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9화 〉 저보다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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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쫓아 왔거늘.. 애써 아쉬움과 미련이 남아 다짐한 흑발의 여인이었다.
끝내 여인의 걸음은 다시금 높지 않은 둔덕 길에 나아갔다. 잘 깔린 도로에 나무들이 즐비했다. 이름 모를 나무는 향긋함을 내었다. 흑발의 여인은 코를 킁킁거리며 한창 축제로 시끌벅적한 메디테움의 악취 속에 벗어났다는 것에 편안함을 느꼈다.
하물며 저만치 나아가는 여인의 속도도 제법 빨라지기 시작할수록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흑발의 여인 역시 그녀를 따라 언덕이라 할 수 있을 곳을 끝까지 나아갔다. 그리 높지 않아 정상까지는 금방이었다. 그곳에 어둠의 가려진 동상이 보였으나 흑발의 여인은 무심하게 지나쳐 앞선 여인이 나아간 길을 뒤따라 갔다. 그녀의 신형은 더욱 빠르게 나아갔다.
무언가 조급함이 느껴질 걸음 속에 온 신경이 온통 앞으로 쏠려 있으니; 흑발의 여인 역시 굳이 기척을 숨기는 것에 조심하지 않은 채 뒤를 따랐다.
30분 쯤 더 걸었을까?
하나의 둔덕을 넘자 마침내 앞서 간 여인의 목적지를 볼 수 있었다. 흑발의 여인도 모를 수 없는 곳이었다. 소아렌이지 않은가?
물론 소아렌이 메디테움에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다. 여인은 앞서 간 여인의 실루엣이 소아렌 정문에 이르러 간단한 인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흑발의 여인은 그 모습을 보았고 다시 소아렌을 한눈에 담았다.
산등성이를 깎아 만들었는지 약간 고지대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소아렌은 몹시 고요하고도 고고한 상태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푸른 빛이 중간 중간 어스름하게 보일 때마다 마치 별빛이 내려앉은 것 마냥 아름다운 고요함이 가득 차 있었다.
흑발의 여인에게는 무엇보다 이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더욱이 예스러워 보이는 건물 역시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곳곳에 새겨진 푸른 빛의 은하수가 마음을 홀렸다.
여인은 홀리듯 둔덕진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잠시 소아렌의 아름다움에 취해 여인을 쫓아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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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일린의 걸음이 빨라졌다. 불안하고 불쾌함이 가득한 성을 지나 소아렌에 오니 마침내 자유를 느끼며 후련함을 느꼈다. 생각한 대로 답답함이 사라진다.
한달음에 경사진 교정을 올랐고 익숙하게 분수대를 지났다. 그때까지 에일린은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그녀는 정신이 나갈 정도로 성의 답답함이 몹시 불쾌했고 숨통을 조여온다고 느끼고 있었으며 오직 그를 만나고 싶다는 일념하에 정신이 홀려 있었다.
답답함이 곧 폭발하기 전에 어서 그를 만나고 싶었다.
분수를 지나 자연스레 기숙사가 아닌 제1본관, 다르게는 플라톤이라는 소아렌의 1대 교장의 이름이 새겨진 건물로 향했다.
걸음이 더욱 빨라지다 못해 이제는 완연하게 뜀박질이 돼 있었다. 너무 급하게 와서 그럴까? 슬슬 숨이 차고 이마에 땀이 흘렀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잠깐의 고민조차 없이 단숨에 1층 본관 건물 중앙 통로에 이르렀다.
잠시 그곳에서 멈춰 서 헐떡이는 숨을 다독였고 오른쪽 복도 길로 곧장 향했다.
유진이 있는 곳은 오른쪽 복도 끝, 휴게실이었다. 보통 수업을 받다가 다친 이들이 치료받는 양호실이자 공용 휴게실이었는데 지금은 오직 유진에게만 허용된 회복실이 돼 있었다. 그녀는 단숨에 그곳에 이르렀고 당당하게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내부의 모습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으며 그 안에 행태를 마주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처럼 멈춘 채 잠시 말문을 잃었다.
눈을 홀릴 정도로 음탕한 색과 향이 만연한 광경이었다. 추잡스럽고도 매혹적이며, 음험하지만 중독적인 향연, 후끈한 열기는 축제의 열기보다 더 후끈했고 여러 체취가 섞인 곳보다 더 짙은 체취가 맴도는 곳이었다.
에일린은 당황했으나 마른침을 꿀컥 삼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이르렀을 때, 당황한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림을 느꼈고 화들짝 놀라는 모습도 보았다. 자신처럼 그들도 얼어붙은 듯 눈을 화등잔만 하게 커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은땀을 애써 닦아내며 에일린이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지금 이 순간에 할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상하게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여러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입가에 여러 단어가 모였다.
