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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584화 (584/1,410)

〈 584화 〉 도구는 도구다워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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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으로 나온 마구엘이 깊은 홀로 복도를 거닐었다. 아무래도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두 기사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기에 그의 걸음은 본관을 나서 다시 소아렌의 정문으로 목표를 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걸음은 한없이 느려지고 있었다. 하물며 표정에는 깊어진 고민에 딱딱하게 굳어 피로감이 잔뜩 실려 있었다.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어 답답함이 일었다. 난감하다는 말이 적절했다. 프리실라에게 이렇게 많은 지원군이 그것도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든든한 지원군이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어머니에게 어떻게 편지를 보내야 할지가 가장 큰 관건이었다.

아니 그 후의 반응이 두렵다고 할까? 어차피 자신의 역할은 있는 사실 그대로 보내면 되는 거니까..

그래도 의견을 내세우자면, 프리실라를 슈리엘에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생각일지도 모른다. 물론 프레이아의 지배자, 북부의 패자이자, 늙은 야수 좋지 않게는 늙은 호색가, 발정 난 원숭이 같은 별명이 있는 알리센에게는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프리실라와 슈리엘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면, 알리센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만큼 하이란에서 슈리엘의 위세는 하이란 왕과 비슷했으니 그러한 뒷배를 셀리엘이 얻는 것이니까.

어찌 되었든 셀리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슈리엘이라는 교두보, 더 넓게는 프레이아와 하이란의 첫 교두보가 마련하게 된 셈이다. 그 교두보를 셀리엘과 슈리엘이 함께 끈끈한 혈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즉, 프리실라 라는 존재는 프레이야와 하이란 관계에 몹시 큰 역할을 할 것이고 끝내 알리센 왕의 손아귀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다리를 하나 걸치게 될 계기가 될 것이 분명했다.

분명 고민해볼 가지가 있는 일이다. 마냥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물 안 개구리나 다를 바 없는 셀리엘에게 프레이야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으로 진출할 좋은 기회, 좋은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 마구엘은 생각했다. 물론 결정은 어머니가 할 테지만, 마구엘의 결론은 이러했다.

'나쁘지 않다.' 라는 점이다.

딱딱하게 굳어지던 마구엘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어쩌면 일이 좋게 풀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굳이 꺼림칙하게 자신의 동생을 죽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걸음에 점점 힘이 붙기 시작했다.

드리워진 층계에 이르러 천천히 내려갔다. 그러면서도 더 깊어진 상념에 잠겼을 무렵, 뒤늦게 누군가 앞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구엘의 시선이 마침 앞에 이르렀다. 이제 막 10대 중반을 갓 넘었을까? 막 성인이 된 듯한 다부진 사내가 보였다.

백금의 오묘함이 담긴 머리칼이 등허리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고 눈은 에메랄드 빛을 담고 있었다.

분명 프레이야 지방의 피가 흐르리라 생각되는 사내였다. 잠시 고민했다. 내가 아는 사내인가? 아니면 날 아는 사내일까? 어딘가 모르게 보았던 기억이 있는데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이런 사소한 것까지 떠올리는 건 한계가 있는 듯싶다.

지금은 생각할 거리가 많다. 애써 고개를 도리질 쳤다. 피곤함에 손으로 눈가에 잡힌 주름을 마사지했다.

도전적인 눈빛을 내보이는 그의 모습을 무시하고 마구엘은 무심하게 걸음을 옮겨 피해 가려 하나 그가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짜증이 일었으나 저 도전적인 눈빛 속에 뒤늦게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저 사내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 전 프리실라를 품에 안아 본관으로 향했던 사내라 분명했다.

즉 프리실라와 관계를 나누고 있을 사내였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 아직 어려 부모 뒤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했거늘 그러지 않으려나 보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며 앞으로 나설 줄이야. 괜한 호기심이 인다. 저 적의가 과연 치기 어린 혈기 왕성한 사내일지, 아니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적의 일지. 더 나아가 프리실라의 짝이 어떠한 사내인지 알고 싶다.

이제 와서 오라비로서의 마음이 작용한 것일까? 피식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러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프리실라를 홀린 유진 슈리엘인가?"

