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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592화 (592/1,410)

〈 592화 〉 겁쟁이의 밤

* * *

"두려웠던 것이지요.... 애써 두려움일랑 모르는 척, 강인해 보이려 애를 쓰고 발버둥쳤지만, 아무래도 저는 겁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의 비해서는 프리실라는 겁쟁이가 아니었던 거지요."

"그렇다면 지금은 늦은 겁니까?"

제법 진지한 말투 끝에 마구엘이 쿡쿡 숨죽여 웃었다. 그가 한 모금 더 와인을 삼키더니 끝내 박장대소를 해댔다. 무엇이 그리 웃긴 것일까? 코아테스는 굳어 진중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마구엘은 웃되 전혀 즐겁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저 웃음이 처연하고도 씁쓸하게 보였다. 웃음에 알 수 없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숨기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울고싶어도 울 수 없는 한 가문의 후계자라는 무게가 또는 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공포가 그를 짓눌러 억압하며 강제로 쇠사슬로 묶어 강제로 이끌고 있었다.

코아테스가 굳은 표정으로 와인을 홀짝였을 때, 한참을 웃던 마구엘이 남은 와인을 입안에 털어 넣은 채 자리에 일어섰다. 살짝 몸이 비틀거렸으나 그는 곧장 균형을 유지한 채 엷은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잘 마셨습니다. 언제고 꼭 사례를 해드리겠습니다."

"사례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사감의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사감의 일?"

마구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묻자 사감은 다시 처음의 노신사로 돌아와 엷게 웃고는 흐드러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버릇처럼 뒤로 넘겼다. 그러한 행동이 몹시 자연스러웠고 이상하게도 시선을 끌게 했다. 그럴수록 그에게 호감을 느낀 마구엘이었다.

"제가 하는 일이 기숙사 관리라고는 하지만, 근심이 있거나 걱정이 있는 아이들의 넋두리라고 할까요? 직접적으로 해결해주는 역할은 아니지만, 그래도 들어주는 건 잘하지요. 나름의 심리 상담이라 할까요? 아이들도 좋아하고는 했지요. 물론! 마구엘님을 아이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 답답해 보이셔서 꼭 속 안에 든 것을 후련하게 토해내고 가셨으면 했습니다."

"제가 그렇게 근심이 많아 보였습니까?"

코아테스는 엷게 웃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마구엘은 처음 보는 자신에게 친근하게 대하며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는지 그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물며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남들이 쉽게 느낄 정도로 나약해지고 물러졌다는 뜻이리라..

표정이 굳어진다. 언제나 냉혹하고 냉정하게 보여야 하는 셀리엘 가문의 장자로서 이렇게까지 긴장을 잃고 허술해졌다니...

하이란의 열풍이 자신의 마음에도 깊게 스며드나 보다.

고민에 잠기며 엷게 앓는 소리를 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감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도무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이러다가는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모든 것들을 토해낼 것 같다. 그러기 전에 어서 도망쳐야 했다. 겁쟁이답게..

좋은 현상은 아니리라...

더는 하이란의 열기가 깊게 심장에 파고들어 얼어붙은 마음을 물러지지 않도록 도망쳐야겠다.

"아무튼, 잘 마셨습니다. 꼭 갚겠습니다."

"잘 마셨다면 다행이지요. 그럼 푹 쉬시지요. 아! 편지는 꼭 특급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기숙사 내부가 아닌 바깥으로 향할 무렵 갑작스레 코아테스가 따라나와 불러 세웠다.

"아차! 마구엘님?"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어색한 웃음을 내보이며 말했다.

"제가 할 얘기는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괜찮으시다면 답변을 듣고 싶군요."

무언가 무거운 이야기일까? 제법 뜸을 들이는 그를 보자니 마구엘의 표정에 의문이 가득했으나 차마 재촉하지는 않았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코아테스가 엷게 웃으며 고개를 젓자 마구엘이 되물었다.

"말해보세요. 궁금하군요."

