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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455화 (455/1,410)

〈 455화 〉 드워프는 드워프답게!

* * *

당황한 그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도끼가 훨씬 빨랐다. 그리고 더욱 날카로웠고 더욱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끝내 도끼는 그의 미간을 짓이기고 그 사이에 딱딱한 두개골을 박살 내며 짐승으로 변모하는 중에 썩어 버린 뇌까지 침범해 완전하게 반으로 갈랐다. 콰지직! 섬뜩한 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는 듯 두툼하고도 섬뜩한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촤아악! 그 사이로 검붉은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괴수의 피는 몹시도 점성이 짙었고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뇌수까지 흩뿌리며 끝내 바닥에 드리워진 잿빛의 눈을 완전히 더럽혔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쓰러졌다. 쿵! 거친 소음이 이어졌다.

기진한 드워프들 역시 군데군데 여러 상처를 남기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갑작스런 고요함이 이들 사이에 맴돌았다. 고요함이 몹시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헐떡이는 숨소리 사이 모두의 시선이 괴수에게 닿았다. 온몸이 기진한 상태임에도 굳게 쥔 무기는 쉬이 힘을 풀지 않았다. 만에 하나 죽은 척이라도 할까? 또는 다시 몸을 일으켜 끈질기게 덤벼들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얼굴을 했다. 알렉세르 역시 그러했다.

여전히 괴수의 미간을 가르고 목이 있던 자리에 자신의 도끼가 박혀 있음에도 안도하지 못했다. 그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도끼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어 힘있게 뽑아들었다. 그 사이로 핏물이 튄다. 붉은 두개골 조각이 바닥에 흐드러졌고 점성이 짙고 검게 썩은 뇌수가 흘렀다. 그러는 와중에도 괴수는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1분여쯤 지났을까? 이들에게는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오랜 침묵과 거친 숨소리를 깨고 유아르 팬토나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겼어.... 제기랄... 이겼다고. 시발.. 퉷!"

마른침을 꿀컥 삼키며 그가 말했다. 그 사이로 울분과 희열 가득 한 욕도 섞였고 신경질적으로 괴수를 향해 핏물 섞인 침을 뱉기도 했다.

그럼에도 몸은 여전히 덜덜 떨렸고 미친 듯이 요동치는 심장도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가 된 것 마냥 진정되지 않은 몸과 거친 숨, 그리고 상기된 감정은 쉬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그러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괴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숨을 헐떡였다.

그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알렉세르가 모두에게 말했다.

"주, 죽은 것 같아... 하지만 마냥 이러고 있을 순 없어."

그가 날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는 갑옷 등에 만들어 놓은 오목한 고리에 도끼를 걸쳐 메고는 내정하게 말했다. 그제야 다른 이들의 시선이 전부 알렉세르에게 닿았다. 핏발이 선 눈동자는 여전히 전투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마냥 넋을 잃은 상태였다. 알렉세르가 그런 이들을 한 차례 보며 마저 말을 덧붙였다.

"싸우면서 다른 괴수들이 몰려오지 않은 게 다행인 거야.. 우린 정말 운이 좋았던 거야... 그러니 마냥 이러고 있을 순 없어... 정해.. 돌아갈까? 아니면 계속 안으로 들어갈까?"

돌아가겠느냐는 말이 왜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까? 다른 이들은 어쩌면 알렉세르도 '돌아갈까' 라는 말 자체가 본심이 나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말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쉬이 대답하지 못한 이들의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지금 머리가 갈려 쓰러진 괴수를 이긴 건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만약 성으로 들어가면 이것보다 더 강한 괴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지하에서 보았던 발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야 할까? 혹여나 유진과 프리실라라는 여인까지 모두 괴수들에게 당하진 않았을까? 지금 자신들은 헛고생하는 건 또 아닐는지.. 알렉세르의 '돌아갈까' 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들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알렉세르 역시 묻고 나서도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때 알렉선더가 별다른 대답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행동은 몹시도 당연하게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으나 눈만 껌뻑이며 입술을 달싹이다 말자 알렉세르가 다급히 그의 팔뚝을 붙잡았다. 팔뚝에는 핏물이 진득하게 배어 있어 끈적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피는 아닌 것 같았다.

"어, 어디 가는 거야?"

"구차하게 드워프가 했던 말을 뒤집으려고? 난 그렇게 좀스럽지 않아. 이미 한 번 정한 일에 뒤는 없어!"

"..."

수치심일까? 아니면 아직도 전투에 여운이 남아 잔뜩 상기 되었기 때문일까? 알렉산더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굳은 입술을 닫은 채 주위를 훑는다. 다른 이들도 마음을 닫고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러며 붉어진 얼굴은 평소 호탕하고도 사나이답게 행동하던 자신들이 한낱 괴수가 두려워, 했던 말을 번복하려는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다.

마침 유아르가 말을 이었다.

"만에 하나.. 그 녀석들이 이미 죽었으면 어떡하지?"

목소리 끝이 조금은 갈라져 있었다. 그만큼 긴장하고 두려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고 모두를 대변해주는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알렉산더의 결의로 다져진 눈동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물론 그 역시 겁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앞으로 다가올 더 강한 괴수를 향한 공포가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헛된 자존심 때문에 목숨을 잃을지라도 드워프가 되어서 한 번 했던 말이며 결정을 번복하진 않는다. 이미 이들은 유진과 프리실라라는 여인을 구하기로 다짐한 상태였으니 그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 알렉산더가 아랫입술을 굳게 깨물며 말했다.

