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668화 (668/1,410)

〈 668화 〉 너를 보러 올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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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시엘과 유진의 걸음이 어느덧 본관을 지나 2 본관과 이어진 길목 안뜰 화원처럼 꾸며 놓은 곳에 이르렀을 때까지 둘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특히 사라시엘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엷게 웃기만 했지 딱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한가한 곳을 찾아 나아갔다.

유진은 그런 그녀를 연실 불안한 눈길로 곁눈질하며 어색함 속에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아무도 없는 안뜰에 이르렀을 때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선선한 바람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본관의 건물과 2 본관 건물 사이에 위치한 안뜰인지라 작은 화단으로 꾸며진 곳은 그늘이 져 있어서 그런지 그리 크지 않은 나무 한 그루를 제외하고는 딱히 별 볼 일 없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지크루트와 함께 있을 때보다는 후련함을 느낀 유진이 선선한 바람이 손끝을 타고 춤을 추는 것을 만끽하고 답답하게 응어리진 폐부를 상쾌하게 하는 공기를 마주하니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멈춰 선 사라시엘을 마주했다.

바깥에서 좀 더 자세히 그녀를 보자니 확실히 에일린과 똑 닮아 있었다. 지크루트의 구릿빛 피부만 빼면 그녀와 쌍둥이 자매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나이만 조금 더 들어 보일 뿐이었다. 물론 다른 점이 없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표정에 드러나는 감정이 에일린 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었으나 그러한 점을 제외하곤 그녀와 0판박이였다.

버릇처럼 보여주는 눈웃음은 오랜 시간 연습해서 나온 인위적인 웃음이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상하고 자애로운 눈웃음이었으며 간혹 에일린이 웃을 때 보여주는 웃음과 똑 닮아 있었으나 훨씬 자연스러웠다.

유진으로서 호의가 가득 담긴 웃음이 어찌나 반가운지 몰랐다. 특히 지크루트와 에일린 사이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차오르던 답답함이 탁 트인 바깥과 호의적인 웃음이 닿는 순간 후련함을 느끼게 했다.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유진이 그녀를 마주했을 때 마침내 그녀가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놀랐단다. 슈리엘의 후계자를 본 것도 처음이거니와 딱히 얘기를 들은 적은 없거늘.. 에일린에게 먼저 너의 소식을 들었을 줄이야."

"죄송합니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유진이 급히 고개를 숙여 보였으나 사라시엘이 특유의 눈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유진의 뺨에 손을 얹어 눈코입을 보았고 차근차근 장성한 아들을 바라보듯 모습 전체를 눈에 담는 듯 행동했다.

한참동안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다시금 엷게 웃으며 말했다.

"먼저 이렇게 젊은 아이인지 몰랐단다. 그럼에도 이렇게 듬직하고, 잘생기기까지 하는 것을 보아. 확실히 다이크 슈리엘님보다는 지루드 슈리엘님을 더 닮은 것 같구나?"

"과찬입니다. 아직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발끝만도 못하는 걸요."

겸연쩍한 모습에 버릇처럼 뺨을 긁적였다. 사라시엘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조금 더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에일린이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구나. 처음이란다. 그 아이가 누군가를 위해 저렇게 언성을 높이는 게. 아니... 애초에 어떤 일이 있든, 조금은 부당한 일이 있다 한들 이렇게까지 언성을 높이며 감정을 격렬하게 내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단다. 그래서 나도 그이도 많이 당황했지. 아무래도 그만큼 널 좋아한다는 이유일까?"

"제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글쎄? 사실 나는 네가 우리 에일린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단다. 에일린에게 남자가 생긴다면, 딱 너와 같은 남자가 있길 바랐지."

유진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 그녀를 보았다. 적어도 지크루트처럼 강압적이지는 않겠지만, 반대하리라 생각했다. 그만큼 조마조마한 감정으로 곧 다가올 반대 의사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거늘 정 반대의 뜻이 다가오자 잠시 머리가 멍해진 기분이었다.

눈을 연실 껌뻑이며 그녀를 바라보자 그 모습이 꽤 웃겼나 보다. 사라시엘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쿡쿡 웃으며 마저 말을 덧붙였다.

"트루먼에게 들었단다. 갈라도에 대해서.. 분명 시간이 지나면 소문은 더욱 대륙 전체에 퍼질 테고 명성도 훨씬 드높아질 테지?"

"저도 어제 들었어요. 교장 선생님이 결국 갈라도 일을 발표한다고. 그리고 저 혼자만 이룩한 게 아니에요."

"글쎄 혼자만 이룩한 것이 아닐지라도 결국, 모두가 널 칭송할 거야. 더욱이 트루먼도 그러길 바라는 것 같고. 너를 왕이자 영웅이라 하더구나. "

연이어진 칭찬에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어쩔 줄 몰라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마냥 좋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트루먼은 자신의 명성을 일부러 과장하려는 듯 보였다. 영웅이라니.. 더욱이 이 모든 일이 나 혼자 해결한 일이 아닌데도 모두가 그렇게 믿게 하는 듯 보였다.