"음.. 그렇다면.. 정말 늦지 않았습니까? 아직 젊은 당신이라면 전 어떤 일이 있다 한들 늦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제 다 늙어가는 나이로 선생이 되는 걸요? 당신은 더욱 시간이 남았습니다. 응원하겠습니다."

처음에 그가 말한 뜻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서서 그를 보았고 코아테스는 거기서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말마따나 응원한다는 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니 마구엘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그는 곧 미련없이 사감실로 들어갔다.

텅 빈 로비에 혼자 남은 마구엘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블라인드가 쳐진 사감실을 바라보았다가 끝내 자조적인 웃음 뒤, 몸을 돌려 기숙사 바깥으로 향했다. 지독히 차오른 취기를 조금 걸어서 해소하고 싶었다.

마구엘의 걸음이 조금은 힘이 실려 문을 열고 바깥에 이르렀다.

'난 늦은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쉬이 입 밖으로 토해지지 못했다. 어쩌면 미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조적으로 웃으며 천천히 무겁고 비틀거리는 걸음을 간신히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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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비틀 걸음이 자꾸 굽이진 길을 걷는 것 마냥 비틀거렸다. 더불어 하늘이 빙빙 돈다. 프레이야와 비교해 후덥지근한 날씨는 불쾌하기만 하다. 심지어 부는 바람마저 후끈하기까지 하니 답답함이 심하다. 끝내 벤치에 털썩 주저앉은 마구엘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높이 뜬 달을 보았다.

살짝 찌그러진 빵 마냥 노란 달이 보인다. 그 옆에 청명한 밤하늘 사이 콕콕 박힌 별빛이 환하게 반짝였다. 만약 천문학에 대해 좀 알았다면, 여러 별자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프레이야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거나 우중충하기 짝이 없던 프레이야와는 너무나 다르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곳은 먹구름조차 없었다. 밤인데도 환한 빛무리가 대지를 적셔 축복하는 기분에 어둠이 없었다.

달라도 어찌 이리 다를까?

피식 웃음이 흘렀다.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인데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점이 참으로 기묘하다.

또는 허무하다. 허탈하며 자조적인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 더 그럴까? 난생처음으로 좋은 술과 좋은 상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즐겨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마음이 풀린 것이리라. 더 나아가 이러한 평온함을 그리 바랐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안다고, 얼마나 만났다고,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잠시 셀리엘이라는 가문의 무게를 내려놓게 되었다. 고작 술 한 잔에 마음을 풀었고 단단히 걸어잠근 문을 열어젖혔다. 마음의 허술함이 고스란히 드러난 계기가 되었다. 고작 10분도 안 될 만남 사이에 모든 민낯을 내보였다.

하이란의 뜨거운 열기가 프레이야의 흔적을 너무나 쉽게 녹여버리니 더욱 분위기에 취해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말까지 늘어놨던 것 같다. 후회는 없었다. 오히려 속이 뻥 뚫린 것 같은 후련함을 느꼈다. 물론 어머니가 안다면 얘기가 달라질 테지만, 여긴 자유로웠다.

아무도 자신을 감시하지 않았다.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내쉬었다. 아직도 달콤한 포도 향과 더불어 알코올 향이 가득한 숨이 토해졌다. 그는 잠시 냉소를 지으며 조금 전 사감 선생 코아테스와 나눈 대화를 상기했다.

'난 왜 프리실라처럼 행동하지 못했을까?'

자조적인 웃음 뒤,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가 뭐 있겠는가? 당연하다. 하물며 그에게 말했던 것 마냥 그저 자신은 겁쟁이였고 프리실라는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점, 고작 이 사소하고 별거 없는 차이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던 것이다. 다시금 코아테스의 물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은 늦은 겁니까?'

프리실라의 행동을 지금 자신에게 해보라는 뜻이겠지?