"이미 죽었다면..."

힐끔 주위를 훑었다. 그도 살짝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

"시체라도 찾아야겠지."

"그런 개고생을 하자고?"

화들짝 놀란 유아르가 터무니없다는 듯 소리치자 알렉산더가 어깨를 으쓱이며 태평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지레 겁을 먹고 도망갈 생각은 없어. 정 뭣 하면 차라리 싸우다 죽지 뭐.. 어차피 오랜 시간 살았는데 뭐가 두려울까? 어차피 우린 흙 속에 파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아니야? 유진을 잃고 결국,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허송세월 보내고 싶지 않아 더는 두려움에 떨며 이곳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알렉산더의 시선이 모두를 훑었고 더욱 단호하게 일렀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제 난 지쳤어.. 이 지긋지긋한 갈라도도 지하 갱도도 외로움도. 차라리 난 오르간 체피르처럼 죽음을 택하겠어."

"너..."

당황한 알렉세르의 목소리가 나오려다 말았다. 이미 그가 억지로 두려움을 억누르고 고집을 부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쉬이 꺾지 않은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알렉세르로서 다른 이들이 돌아간다 할지라도 알렉산더는 혼자라도 갈라도 성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결국, 그의 팔뚝을 잡은 손을 놓았다.

알렉산더는 한 차례 더 이들을 보고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왕성 내부로 바삐 걸음을 옮기니 다른 이들의 시선도 한 차례 섞였다. 마침 페키르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드워프는 드워프답게.. 라는 말이 떠오르는군."

그는 그 말을 뒤로 알렉산더의 뒤를 쫓았다. 이어 유아르와 알렉세르의 두 시선이 한데 겹쳤을 때, 알렉세르가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

"이미 여론은 다시금 기울어졌군.. 게다가 나 역시 부끄럽네.. 내가 먼저 돌아가자는 말을 꺼낼 때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자네뿐만이 아닐걸? 모두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두려움에 떨어 숨어만 지냈나 봐. 이 두려움이 너무나 당연시하게 되었어."

유아르가 착잡하다는 듯 땟국물이 가득한 얼굴을 손으로 대충 쓸어내리며 말했다.

"말로는 드워프답게 행동하자고 하는데.. 자꾸 겁이 일어.. 두려움을 쉬이 떨쳐낼 수 없네.. 우리가 너무 도망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 같아.. 알렉산더나 애석하게도 먼저 떠난 오르간 체피르만이 우리처럼 두려움에 물들지 않은 것 같아... "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알렉세르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계속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만 갈까? 이러다간 알렉산더를 놓치겠어. 이곳에서 따로 떨어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

유아르 팬토나임의 시선이 알렉세르를 지나 어느덧 문앞에 이른 알렉산더와 페키르를 보았다. 그러고는 높게 들어선 왕성을 눈에 담았다. 한눈에 다 담기지 않은 왕성은 옛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외벽이며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던 태양이며, 높이 솟은 첨탑 위에 모두를 굽어보던 왕이며 모두가 사라진 왕성은 너무나 쓸쓸하고 외로워 보였다.

잠시 뜸을 들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외로운 성을 외롭지 않게 해주어야겠다.

드워프는 드워프답게...

한 번 했던 말을 번복하지 않으리라..

유아르는 마음을 다잡았고 돌아가고 싶다는 부끄러운 생각을 집어치워 버렸다. 그가 알렉세르를 보며 말했다.

"좋네! 어서 가보지... 어차피 이번 일은 내가 먼저 꺼낸 일이니 책임을 져야겠지! 저 매정한 녀석들이 자기들끼리만 들어가려고 하는군. 오랜만에 성을 좀 밟아보지."

"그러지."

알렉산더가 피식 웃었다. 유아르 역시 엷은 웃음을 남겼다. 어느덧 둘 사이에 맴돌던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다시 결의로 다져진 굳건한 마음이 다시금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이들의 영혼은 강철처럼 수만 번의 무두질로 다시 태어난 것 마냥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하나의 문장을 영혼의 새겨넣는다.

드워프는 드워프답게...

아무리 적이 있다 한들 도망치지 않으며, 그 길이 죽을 길이라 할지라도 했던 말의 번복하지 않는다. 드워프는 어떤 이들보다 더 굳건한 용기로 똘똘 뭉친 전사들이며 대지의 신이자 대장장이의 신 스토스티안의 축복을 받은 친구이자 전사였다.

그것이 드워프이며 드워프가 드워프다워야 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이들에게 부끄러움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알렉세르와 유아르의 걸음이 천천히 옮겨지고 열린 문 앞에 기다리고 있는 페키르와 알렉산더에게 이르렀다. 모두의 시선이 한데 겹쳤을 때 그들은 앞에 드리워진 어둠에도 그 누구보다 더 굳건한 마음이자 굳센 용기로 디뎠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지나 왕성의 출입이었던 그들은 감회가 새로움을 느꼈다. 문뜩 멈춘 세상이 다시금 시간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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