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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633화 (633/1,410)

〈 633화 〉 좋아해요.

* * *

헬리글에서 자신의 기둥이자 유일한 빛은 아를란이었으니.. 그 지옥과 같은 생활에 아를란은 빠질 수 없는 이름이었다.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는 아를란에게 꼭 갚아야만 하는 빚이 있는 거에요. 그렇기에 누나가 오해했던 거죠. 그래서 사실 아를란이 졸업한다면, 아니면 졸업하기 전에 제 눈앞에서 그녀를 도와줄 수 있도록 저희 저택으로 부를까 생각하기도 했죠. 엄연히 그녀에게 빚이 있으니까요."

버릇처럼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으나 프리실라는 웃지 못했다. 엘리시아도 더욱이 어머니까지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표정은 복잡함이 다분했다. 그래도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는 빼놓은 상태인데...

애써 세세한 내용을 축약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적어도 프리실라가 어떻게 죽었는지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그 이후로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많은 피를 묻혔는지 차마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되었든 믿기 힘든 고백인데도 이들은 자신의 말을 믿는 것 같았다. 도무지 상식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고맙게도 모두 믿어주었고 심지어 같이 아파했다. 지금도 충격을 받은 채 연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며 같이 분노했다. 교단을 향한 분노는 특히 어머니에게서 엿보였다. 유진은 역기서 쐐기를 박아야 했다. 돌고 돌아 비밀까지 꺼내게 된 이유의 근원으로 돌아와 유진이 한껏 진중하게 변한 채 대답했다.

"제가 셀리엘에 가야만 하는 이유에요. 셀리엘에도 교단의 끄나풀이 잔뜩 침식해 있을 테고 교단에 관한 정보를 조금 풀었어요. 그러니 셀리엘이 저를 부른 이유도 그러하기 때문이에요. 괜히 저희 가문이 아니 제가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히지 않으려면 가야만 해요."

"하지만 너무 위험해.. 그 교단이라는 놈들이 정말 무서운 이들이라며? 난 더 보내고 싶지 않아.."

여전히 걱정이 한가득 묻어나오는 어머니의 말에도 유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 말했다.

"지금보다 더 큰 위험이 있을 거에요. 더는 손을 쓸 수 없기 전에 막아야 해요. 그렇기에 가야 하는 거에요. 게다가 아직 그들이 저의 대해 눈치채지 못하는 지금이 가장 적기에요. 저에 대해 모르고 있는 지금, 내부로부터 좀먹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죠. 다행히 슈리엘은 막았어요. 물론 어디선가 제가 모르는 곳에서 또 음흉한 꾀를 낼지 모르니 위험하더라도 제가 먼저 움직여야 해요. 그리고 어머니도 절대 가문에 신분이 불분명한 이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기도 하고요."

"알았어.. 네 말대로 할 게.. 하지만 내 욕심은 네가 셀리엘로 안 갔으면 좋겠어."

유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충분히 어머니의 불안함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슬쩍 프리실라를 보았다. 심각한 표정 속에 그녀는 무언가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였으나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유진은 그녀가 말할 수 있게 기다렸다. 마침 다른 이들의 시선도 프리실라에게 닿았을 무렵, 그녀가 용기를 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셀리엘은 내게 지옥과 같은 곳이야. 솔직히 지금도 난 가고 싶지 않아. 그럼에도 내게 아버지가 위험해진다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을 거야... 오라버니도.. 엄연히 가족이니까."

"그러니 지키러 가야죠. 말했잖아요. 누나가 갈라도로 절 직접 지키러 왔듯이 이제는 제가 누나를 지키고 소중한 모든 이들을 지킬 거에요. 게다가 저는 조금 이기적이에요. 제가 한 번 죽으면서 생각했어요. 아니 유일하게 바랐어요.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어떻게서든 후회 없는 삶을 살 거라고요. "

유진의 시선이 모두에게 닿았다. 피식 웃었다. 웃음은 지난 속에 감춰둔 것을 털어냈다는 후련함이 맺혀 흘렀다. 그러자 생긴 여유와 자유는 그날의 고통과 흔적을 떨쳐낸 기분이었다. 무척 홀가분한 느낌에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말할 것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유진이 당당하게 말했다.

"후회하지 않을 거에요. 그리고 교단이 하는 행각들 전부 방해할 거에요. 아주 철저하게 짓밟아 버릴 거에요! 그러니 부디 절 막지 말아 주세요. 오히려 부디 절 도와주세요."

"도울 게... 내가 꼭.."

엘리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모두를 보았을 때, 어머니도 프리실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이들의 허락이 떨어지자 유진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피로감이 일었으나 피로감보다는 후련함이 더 컸다. 마침 프리실라가 물었다.

"그럼 그때 나는.. 회귀 전에 나는 어떻게 된 거야?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어?"

"그건.."