그러면서도 어쩌면 자신이 왕성의 답답함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입가에 맴도는 단어가 하나의 문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쉬이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난감했다. 더욱이 머뭇거림에 모인 문장이 깨어지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점점 당황해 혀로 입술을 훑었다.
앞에 이들의 시선이 점점 분노와 불쾌감으로 변하니 그 역시 머리를 새하얗게 불태울 정도로 두렵게 했다.
어떤 말을 하려 했더라?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을 표현하려면 더 좋은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단어로 문장을 만들어야 할까? 결의가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니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분명 마음의 준비를 했는데.. 만나자마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유모부터 시작해 개인 교사에게 배웠던 수많은 문학적 표현을 완연하게 잊었다.
잠시 뜸을 들이며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을 때, 에일린이 마침내 침묵을 깨고 당황하고 있는 이들에게 말했다.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 그, 그게 아니고.."
"...예?"
돌아온 대답에 에일린은 뒤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마음이 너무 앞선 것 같아 안타까움에 탄식을 터트렸다. 금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로서 낼 수 있는 최고의 부끄러움이었으며 처음보다 더 긴장한 나머지 입술을 깨물었다. 더 나아가 한창 관계를 즐기고 있던 두 여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다 못해 분노의 화신이 된 것 마냥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에일린은 자신의 말실수를 자책했으나 그렇다고 도망치거나 하지 않았다. 후회가 일긴 했지만, 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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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말이 돼? 도대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흑발의 여인이 몰래 저들의 뒤를 밟으며 한 생각이었다. 소아렌을 잠입해 그녀의 뒤를 밟는 것까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며 여인을 쫓아오길 10분여 마침내 여인을 따라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내부를 보았을 때에 들었던 말은 충격은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려고 제법 먼 거리를 이렇게 달려온 걸까? 하물며 지금 이 상황에 맞는 말이야?
발키리로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 언제나 일부일처가 '당연하다.' 라는 통념이 있거늘 지금 저 안에는 두 여인과 한 사내가 성교를 나누고 있었다. 더욱이 불륜으로 보이진 않았다. 불륜이라고 하기엔 휴센의 여인이 한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동떨어진 말이었으니까...
쉽지는 않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래 여긴 타국이니까, 타국에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 하다니까 이해하겠다. 특별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배웠으니까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뒤를 쫓은 여인의 행동에 나아가 물음에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다. 떡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황당해 머리가 백치가 된 것 같다.
장담하건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삼류 로맨스 소설도 이렇게 막장이지 않으리라....
심지어 저 고백이, 지금 저 여인이 한 고백이 고백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고백이 남자 한 번 제대로 사귀어 보거나 대화조차 나눠보지 않았던 여인으로서도 이 상황에 적절한 단어라 할 수 없었다.
백 번, 천 번을 양보해도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굳이 평가를 내릴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고백이라 장담할 수 있겠다.
언니들이 안다면 평생을 놀림 받을 일이리라...
뜬금없이 타인과 성교하고 있는 남자에게 아이를 갖겠다니? 헛웃음이 흐른다.
문득 휴센의 여인들은 저러할까 생각했지만, 발키리에서도 휴센 지역의 사람이 있었다. 특히 여인들도 모이면 남자 얘기 조금은 야릇한 얘기가 가끔 빠지지 않을 때 있다. 그때 언뜻 들어본 바로는 저렇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아는 휴센 지역의 사람은 옛사람이라 그럴까?
그렇다고 하기엔 그다지 차이도 나 보이지 않은데...
이해할 수 없다. 지금 이 혼란과 혼돈은 하이란의 수도이자 한창 축제로 혼돈 둘러싸인 메디테움보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상대의 반응도 사뭇 이해할 수 있다.
그저 멈춰 있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 마냥 남자는 침대 위에 푸른 머릿결의 여자를 껴안은 채, 남자와 비슷한 머리카락색을 가진 여인 역시 한창 남자와 키스를 나누다가 얼빠진 표정으로 휴센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며 점점 험상궂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주변이 얼어붙은 것만 같은 어색한 침묵이 제법 오래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흑발의 여인은 이 막장 소설 속에 왠지 모르게 흥분하고도 흥미진진함을 느꼈다. 그러며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이어질 대화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며 여러 상상의 나래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펑펑 터지며 별 희한한 상상력을 연실 자극했다.
마른침을 삼키고 바짝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마침내 휴센의 여인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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