물론 그만큼 갈라도에 관한 사실들을 전부 자신에게 귀속시켜 그러며 다가올 혼란을 사전에 잠재우려는 꾀가 분명했다. 슈리엘의 이름과 명성을 빌어서 말이다. 그것에 이용되고 있었으나 유진으로서도 딱히 나쁠 것은 없지만, 이렇게 갈라도에게 이어질 관심이 자신에게도 번진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결국, 우리도 소아렌을 시찰하는 것이 중단되었지. 놀랍게도 하이란의 국왕도 모르는 일 같더구나? 그래서 잠시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나올 수 있었고 너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단다. 어찌 되었든 꽤 심각해 보이니 앞으로 자주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순 없었을 테니 말이야."

쓴웃음을 그렸다. 말마따나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테고 계속해서 불려다닐 것이 분명했다.

만약 트루먼의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밝혔다면 이종족까지 밝혔으니 아무래도 타국의 사신들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을지도 몰랐다. 특히 소식을 들은 타국의 사신들은 어서 지금의 소식을 각각 본국에 어떻게든 보내려 할 테고 그들도 알게 된다면 이목은 당연하게도 그들과 더불어 슈리엘에게 쏠릴 테니 말이다.

더불어 아버지나 할아버지 역시 바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진의 시선이 힐끔 본관 건물을 훑었으나 다시 사라시엘에게 향했다. 마침 그녀가 마저 말을 덧붙였다.

"갈라도 최초 발견자, 이종족의 구원자, 트루먼님에게 듣기로는 갈라도의 마지막 왕이 그리고 영웅이라 정말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명성을 쌓았다는 것이 대견해."

"다 허울뿐이에요. 갈라도는 이제 남은 것도 없는걸요."

"그렇지 않아."

사라시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며 제법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특히 갈라도는 마도 시대보다 전대의 흔적이야. 아니 흔적이라 할 수 없지. 증명할 수 있는 산증인을 직접 데려왔어. 그것도 멸족했다고 전해지는 드워프와 엘프까지 데려왔는데 어찌 그게 허울이겠니? 분명 너는 갈라도의 마지막 왕이라 해도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을 테지. 더욱이 그러한 명성이 슈리엘의 명예를 더 드높일 테고 너에게 힘이 되어줄 텐데."

"이리도 칭찬해주니.. 조금 부끄럽네요."

머쓱함이 일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전히 누군가의 칭찬을 받는 일은 익숙지 않아 어색했다. 그때 그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길이 무척 자상함이 묻어나왔다. 마치 어머니를 마주한 것처럼 그러며 마주한 시선 사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웃음을 건네니 잠시 근심이며 걱정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나도 그런 허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단다. 누군가 어떠한 위치를 갖든, 어떠한 명성을 쌓아 올리든 중요하지 않아. 더욱이 너에게 여러 여인이 있다 한들 중요하지 않아 지크루트도 나를 좋아하긴 하지만, 두 비도 좋아하니까.. 영웅은 호색한이란 말이 있듯 왕 역시 영웅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크루트는 진실하게 날 좋아한단다. 그건 확신할 수 있지. 그렇기에 너에게도 진실된 마음으로 묻고 싶구나 내 눈을 바라보고 거짓 없이 말해주렴."

웃음기가 사라진 사라시엘의 눈빛이 무척 진중해지니 에메랄드 빛을 닮은 유진의 눈도 덩달아 진중함을 담아 마른침을 꿀컥 삼켰다.

"잘 생각해서 말해주렴, 모든 것을 떠나서 네가 슈리엘이라는 가문이며 갈라도의 최초 발견자라는 명성을 내려놓고 에일린이 공주라는 명성까지 내려놓은 채 오직 남성과 여성 이 두 측면만 생각해 놓고 말해주렴, 정말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있겠니? 그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겠니?"

"네! 절대 에일린 누나에게 피눈물 흘리지 않게 할 거에요. 반드시요!"

"누나라.. 공주가 아닌 누나라는 호칭이 정말 듣기 좋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만족스러웠을까? 그녀가 수줍게 웃는다. 그러면서도 '누나' 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되뇌더니 웃음기 다분한 시선이 다시금 유진에게 닿았다. 그런 그녀가 나지막이 '사위가 되는 건가?' 라는 말을 하자 유진에게도 어색하고도 새로운 감정이 다가왔다.

사위라니..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을 정도로 어색했으나 딱히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사위' 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며 조금은 부끄럽기도 때로는 기대감이 일기도 했다. 유진이 말했다.

"절대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에요. 모든 것을 내려놓을지라도 그녀가 어떠한 삶을 살아오든 간에 상관하지 않아요. 누나가 감사하게 절 좋아해 주는 것처럼, 제 가문이나 명성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닌 것처럼 저도 똑같아요. "

"다행이다. 그래 정말 다행이야.. 물론 나도 네가 여러 여인을 두는 것에 상관하진 않아. 아니 신경은 쓰이지만, 딱히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 건.. 정말 죄송해요.."

차마 할 말이 없어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죄책감을 느끼기 바라서 말한 게 아니란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어. 에일린이 널 좋아하는 것만큼 과연 너도 그 아이처럼 똑같이 좋아하는지 말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너와 에일린을 보았을 때 불확실함을 느꼈단다. 더욱이 에일린과 얘기를 나누었을 때, 그 아이가 말해주었거든 너는 딱히 자신을 좋아하지 않다고, 에일린 혼자 짝사랑하고 있다고. 내게 말하더구나."

그녀가 피식 웃더니 나지막이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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