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441화 (441/1,410)

〈 441화 〉 태양의 의자

* * *

"흐음..."

무리슈엘라는 억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아직 울 수 없었다. 트루먼의 말마따나 아직 유진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야 했다. 그래 그 이후에 울어도 되었다. 유진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에는 슈리엘이란 이름을 벗어 던지고는 마음껏, 목청 높여 울 것이다. 그리고 복수의 칼날을 갈 것이다.

이 모든 원흉의 존재를 향해 목을 벨 것이다. 번뜩이는 시선이 트루먼에게 이르렀다.

사명이 되었다. 검이 필요했다. 마음에 벼려진 검처럼 진정으로 날카로운 검이 필요했다. 검을 준비하리라.. 검이 준비되는 시기에 유진이 돌아올 것이며 그러지 못한다면.. 슈리엘의 이름을 버리고 그를 숙청할지 그렇지 않을지 결정할 것이다.

무리슈엘라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 일어섰다. 힐끔 트루먼을 보았고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다이크 슈리엘과 엘리시아 그리고 아리사가 뒤늦게 일어섰다. 엘리시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으나 그게 쉽지 않아 보였다. 큰 충격을 받았는지 멍해 보였다. 그런 엘리시아를 아리사가 다독여주고 있었다.

슬픔에 사무쳐 멍해진 딸아이의 모습을 보던 무리슈엘라가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유진이 돌아올 그날 다시 돌아오도록 하지요."

"고맙군. 시간을 주어서."

트루먼이 씁쓸한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그러나 무리슈엘라가 다시 그를 노려보며 단단히 경고했다.

"좋아하긴 아직 일러요. 남은 시간은 저의 검을 갈고 벼르는 시간이니까. 다음에 올 때에는 검을 준비해 올 거에요. 만약에... 정말 만약에 유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의 목을 베어 버릴 것이에요."

"무리슈엘라! 아무리 그래도 그건 허락할 수 없소!"

다이크가 슈리엘이 다급히 그녀의 무례를 가로막으려 했다. 이번엔 그녀의 시선이 다이크에 닿아 말했다.

"그게 불만이라면 슈리엘의 이름마저 버리겠어요. 다시 무리슈엘라 일라일라로 돌아가겠어요."

"다, 당신..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소리요?! 하물며 트루먼 선생님이 억지로 보낸 것도 아닌 충분한 거래로서 진행된 일이오. 우린 그저 살인자의 가문이 될 것이오!"

화들짝 놀라 언성을 높이자 무리슈엘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울음 기가 다분한 목소리는 몹시 위태로웠다.

"내게 그만큼 유진은 소중해요. 살인자가 되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애초에 유진에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유진이 그곳으로 갈 일이 없었을 테죠! 분명히 말하겠어요. 그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아이를 위한 복수는 제가 죽는 날까지 사명이 될 거에요."

"허허.."

그녀는 자신의 말만 하고는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급히 걸어 교장실을 나섰다. 당황한 다이크는 눈을 껌뻑이며 무리슈엘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힐끔 트루먼을 보았으나 착잡함을 담은 눈은 씁쓸함을 남기고 있었다. 마침 엘리시아와 아리사가 스쳐 지나가 무리슈엘라의 뒤를 쫓았다.

트루먼의 입가에도 짧은 한숨이 이어졌다. 다이크는 그런 트루먼의 모습을 보자니 몹시 안쓰럽게 보였다. 깊고 무거운 고뇌에 빠진 초췌한 노인의 모습은 모두가 떠받들며 경외하는 대마법사이자 현자로 보이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추레하고도 초췌해 보이는 모습은 그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마침 시선이 마주했다.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에 깊게 새겨진 고뇌와 탁한 잿빛의 눈동자에 담긴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그 역시 유진을 향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내비치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꼭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 사이로 죄책감도 가득했다. 허나 그 속에 살며시 숨은 욕망은 분명 자신과 비슷하다 여겼다.

모를 수 없었다. 트루먼도 자신과 같은 부류였다. 원하는 바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잔인함도 가지고 있었다. 후회하고 안타까워하나 내심 기대하고 다른 의미로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 역시 갈라도를 향한 열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음을 말이다. 다이크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유진이 가지고 올 이득에 마음 한편으로 욕망을 내비치고 있음을...

서로가 눈치챘으리라 여겼다.

다이크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번엔 자신이 선택할 차례였다.

생각조차 하기 싫다만, 유진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은 과연 무리슈엘라의 편을 들어야 할지.. 무리슈엘라를 잃으면서까지 공과 사를 구별해 이익을 얻어야만 할지..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감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자리임에 쓰라리듯 아리지만, 결단은 이미 내려져 있었다. 자신에겐 슈리엘이란 낙인이자 꼬리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리슈엘라의 무모한 사명은 이를 수 없어야만 했다. 그녀가 검을 들어서는 안 되었다. 더는 이 이상 무례를 범해선 안 되었다.

그러나 자식을 잃은 어미의 한은 감히 지울 수 없는 거대한 한이었으니.. 분명 그녀는 말마따나 슈리엘의 이름을 버리고 다시 예전의 전 성인 일라일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 뜻은 곧 슈리엘이란 이름표 앞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뜻일 테다.

반드시 검을 들겠지..

참으로 막막하고도 답답한 상황이다. 검을 든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그녀를 막아야 했다. 그녀가 자신을 미워할지라도. 슈리엘을 위해서라면...

문뜩 너무 최악의 상황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다. 애초에 유진이 돌아오면 좋게 끝날 것이 분명하니 다이크는 무거운 걸음을 옮기면서 부디 유진이 돌아오길 바랐다.

