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2화 〉 태양의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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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드리워진 화원과 길게 이어진 곧은 길 사이에 경계선이 없었다. 어둠이 스며든 눈은 경계선을 지우고 소복하게 쌓여 걸음을 무겁게 했다. 그 옆으로 막무가내로 자라난 나무는 수의를 입은 채 얄팍하고 뾰족한 손을 뻗고 있어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그 사이로 달빛을 거부하니 달빛이 스며들지 못해 케케묵은 오랜 어둠이 내려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화원에는 자그마한 생명의 태동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한 곳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유진과 프리실라의 심장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긴장감에 온 근육이 뻐근했다. 불안함에 연실 양옆을 훔쳤고 혹여나 다가올 기척에 대비하느라 침묵이 맴돌았다. 어느덧 프리실라의 손에는 그녀의 애검인 그랑베르가 들려 있었으나 벼려진 칼날은 어둠에 삼켜진 채 빛을 잃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날카로움만큼은 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로아나를 잃은 유진은 양옆에 로실라와 엘리사의 호의를 받고 있었으나 손에 허전함에 몇 번이고 주먹을 움켜쥐기도 했고 서늘함에 손을 비비기도 했다.
그렇게 나아가던 때였다..
갑작스러운 기척이 온몸을 훑어 소름이 돋게 했다. 화들짝 놀라 기척을 쫓았다. 첨탑 위였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뾰족하게 솟아 달빛을 가리고 있는 첨탑 위에 불쑥 튀어나온 실루엣이 있었다. 실루엣이 몹시 빠르게 움직였다. 이어 날개로 보이는 것을 펄럭였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며 무거운 적막감을 깨었다. 실루엣은 곧장 바닥으로 유진과 프리실라가 있는 곳으로 쏘아졌다.
놀란 둘은 딱히 얘기할 필요도 없이 길 양옆으로 드리워진 나무 한곳에 몸을 던지다시피 해 피신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것이 내려앉았다. 쏘아지는 것과 달리 박쥐를 닮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사뿐하게 앉은 그는 별다른 소음을 내지 않았다.
역한 짐승의 누린내가 풀풀 풍겼다. 퀴퀴하고도 구역질이 절로 나올 냄새는 무언가 썩는 듯한 혐오스러운 냄새였다. 하물며 드리워진 모습은 발록과 비슷하나 그와는 사뭇 달랐다. 몸은 근육질에 유인원 같은 몸이었으며 머리는 악마의 얼굴 마냥 흉측하고도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고 귀가 무척 뾰족했다. 털이 없이 민머리였다. 양쪽 눈은 짝짝이였다. 코는 들창코였다. 이빨은 박쥐의 이빨을 닮아 송곳니가 삐죽 튀어나온 흉측한 괴물은 불의 악마인 발록과는 전혀 달랐다.
조금 더 짐승을 닮아 있었다. 그런 짐승을 닮은 괴수의 두 눈은 붉은 점이 콕 박혀 있는 것 마냥 몹시 작았다.
"크르릉.."
그가 목울대를 울리자 공기가 두려움에 진동함을 느꼈다. 이어 붉은 눈동자가 주위를 훑었다. 혹여나 우릴 보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 잠시 스며드는 한기를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이마에 삐칠 식은땀이 흘렀다. 둘은 숨을 죽였다. 그러며 불안함에 서로 손을 맞잡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괴수의 행동을 주시했다.
다행스럽게도 자신들을 눈치채진 못한 것 같다. 그저 이질적인 기척을 눈치채고 내려왔으리라 여겼다.
안도감이 일었으나 짐승을 닮은 괴수는 주위를 훑으면서 여전히 길을 비키지 않았다. 전형적인 입구를 지키는 파수꾼이자 문지기 역할을 맡은 괴수인 것 같았다. 오래전 왕성을 지키던 경비병이었을까? 그때의 본능이 아직도 저 괴수에게 이르러 이곳을 지키게 한 것일까? 혼란스러움을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문지기가 단단히 입구를 틀어막고 있을 텐데 로아나가 정말 성에 들어갔는지 의심이 일었다. 로아나 혼자서는 어떠한 힘도 낼 수 없을 그저 검일 뿐이다. 가녀린 아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가 이 문지기를 넘어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잠시 깊은 고뇌에 잠겼을 무렵 괴수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아무래도 저 괴수의 시선을 끌 방법이 필요한 것 같았다. 유진과 프리실라의 시선이 마주했다. 말하지 않아도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유진은 곧장 엘리사와 로아나에게 저 괴수의 시선을 끌어달라 부탁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러며 모습을 드러낸 곳은 도심으로 가는 성문 앞이었다.
