어느덧 도심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여름날의 후끈한 바람은 사라지고 뼛속까지 아리는 한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사이 잿빛의 눈이 슬그머니 하늘에서 내려 지상을 물들였고 샛별은 그 빛을 잃어 어둠과 절망으로 물들었다.
절망의 무게는 몹시 무거워 주저앉고 끝내 불타 그슬리며 뼈대만 남고 터만 남았다.
중앙 광장에 분수대 역시 빛을 잃고 물이 메마르며 그 위에 잿빛의 수의가 소복하게 쌓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점점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생동감과 웃음은 비명에 찢어발겨 지며, 울부짖음으로 돌변했다. 여기저기 무너지고 부서지며 붕괴한다. 부지불식 순간에 찾아온 종말은 단숨에 갈라도를 뒤덮었다.
그것은 저주였다.
평화롭고 안락한 이곳은, 아름다움으로 샛별이 내려앉은 도심은 지옥이 되었다.
한편 사내의 시선이 도심에 이른 채 몸을 들썩인다. 잠시 말없이 지옥으로 변한 도심을 보던 그가 다시 로아나를 보았다.
얼굴이며 표정은 여전히 보이지 않으나 그의 감정을 느꼈다. 다시 검으로 돌아간 것 같으나 그의 시선은 분명 육신을 가진 자신을 보고 있음을 느꼈다. 그 순간 드리워진 달빛이 잿빛으로 물들고 내리는 거센 눈발 사이에 모습조차 흐릿하게 흐드러지는 것 같다. 그의 모습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흐느껴 울고 있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짐을 느꼈다. 그가 가슴에 품은 거대한 슬픔에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입가에 나오는 건 작은 탄식이 전부였고 눈가에 흐르는 눈물이 전부였다.
도시와 함께, 그와 도시는 마치 한몸이 된 것 마냥 도시가 망가지고 부서지는 순간 그의 몸도 부서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입가에 피를 토하며 말했다.
"날 찾아오거라... 네 이름을 가르쳐주마 그리고 종말의 끝에 새로운 왕의 손을 빌려 직접 날 베어라.. "
징징징 그의 옆구리에 매달린 어셉터가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검을 뽑아들었다. 챙! 맑은 소음이 뿜어져 나오며 달빛에 반사광으로 번쩍이는 하얀 궤적이 그려졌다. 검 끝이 로아나에게 겨누어졌다. 징징징 칼이 운다. 계속해서 운다. 이어 폼멜 부분 검병 부분, 그리고 가드 부분에 박힌 보석이 환한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역수로 잡았다.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 저주의 끈을 새로운 왕과 함께 직접 베어라! 오래전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지금 너는, 너와 함께한 왕은 할 수 있으리라 난 믿는다."
"무슨 소리야."
처음으로 물었다. 그러나 사내는 그 이후로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 순간 강렬한 빛이 토해지며 로아나의 정신은 다시금 아득한 어둠에 삼켜진 채 정신을 잃었다. 그 사이로 사내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다가와 사라졌다.
"왕을 증명하는 검은 왕의 사슬마저 끊는다. 왕은 곧 갈라도이니 부디 사슬을 끊어 갈라도의 저주를 끊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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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뒤숭숭한 꿈의 여운은 제법 오래갔다. 언제나 잠에서 깨면 알 수 없는 고뇌를 남기게 했다.
꿈의 여운을 느끼던 로아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공간.. 도시를 벗어나기 전에 잠시 머물게 된 저택이었다.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여기저기 나무로 된 책상이며 탁자, 의자로 창문을 가린 짙은 어둠 속에 노란 불꽃이 일렁이는 곳이었다.
멍한 시선으로 불을 보았다가 다른 이들을 보았다.
다른 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근처에 술 냄새가 진동했다. 고기 냄새도 진동하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고팠다. 잠시 옆에 나뒹구는 붉은 과일을 하나 집어 들었다. 이름은 모르나 이곳에서 몇 번 먹어본 기억으로는 안에 동그란 씨앗이 있었고 주변이 분홍빛으로 된 과일이었다.