문을 열고 나섰다. 드리워지는 햇살이 무척 반가웠으나 그 햇살 사이에 담긴 짙은 근심은 상쾌함을 남기지는 않았다. 입가가 씁쓸해 입맛을 다시나 갈증이 일고 입술이 부르터 엷게 피 맛이 느껴졌다. 문 앞에서 고뇌에 잠긴 무리슈엘라를 보았다. 잠시 그녀를 달래고 싶었으나 손길은 차마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입술은 달싹이며 멈칫했고 끝내 주저하다가 닫았다.

말 없이 층계로 향했다. 때마침 엘리시아가 침묵을 깨었다.

"잠시.. 누구와 얘기 좀 하고 와도 될까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에요."

고뇌에 잠겼던 다이크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누구를 말이냐?"

"그냥.. 잠깐이면 돼요."

"그러려무나.."

무리슈엘라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고뇌에 잠긴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이크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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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나요?"

층계를 내려오던 엘리시아는 마침 계단 아래에 서 있던 에일린을 보며 말했다. 에일린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잠시 따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4층에 따로 개인실이 있어요."

"좋아요. 저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니 잘 되었네요."

서로의 분위기는 무리슈엘라와 트루먼의 대화처럼 잔뜩 날 서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을 정도로 날 선 기세는 서로를 향해 벼려진 송곳니를 들이밀었다.

엘리시아는 에일린을 따라 방에 이르렀다. 작은 방은 저택의 가장 작은 방보다 작았으나 정리정돈이 잘된 곳이었다. 몹시 아늑한 곳이었다. 그곳에 이르러 둘의 시선이 다시금 마주했을 때, 에일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유진에게 관심이 있어요."

"..."

단도직입적이고도 과감한 고백을 예상치 못했기에 엘리시아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그러며 무어라 대답하려던 찰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유진에겐 다른 여자가 있어요. 그래서 저 역시 사실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죠. 물론 당신 이야기가 아니에요. 그에게는 지금 당신 말고 다른 여인이 있어요. 저와는 달리 그녀와는 진정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었죠.."

거대한 충격이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분명 우려했던 일이었으나 쉬이 충격에 헤어나오기 힘들어 끝내 말문이 닫혔다. 한순간 머리가 백치가 된 것 마냥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짙은 파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마주하니 그 사이로 에일린의 잔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도 전 유진에게 관심이 있어요. 그 아이가 다른 여인이 있다 할지라도 관심 없어요. 어차피 슈리엘은 하이란의 몹시 높은 귀족이라면 첩을 두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첩...하하.."

엘리시아가 헛웃음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에일린은 진심을 담았기에 무덤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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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아래에 드리워진 어둠이 바로 코앞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화원이었으나 지금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길게 자란 나무는 정리되지 않았다. 하물며 앙상하게 변한 나무는 쭈글쭈글한 마녀의 손 마냥 흉측했고 중구난방으로 뻗쳐 있었다. 어찌나 섬뜩한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는 어떠한 기척도, 생명의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오직 잿빛의 눈으로 수의를 입은 화원은 옛날 찬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만연한 죽음과 어둠만이 깔려있었다.

도망칠 수 없는 저주와 죽음에 삼켜진 채 쓸쓸하고도 외로이 최후를 맞이한 폐허였다. 그러며 이어지는 길목에는 굳게 닫힌 성의 정문이 보였고 그 옆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솟아오른 첨탑은 빛바랜 상태로 군데군데 헐벗은 채 만연한 민낯을 보이고 있었다. 그 아래 드리워진 어둠을 마주한 유진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굳어져 있었다.

프리실라 역시 그러했다. 서로 맞잡은 손이 새파랗게 샐 정도로 절로 힘이 들었으며 누구 하나 선뜻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딛기 힘들었다. 마침 한기 가득한 바람이 둘 사이를 스쳐 지났을 때 둘 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이로 파문이 가득한 유진이 입술을 달싹였다.

"굉장히 오싹하네요."

"그, 그러네.."

마른침을 꿀컥 삼키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물며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 박동은 입밖에 토해질 것 마냥 쿵쿵쿵 울리고 있었다.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심장에 두려움이란 말뚝이 박혀 있는 것 마냥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맞잡은 프리실라의 하얀 손을 더욱 거세게 쥐었다. 그럼에도 쉬이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들어가야 해. 분명 저곳에 로아나가 있을 거야."

프리실라가 말했다. 유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 안에 로아나가 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아무리 호랑이 굴이라 할지라도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쉬이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은 어찌나 무거운지 천근만근이었다. 하물며 앞에 드리워진 어둠에 닿기 싫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있는 힘껏 힘을 주며 드리워진 어둠에 간신히 한 걸음 내디뎠다.

한 순간 살기가 스며드는 것 같다.

발을 내딛는 순간, 들어서면 안 되는 곳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일어 위험의 경종이 이명처럼 다가와 몸을 울렸다. 문뜩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존재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무척 가까이서 느껴졌다. 민감해진 감각에 닿는 진득한 살기가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온몸을 휘감았다.

분노와 증오, 짐승의 누린내까지 다가왔다. 고작 어둠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살갗을 뚫고 뼛속까지 스며들어 뼈마디가 뻐근했다.

잔뜩 경직된 프리실라의 몸도 그러했다. 그러나 몸은 어둠에 홀린 것 마냥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불안한 시선은 연실 어둠을 파고들어 그 속을 힐끔힐끔 훔쳐 보았다. 그런 둘의 숨소리가 몹시 거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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