"맞습니다. 당신이 마구엘 셀리엘 님이시죠?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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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걸음이 멈춘 곳은 텅 빈 교실이었다. 1 본관인지라 창문 밖에는 바로 소아렌의 교정이 고스란히 드리워져 제법 운치가 있는 교실로서 가장 먼저 분수와 가로수 길 그 아래에 오손도손 모여 있는 몇몇 학생들과 한가롭게 뙤약볕을 즐기는 선생들이 보였다.

소아렌은 겉으로 평화롭기만 했다.

마구엘은 창밖을 바라보고 섰고 유진은 그런 그 의옆에 놓인 책상에 걸터앉았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아무래도 유진으로서는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마구엘은 먼저 대화를 요청한 유진의 말을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그는 급할 것이 없는 입장이었다.

"프리실라를 데리러 왔겠죠?"

오랜 침묵을 깨고 이어진 말에 마구엘은 피식 냉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교정을 바라보던 시선을 틀어 유진을 마주했다. 다부진 그의 얼굴에 의아함을 남기자 마구엘은 말을 순화해서 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왠지 모르게 지금 앞에 있는 이 아이에게만큼은 호의적인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러했다. 무심하게 아니 오히려 더 날카로운 기세를 갈무리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흩뿌리며 조금 더 냉혹하게 대답했다.

"죽이러 왔다."

마른침이 꿀컥 삼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마구엘은 웃었으나 유진은 그러지 못했다. 잔뜩 적의를 내포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굳은 낯빛에는 날카로운 검날처럼 벼려져 있었다. 당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적의와 굳어지고 있는 표정의 변화가 있었으나 그는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마구엘은 새삼 놀랐다. 하물며 슈리엘 가문의 장자라면 어쩌면 당연한 기세라 여기기도 했다.

짧게 웃음을 멈추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라 드 셀리엘, 즉 어머니의 명령으로 프리실라를 다시 데려오던가. 그러지 않으면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지."

"역시 소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여인이군요?"

유진이 치를 떨며 대답하자 마구엘이 낄낄 웃어댔다.

피도 눈물? 그녀는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그러한 것 따위 갖고 있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녀의 피에는 날카로운 강철이 흐르며 차갑기만 할 것이다. 마치 악마처럼, 무자비하고 냉혹하며 잔인할 것이다. 피도 눈물? 도리질 쳤다. 오히려 순화한 표현이라 참으로 우습게 느껴진다.

만약 이 아이가 아직 뭣도 모르는 핏덩이 같은 사내가 그녀를 보자면 오줌부터 지리지 않을까?

물론 그래도 슈리엘의 가문의 장자로서 그 정도의 추태는 부리지 않을 테지만, 궁금하긴 하다. 지금 적의를 풀풀 풍기고 있는 이 사내가 냉혹하고 무자비한 어머니를 만났을 때의 반응이..

비릿하게 웃던 마구엘이 말했다.

"피도 눈물이라.. 딱히 틀리다 고는 못하겠군, 애초에 셀리엘 가문의 특징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것, 한낱 여인은 도구에 불과하며, 권력이라면 무슨 짓인들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가문이 우리다. 그러한 잔혹한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것이 프리실라 그 아이다. 그럼에도 그 아이를 곁에 두고 싶은가? 언제고 그 아이도 어머니처럼 변할지 몰라. 네 자리를 빼앗고 자식을 도구로써 필요 없어진다면 죽이는 것에도 서슴없지."

비릿한 웃음 뒤, 다시 굳어지는 표정은 한겨울의 프릴 산맥의 한파보다 더 차갑고 날카롭다. 살짝만 닿아도 뼈가 시리며 살갗에 핏물이 맺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목소리에도 비아냥이 다분했다.

억지로 흥분을 유발하게 하려는 뻔한 속셈일까? 유진은 그런 마구엘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어 보였다. 가소롭기 짝이 없다. 이런 유치한 적의에 통할 내가 아니다. 이미 정신은 산전수전 다 겪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다른 이에게는 너무나 어린 갓 성인이 된 파릇파릇한 핏덩이라 할지라도 정신은 농익어 그러하지 않았다.