무척 말랑말랑 한 과육이 장점인 과일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훑었다. 여러 드워프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이들에게 지금 여기가 어딘지에 대한 위기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물며 불을 지키는 사람마저 없어 그 모닥불의 세기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니 뒤늦게 유진과 프리실라 역시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잠시 멍한 시선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한 개 더 과일을 손에 들고 쌓인 장작을 불 위에 대충 올려놓고는 과일을 베어 물며 걸음을 옮겼다.
느껴진다. 유진과 하나가 되어 그가 어디에 있는지 느껴지기에 그를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방 밖에 유진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가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나와 기나긴 복도에 이르렀다. 복도는 역시나 어두컴컴했다. 그래도 미세한 달빛이 창밖에 새어 들어오긴 했지만, 대체로 어두컴컴한 저택은 을씨년스러웠다.
잠시 멈춰 선 채 다시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혹여나 괴물이 있지 않을까? 겁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꿈을 꾸고 난 뒤, 괜한 공허한 마음에 유진이나 프리실라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한 감정이자 여운은 지금 눈앞에 드리워진 기나긴 어둠의 복도를 보며 느낀 공포보다 더 컸기에 유진을 찾아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검은 구두로부터 구둣발 소리가 공허한 복도를 올렸다.
유진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와 연결된 실이 무척 두껍고 짧았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뱃속에 울리는 듯한 나침반은 그가 어디에 있는지 세세하게 가리키며 말해주고 있었다.
"맨날 나만 두고 사라지지?"
괜히 자신을 두고 어디론가 가버린 둘을 향해 퉁명스럽게 구시렁거리고는 하나의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하얀색의 벽처럼 하얀 칠이 된 문과 그 사이에 조금은 해진 금색의 모양과 해의 문양이 그려진 문이었다. 문앞에 선 채 로아나는 조금 더 유진의 강렬한 연결을 느낄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 가까이 이르러 나무로 된 문에 귀를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방음이 어찌나 잘 되어 있는지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답답함에 문고리에 손을 얹고 살짝 힘을 주었다. 달칵,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그러자 확 풍겨오는 후끈한 열기 그 사이에는 지독한 주향(??)도 가득했으나 알 수 없는 후끈한 열기가 더욱 공기를 무겁게 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다가오는 여인의 교성이 귓가에 닿자 로아나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했다.
그렇게 좋을까?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선에는 자신에게 닿지 않았다. 로아나는 그들이 깨닫지 못하게 문을 닫고는 방 한구석에 이르러 텅 빈 방안의 유일하게 침대만 남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두 연인이 마치 날 것 그대로가 된 채 음탕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로아나는 가만히 앉아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런 행위가 그렇게 좋을까?'
로아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감각과 감정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며 프리실라의 평소 모습을 떠올렸다. 타인에게는 쌀쌀 맞으면서도 표정은 얼음장 마냥 차갑기만 하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런데 지금 모습을 보자면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마치 그녀의 몸에는 두 개의 인격이 들어있는 것 마냥 유진 앞에만 서면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조금 더 솔직해지고, 어찌 보면 천박하지만, 기품이 흘렀고 그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인다. 같은 여인이 보아도 그녀는 무척 아름다울 정도로...
하물며 인간 경험이라곤 없는 검이 보아도 프리실라라는 여인은 무척 아름다웠다. 닮고 싶을 정도로...
그런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교성을 터트리며 하얀 나체가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야릇한 행위와 음담패설을 서슴없이 토해내는 것을 보자면 추잡스럽고 남사스럽게 보였으나 그 일면의 모습이 다르게는 몹시 곱게 보였으며 왠지 모르게 부럽기도 했다.
문뜩 자신도 저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내면에 저런 모습이 잠재되어 있진 않을까? 어느 여인이든 저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진 않을까? 그리고 자신 역시 여인이니..
검이되 육신과 영혼을 가졌으니...
잘 모르겠다. 딱히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 아직 유진의 성욕을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유진과 프리실라가 나누는 저 어른들의 행위를 보아도 몸의 변화는 없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게다가 그는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었고 믿음직스러운 오빠와 같았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 저들이 나누고 있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으며 성욕 역시 그러했다.
손에 들린 분홍빛 과일을 한 입 더 베어 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며 둘의 음탕한 행위를 망연하게 감상하며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하으읏.. 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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