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4화 〉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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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루트가 단호하게 소리친다. 특히 우람한 체형만큼이나 그가 말할 때마다 궁전이 다 울릴 정도로 걸걸한 목소리에 분노가 잔뜩 실려 있었고 에일린을 향한 걱정이 다분했다.
"괜찮은 거냐? 그 몹쓸 녀석이 네게 허튼짓은 부리지 않았어? 어디 상처 입은 곳은 없고? 내 반드시 항의해 제대로 된 사과와 보상을 받게 하마!"
"괜찮아요. 슈리엘 공작님이 제때 도와줘서 별다른 일도 없었으니 여기서 더 일을 키울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
여전히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태평한 대답에도 휴센의 왕 지크루트와 옆에 왕비 사라시엘은 자신이 직접 당한 것 마냥 표정에 걱정이 한가득 묻어 연실 호들갑을 떨었다. 더욱이 당장에라도 펠로리안 백작의 영지로 쫓아가려는 것을 말리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으나 지크루트는 여전히 불만이 잔뜩 서려 있었다.
그에게 몇 번이고 괜찮다고 한들, 오랜만에 만나는 에일린은 지크루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공주였으며 아무리 성장해 만개한 꽃처럼 자랐다고 한들 에일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딸이었다. 더 나아가 아직 애나 다를 바 없었다.
지크루트의 얼굴에 쉬이 풀리지 않는 분노가 엿보였다. 특히 두툼한 뱃살의 떨림과 더불어 유난히 커다란 풍채가 한껏 부풀 정도로 분노에 찬 모습은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활화산처럼 변해 있었다. 애써 화를 간신히 억누르는 것 같으나 그게 쉬워 보이지 않았다.
에일린은 그런 그들을 향해 벌써 몇 번째 괜찮다는 말을 반복했는지 몰랐다. 마침 어머니 사라시엘이 물었다.
"네가 정녕 괜찮다면 정말 다행이구나 제때 도움을 받아서 언제고 슈리엘 공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겠어. 그런데 그분과 따로 만나 얘기까지 나눴다면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니?"
"네."
"혹시 다이크 슈리엘 마저 널 관심에 둔 것은 아니고?"
여전히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지크루트의 퉁명스러운 물음에 에일린이 고개를 젓자 그가 조금은 안도감을 내비쳤다. 그럴수록 둘 역시 궁금증이 커지는 것으로 보였다. 하긴 제국에서도 유일한 공작 가문의 가주와 정치계에 입상한 것도 아닌 공주가 따로 얘기를 나누는 것은 그다지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에일린은 뜸을 들이지 않은 채 곧장 말을 이었다.
"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역시! 다이크 슈리엘이냐?!"
채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지크루트가 즉각 반응했다. 제법 큰 충격이었는지 금세 얼굴이 빨갛게 물들 정도였다. 에일린은 아버지의 호들갑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수록 이들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결국, 사라시엘은 제발 호들갑 좀 떨지 말라며 지크루트를 향해 나지막이 타박하자 그도 애써 북받치는 감정을 억눌러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풀풀 내쉬며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억지로 입을 다문 채 에일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슈리엘이긴 해요."
"역시 다이크..."
또 말을 자르고 껴들려고 하는 지크루트의 설레발에 끝내 사라시엘이 날 선 눈초리가 노골적으로 핀잔을 준다. 그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표정으로도 말을 아꼈다. 간신히 에일린이 말을 이었다.
"다이크 슈리엘님이 아니에요. 그의 아들.. 그러니까 슈리엘의 후계자 유진을 좋아해요."
"유진.. 슈리엘?"
지크루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사라시엘을 보았다. 그녀 역시 지크루트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둘에게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인 것 같다.
하긴 어쩔 수 없었다. 유진은 아직 한 번도 사교계에 입성하지 않았을 뿐더러 아직 정정한 다이크 슈리엘이 하이란 귀족계에 거목으로 단단하게 입지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 타국의 왕으로서 굳이 사교계에 입성하지 않은 이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하물며 타국의 왕이 타국의 귀족 가문의 자식까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니 말이다.
결국. 서로의 시선이 맞물려 의문이 가중되자 다시 에일린을 보았을 때,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짓는 에일린의 표정은 평소의 무덤덤함이 아닌 몹시도 단호한 의지가 서린 상태였다. 특히 그 의지에는 짙은 고집이 서려 있을 정도이니 자연스레 지크루트와 사라시엘도 제법 진중한 얼굴을 했다.
"유진 슈리엘.. 그 아이를 좋아해요."
"그 아이도 그렇게 생각하고?"
어머니의 물음에 에일린이 잠시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그럴수록 점점 가중되는 의문 속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에일린이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냐? 네가 좋아하는데 잘 모르겠다니?... 혹시 뭐 짝사랑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짝사랑?