이러함이, 자신을 얕잡아보게 하는 지금의 외형이 언제고 자신에게 무기가 되리라 유진은 생각했다.

유진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날 선 기세가 상충하며 불똥이 튀었다. 그러며 유진은 생각했다. 언뜻 저 얼굴에 프리실라가 스쳐 보인다. 확실히 피를 나눈 사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프리실라보다는 훨씬 더 날카로운 인상이다.

특히 기세가 몹시 익숙하자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온다. 분명 회귀 전, 자신을 쫓던 표독스러운 프리실라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이러했다. 감히 다가설 수 없을 정도로.. 문득 마구엘도 그러할까 싶다. 저 날 선 모습 속에 순수하고 자상한 마음이 숨어 있지는 않을까? 적어도 프리실라처럼 말이다. 나름 궁금했다.

유진이 말을 받았다.

"셀리엘의 특징이라.. 셀리엘 가문이 언제부터 그렇게 무자비한 가문이었습니까? 제가 알기에는 이렇게까지 잔혹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세대에 극성맞게 변한 것이지요. 그 이유가 사라 드 셀리엘님 때문이겠지요."

"근래에 들어와 더 극성맞아진 건 맞긴 하지만, 애초에 셀리엘은 대대로 가문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가문이었지. 딱히 특별하다고는 말 못 하겠군."

동의하다는 듯 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지만, 민심을 헤아릴 줄 아는 가문이기도 했죠. 근래에 들어와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더군요. 오히려 악행만 널리 퍼져 민심을 잃어간다고 들었어요. 특히 사라 드 셀리엘 님의 악명이 자자하더군요."

마구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셀리엘은 당신이 말한 것 마냥 그리 나쁜 가문은 아니라는 것이죠. 한 때 민심을 헤아릴 줄 아는 프레이아의 제 1 가문이지 않습니까? 프리실라 누나를 사라 드 셀리엘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녀는 달라요. 어쩌면 당신보다. 가족이라는 사람들보다 제가 더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어요."

도전적인 눈빛에 빈정거림이 맺혔다. 문득 이 아이의 성격도 제법 한 성격 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절대 지지 않은 아집을 느꼈다. 마구엘은 잠시 유진의 판단을 보류해야 할 듯싶다. 무엇보다. 자신이 모르는 프리실라의 진정한 면모가 무엇인지 흥미가 돋는다.

뭐 차차 알아갈 수 있으리라... 어차피 시간은 많다.

기세를 누그러트린 마구엘이 순수하게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그나저나 이런 시답잖은 말싸움을 하러 온 것도 아닐 테고, 묻고 싶은 게 있을 텐데? 어차피 지루드 슈리엘이나 발레린 에페엘의 말마따나 그녀를 데려갈 수 없다는 말을 하려고 온 거면 오늘은 여기서 그만 하고 싶군, 이미 지긋지긋하게 들었어."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 내저으며 말하자 유진이 잠시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조금 달라요. 전 제안하려고 왔어요. 사라 드 셀리엘님에게 전할 말이 있어요."

"전할 말?"

어깨를 으쓱이며 유진이 마저 말을 덧붙였다. 표정이 제법 진중했다. 덩달아 마구엘도 제법 진중한 얼굴이 돼 그를 마주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슈리엘과 셀리엘 가문이 혈연이 된다면,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게 더 많을 거란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마구엘이 잠시 유진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혹시 이 아이도 자신이 생각한 바를 생각한 것은 아닐까 싶다. 뭐 그리 어려운 추론은 아니었으니까...

"무엇을 얻지?"

되묻자 유진의 시선이 창밖을 힐끔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한 시선 속에 마구엘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이질감이 무엇 때문에 느꼈는지는 쉬이 이해되지 않았다. 특히 깊고 그윽한 에메랄드를 담은 것 같은 눈빛, 저 속에 무언가 다른 것이 담긴 듯 보였다.

무언가....

마침 유진이 목소리가 이어졌다.

"적어도 알리센의 그늘에서 벗어날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거란 이야기지요."

멈칫했다. 그의 입에서 알리센이란 이름이 나올 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몹시도 자신만만하고도 예의를 갖추지 않은 말에 잠시 주저함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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