그 앞에 로실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 괴수도 로실라를 본 것 같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목울대를 긁으며 내는 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굵직했다. 그 순간 불꽃이 확 타올랐다. 동시에 거센 바람이 불꽃을 길고 넓게 퍼트렸다. 마치 폭죽이 터진 것 같으나 불꽃은 곧장 괴수의 앞에 쏟아졌다. 그러나 흑색의 가죽은 어떠한 상처조차 흔한 그을림조차 없었다.
오히려 괴수의 신경만 긁은 꼴이었다. 괴수가 거대한 날개를 펄럭였다.
땅을 강하게 내디뎠다. 쿵! 거친 폭음과 바닥에 깔린 눈이 튀어 올랐다. 그러며 신형이 쏘아졌다. 채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는 마치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 같았다. 로실라는 화들짝 놀라 곧장 모습을 감추었고 엘리사가 대신 모습을 드러냈다. 괴수는 엘리사를 유난히 기다랗고 근육으로 각진 손을 뻗어냈다.
"크오오오!"
"흥!"
그러나 엘리사는 바람 그 자체였다. 그의 우악스런 손아귀가 애꿎은 허공을 긁었을 때에는 엘리사는 한 줄기의 미풍이 되어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손에 닿는 감각이 없어 당황한 괴수가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조금 더 먼 곳에서 엘리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는 낄낄 웃으며 괴수를 놀리고 있음을 보았다.
"크르릉.."
잔뜩 짜증이 난 괴수가 목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고는 사나운 울음을 가슴에 쌓아가니 흉측한 검은 가슴이 더욱 부풀기 시작했다. 무슨 행동일까? 엘리사가 의문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괴수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괴수는 무언가 응어리진 것을 가득 모으듯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더욱 부풀렸다.
꺼림칙함에 엘리사가 자그마한 바람의 비수를 보내 괴수의 신경을 긁었다. 그러나 그의 가죽은 강철로 만들어진 것 마냥 생채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 순간 최고조로 부풀기 시작한 가슴과 함께 괴수가 숨결을 토해냈다.
"크아아아!"
귀청을 떨어지게 할 폭음이었다. 토해지는 거대한 파동은 엘리사가 만들어낸 바람과 달리 거대한 폭풍우가 되었고 소용돌이가 되었다. 차원이 다른 힘 앞에 초라한 엘리사의 바람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녀는 곧장 바람이 되어 폭풍우에 휘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바람의 파동으로는 엘리사를 공격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바람이라 할지라도 엘리사의 근본은 바람이었고 곧 바람이 그녀였다. 그러니 바람으로 엘리사가 다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나 다를 바 없었다. 곧장 토해지는 기파와 바람에 한몸이 된 그녀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 엘리사 뒤편에 자리한 길목에 세워진 하나의 저택이 형태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지우개로 지워낸 것 마냥 텅 빈 터전에는 집이 있었다는 터만 남을 뿐이었다.
"크르릉."
괴수는 당연하게 엘리사를 해치웠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빈정거리듯 짧게 목울대를 울리고는 무덤덤하고도 오만함이 가득한 시선으로 엘리사를 쫓았으나 흔적조차 없었다. 그가 성이 세워진 곳으로 몸을 틀었다.
다시금 본래의 일을 해야 했다.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로서 오래전부터 이어온 본능이었다. 이유는 모른다. 왜 문지기를 자처하는지 괴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자 사명이었다. 그나마 괴수의 머릿속에 남은 건 문을 지키라는 누군가의 명령이 전부였다.
다시 찾은 적막감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힘차게 날개를 펄럭였다. 성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런 것까지는 상관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해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잃어버린 이성은 어떠한 판단도,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저 자신의 시야에 닿는 이들을 막을 뿐이고 죽일 뿐임이 전부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왕성 내부로 어느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으면 될 뿐이다. 오직 자신의 시선에 닿는 이들 중에 말이다.
일말의 고민도 없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럴 때마다 거대한 광풍이 주위에 휘몰아쳤고 바닥에 쌓인 잿빛의 눈보라처럼 휘몰아치게 되었다. 괴수는 힐끔 주위를 훑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보금자리나 다름없는 뾰족한 첨탑에 이르렀다. 그러고는 첨탑에 몸을 둘둘 말며 다시금 성문 쪽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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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란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 위의 슈리엘의 마차 안에는 침묵만 맴돌고 있었다. 각자 깊고 무거운 상념에 잠겨 적막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중 다이크 슈리엘은 그 나름대로 유진을 향한 걱정과 슈리엘 가문이 얻게 될 이득 사이에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에서도 슈리엘을 먼저 생각하고 이득을 챙기려는 속물적인 모습에 자괴감이 일기도 했으나 본능을 쉬이 막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유진이 살아 돌아오길 바라나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만약 유진이 돌아오지 못하게 될 시의 생각도 그는 슈리엘 가문의 수장으로서 의무적으로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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