에일린은 잠시 의문을 가지고는 '짝사랑' 이라는 단어를 되뇌며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생각해보니 아직 유진은 잣긴을 향해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보면 짝사랑이 맞지 않을까 싶다. 결국, 나 혼자만 그 아이를 좋아하는구나 싶자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채 살짝 얼굴을 붉혔으나 구릿빛 피부로는 쉬이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애써 평소의 무덤덤함을 유지한 채 슬쩍 의문을 내비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 에일린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면.. 그런 것 같아요."
"허... "
허탈한 한숨이 둘 사이에 맺혔고 침묵이 제법 오래 이어졌다. 그러나 에일린은 더 걱정이었다. 충격적인 이야기는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점점 조급해졌다. 호시탐탐 때를 기다리며 언제 유진에게는 이미 두 명의 여인이 있다는 말을 해야 할지 에일린은 쉬이 감을 잡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러한 일은 처음이라 더 힘든 것은 아닐까 싶다. 난처함에 각자 다른 의미로 상념에 잠겨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을 때, 불쑥 사라시엘의 손이 에일린의 손을 쥐었다. 그러며 마주한 시선에 사라시엘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치 감격이라도 받는 것 마냥...
당황한 에일린이 토끼 눈 마냥 동그랗게 뜨며 껌뻑이자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사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아직 짝사랑이지만, 그래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구나?"
"그, 그게 그리 놀랄 일이에요?"
"그럼!"
다른 의미로 감격스러워하는 어머니를 보자니 에일린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심지어 지크루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시엘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 같으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아이가 그것도 휴센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 아비로서는 영 불만이다.
그것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가 아닌 짝사랑이라니?!
지크루트의 얼굴에 불만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마침 머뭇거리던 에일린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문제가 더 있어요."
"문제? 왜? 설마 다이크 슈리엘이 널 반대하는 것이더냐? 그건 걱정하지 마라! 아비가 알아서.. 아니지 그 전에 유진이라는 아이의 마음부터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야! 그것 역시 아비에게 맡겨! 아무리 슈리엘 가문이라 할지라도 휴센의 왕 앞에서도 내 소중한 딸 아이를 거부할 수 있을지 보자꾸나!"
"이이는! 무례에요! 오히려 그게 더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구요!"
지크루트의 호언장담에 사라시엘이 핀잔을 주었다. 그는 '그런가?' 라는 말로 겸연쩍한 모습을 내비쳤다.
한편 에일린은 차마 웃지도 또는 울지도 못하는 상황에 제법 큰 피로감을 느꼈다. 괜스레 입술을 혀로 축이며 둘의 만담과 같은 설레발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으나 쉬이 끊이질 않자 결국 에일린이 먼저 나서서 말을 끊었다.
"저기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문제에요."
"다른 문제라면 뭐? 혹시 유진이 널 싫어하는 거야? 감히 우리 딸을? 확! 목을 베어 펠록의 먹잇감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말 좀 들어주세요."
결국, 다시 말이 다른 길로 세기 전에 에일린이 말을 잘랐다. 그러며 쏠린 시선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조심스레 말문을 이었다.
"유진.. 그러니까.. 제가 좋아하는 그에게는 사실 두 명의 여인이 더 있어요."
"응?"
순간 공기가 얼어붙는 것 마냥 적막이 내려앉았다. 더욱이 멍해진 시선으로 말을 잊지 못한 지크루트가 눈을 껌뻑였고 사라시엘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에일린이 애써 머쓱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마저 말을 덧붙였다.
"제, 제가 좋아하는데 안타깝게도 유진에게 두 명의 여인이 있어요.. 그런데도.. 전 그 아이를 좋아해요."
머쓱한 얼굴로 괜스레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며 처음부터 가만히 있지 못한 손가락은 늘어진 치맛단을 꾸깃꾸깃 매만지며 스리슬쩍 둘을 표정을 살폈으나 넋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은 에일린으로서 난처함만 가중시켰다.
재법 큰 충격이었을까? 말을 잊은 아버지 지크루트와 어머니 사라시엘이 망연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한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 에일린은 마치 죄인이 된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것 마냥 충격에 휩싸인 지크루트의 입가에 헛웃음을 새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유부남을 좋아한다고?"
"아, 아직 유부남은 아니에요. 예.. 아직은... 아, 아마도요.. 어쩌면요.. 사실 잘 모르겠네요. 그냥 좋아해요.. 지, 진심이에요."
자신감이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의 표정 변화가 이리도 많다는 것을 에일린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여러 감정이 한데 겹칠 정도로 빠른 표정 변화에 당혹스렁루 정도였고 그러한 모습을 지금 지크루트가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황당함을 넘어 허탈함을 내비치기도 했고 혹여나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싶어 의문을 품은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곧 분노로 변모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헛웃음을 그리며 애써 고개를 내젓기도 했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의문을 담았다.
에일린은 머쓱하게 웃었다. 웃음은 마침내 침묵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웃음이 나와!"
난생처음으로 지크루트가 에일린에게 언성을 높였다.
"죄, 죄송해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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