깊은 상념에 잠긴 채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지금 어머니의 명령을 거부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리실라처럼 하이란에 숨거나 무쥬엘라나 휴센으로 도망친다면? 물론 이러한 생각은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어렸을 적, 강압적인 훈련 중에 더는 버틸 수 없어 몇 번이고 도망치려던 생각을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심지어 자세히 계획까지 짜기도 했었다. 그때에 무쥬엘라가 가장 좋은 도피처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었다.

하이란과 프레이아는 서로 동맹국을 넘어 여러 국제법으로 묶인 긴밀한 관계였다. 적어도 프레이아가 어떠한 이유를 들어 지금의 프리실라에게 송환 요청을 하면 하이란은 프레이아의 그녀를 보내야만 하는 송환 법이었다. 그것은 반대로도 같았다. 프레이야 지방에 이른 하이란의 귀족이 있고 그가 심각한 범죄자라면 송환 요청으로 하이란으로 강제로 내보내야 했다.

그것이 전쟁을 끝내며 오랜 시간 서로 합의 본 사항 중 한 가지였다. 즉 하이란은 프레이아에서 도망치기엔 그리 적합한 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휴센은 어떨까?

휴센은 그 나라의 시민권을 따기 힘들었고 시민권을 따지 못한다면 그 나라의 외진 마을에도 살 수 없었다. 배척당한다. 그만큼 휴센은 타국의 사람이 마을에 사는 것을 기피했고 텃새가 심했다.

심지어 어떠한 도시는 타국 사람과 물품 거래 자체를 하지 않을뿐더러, 타국의 금화로는 휴센에서 사용조차 하기 힘들었다.

적어도 수도나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타국의 금화는 받지도 않았다. 그만큼 알게 모르게 폐쇄적인 곳이 휴센이었고 타국의 사람을 향한 차별이 만행한 곳이 휴센이었다. 물론 이민자를 뜻하는 것이다. 타국의 여행객이나 상인의 신분은 환영하고는 했지만, 이민자를 향한 차별과 폐쇄성이 짙었다.

무엇보다 이민자가 시민권을 획득하기까지 오랜 곤욕을 치를 것이다.

일단 오랜 시간 이민 심사를 받아야 할 테다. 몇 개월, 몇 년이 걸릴지 모를 테다. 그것도 타국의 귀족이라면 더더욱 의심하고 시민권을 내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만큼 타국의 귀족이 이민 신청을 한다는 건 무언가 좋지 않은 이유 때문임이 확실하니 말이다.

이유를 꼬치꼬치 캐물어 조금이라도 흠이 있다면 시민권을 주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만약 답하길 거부한다면? 하나뿐이다. 추방,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다. 추방이다. 결국, 그들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감옥에 갇혀 자신을 데려와 줄 이들을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할 테다.

프레이아로 송환될 것이다. 휴센은 적절치 않았다.

엘리시움은 어떨까? 사제의 나라, 물론 교황청이 있는 나라이기에 사제의 나라라고 하지만, 휴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휴센보다 더 엘리시움의 시민권을 따는 것이 힘들었다. 더불어 엘리시움 역시 시민권이 없다면 하이란이나 프레이아처럼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오직 성기사의 보호 아래 교회의 허락에 마을이 들어서고 도시에 행정구역이 교회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며 엄격한 관리로 이루어진 나라가 엘리시움이었다. 그곳 역시 이른 시일에 시민권을 따는 것은 어려웠다. 여러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마을이 교황청이 직접 관리하는 서류로 남게 된다. 특히 이민권자는 혹여나 국가에 누를 끼치지 않을까 더 엄격하게 관리한다. 즉 어떻게서든 서류상 흔적을 남게 되는 것이었다.

나아가 프레이야가 자신을 찾기 위해 서류를 요청하면 엘리시움 역시 따를 수밖에 없다.

만약 사제가 된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 역시 만만치 않다. 타국의 사람은 사제가 되기까지 오랜 수습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는 중에 알게 모르게 심사를 받게 되었고 과거를 들추게 된다. 그러는 중에 프레이아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엘리시움도 좋지 못한 선택이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무쥬엘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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