잠시 뜸을 들였다. 말해야 할까? 서로 적이었기에 프리실라는 유독 자신을 쫓아 반드시 죽이려고 했다는 말을 해야 할까?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했다는 말을 해야 할까? 잠시 머뭇거렸으나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금과는 다른 일이기도 하다.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생각한 유진이 고개를 으쓱이며 말했다.

"누나는 유명한 기사였어요. 제가 한눈에 반할 정도로.. 누나와 저는 적이었지만, 저는 누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이죠.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적어도 누나는 제게 감정을 다시 만들어 주었고 마침내 교단에 반기를 들게 했어요. 제가 죽을 때, 분명 전 가족들과 누나를 아를란을 이어 마지막으로 누나를 생각했어요. 언제고 다시 만난다면 부디 내 마음을 표현하겠다고... 사죄하면서 죽어갔어요."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리니 괜스레 또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아직도 생생하다. 죽어가면서 느꼈던 감정들, 기억들 낙인처럼 새겨져 쉬이 떠나질 않았고 교단을 향한 분노의 원동력이 돼 있었다.

문득 그때도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던 때였음을 깨달았다. 그렇기에 눈 하면 언제나 프리실라가 떠오르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나도.. 나도 널 좋아했을지도 몰라.."

유진이 쿡쿡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또 모를 일이다. 적이라 할 수 있었던 그녀에게 반했듯이 그녀도 그랬을지도.. 허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 둘 다 진실해졌다.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며 후회 없이 거짓 없이 사랑한다 밝혔다.

과거가.. 아니 과거라 할 수 없는 사라진 일들이 무에 중요할까? 훌훌 털어버리듯 미소를 담아 모두를 훑었다. 이어 고개를 내려 괜스레 움켜쥔 엘리시아의 손끝을 매만지며 애써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죽음이란 몹시 추웠고, 아프고.. 괴로웠지만, 그래도 후련했어요. 오히려 편안했어요. 잊었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어서 죽는다면.. 아니 죽어서라도 모두에게 사죄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전 죽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다음 생이 있다면 꼭 지금의 잘못을 갚아나가리라 생각했죠."

괜스레 눈물이 흘렀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때의 쓸쓸함과 혹독함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그때의 감정이 다시 북받쳐 올랐기 때문인지 갑작스레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턱선을 따라 흘렀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유진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처음 깨어났을 때, 살아있는 가족들을 만났을 때, 보자마자 울었죠? 울 수밖에 없었어요. 꿈이라 생각했어요. 주마등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디 깨지 않기를 바랐죠. 그런데 꿈이 아니더라고요.. 하하.."

처연한 웃음 뒤, 다시 시선을 돌려 프리실라를 보았다. 어느덧 그녀도 울고 있었다. 울음은 전염병처럼 곧 모두에게 퍼지려 했다. 유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누나를 보았을 때에도.. 누나가 물었죠? 왜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느냐고.. 사실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너무 당황해서 여기서 누나를 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으니까요. 어찌 보면 내 첫사랑이 누나인 걸요... 그런 사람을 만나자마자 몸이 얼어붙은 듯했어요. 그런데 하하.. 누나는 오해했죠? 자신을 무시한다 생각했죠? 미워한다고.. 그게 아니었는데 사실 난 누나를 만나서 무척 반가웠는데 자꾸 회귀 전에 기억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매정하게 굴고 일부로 피하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머쓱함에 잠시 손을 놓으려 했으나 그녀가 놓아주지 않았다. 하물며 엘리시아 손까지 유진은 겸연쩍한 표정으로 웃었으나 자꾸 눈물이 흘렀다. 언제나 지독한 상처로 남은 것들을 모두에게 훌훌 털어버리니 내면에 가득 응어리진 것이 끝내 폭발한 것 마냥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마치 이들에게 여태 숨겨왔던 것을 용서를 비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사죄하고 싶었다. 갚고 싶기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너무 죄송했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

"죄송할 필요 없어. 네가 우리에게 미안할 필요는 없어."

"내가 엄마를 죽였어요. 누나를 죽였다고요 아리사를 죽이고.. 끅.... 아버지를 죽이고.... 슈리엘 가문을 부쉈어요. 죄송했어요. 너무 죄송해서.. 괴롭고 아팠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죄송해요... 정말.."

결국, 참을 수 없는 감정이 폭발해버리자 어머니가 다가왔다. 여전히 자상함을 담아 우는 아이를 달래듯 끌어안은 품은 모든 것을 포용할 정도로 따스했다. 유진은 그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참을 수 없을 죄책감에 주체할 수 없었다.

"죄송했어요."

서럽게 울었다. 여태까지 잘 참아왔거늘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죄책감은 한계까지 차올라 슬픔을 자극했다. 그렇기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이리도 응어리진 죄스러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서 무덤덤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죄책감마저 일어서 계속 울었다.

처음으로 그들의 품에 빌려 하염없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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