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2화 〉 수화란
* * *
"지옥? 참으로 터무니없는 명칭인데?"
그녀가 고개를 헛웃음을 그리며 되물었다. 모습은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이 목소리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의문을 담았다. 그러한 반응에 유진은 진위를 찾으려 슬쩍 수화란의 표정을 살폈다. '지옥' 이라는 단어에 크게 반응했으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유진은 아쉬움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아쉬움은 그녀가 정녕 지옥에 대해 모르는 것 같아 느낀 감정이었고 안도감은 혹여나 알게 모르게 수화란 마저 교단의 끄나풀이면 어떨지 조마조마했으나 딱히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다는 점이었다.
기억에 의거해 수화란은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는 여인이라 결론을 내렸다. 물론 아직 확실치 않아 유진에게 있어 어찌 보면 도박 수이기도 했다. 마저 말을 이었다.
"지옥은 지하 도시로 무쥬엘라와 하이란의 경계선쯤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내가 아는 전부야. 말했다시피 그곳도 이곳과 비슷해 아니 더 최악이지, 그러니 그들에게 명칭보다는 지옥이라고 불렸는데 안타깝게도 나 역시 제대로 된 정보가 없어. 전혀 몰라 그저 그들 사이에 명칭은 '지옥'이라고 불렸다는 것과 간혹 감옥이라 하는 이들도 있다는 점? 그리고 지하 도시라는 점이 전부야."
회귀 전, 지옥은 유진이 매번 임무를 끝날 때마다 들렸던 곳이었다. 분명 지옥에서 만났던 이들의 기억이 생생할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으로 가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곳은 무쥬엘라와 하이란 국경의 경계를 두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떠오르는 것은 지하 도시였으며, 빛이라고는 쉬이 볼 수 없어 금보다 더 빛이 비싸다는 말이 오가던 도시였다. 그곳에 악취와 분내, 그곳에 아등바등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이들의 한이 서린 목소리마저 전부 생생하게 기억하거늘 그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마치 특정 부분의 기억만 송두리째 잘려나간 것처럼 기억이 흐릿한 것도 아닌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유진이 말했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무쥬엘라와 하이란 사이에서도 남서쪽으로 제법 깊게 들어가야 있다는 것 정도? 어쩌면 아닐지도 몰라 확실하지 않으나 분명 어딘가 제대로 된 명칭은 아니지만, 분명 지옥이라고 불리는 지하도시가 있어"
"지하도시 자체를 처음 듣는데..."
"그럴 거야. 어쩌면 지금 없는 도시일지도 모르니까. 젠장 확실한 건 없어. "
"장난하는 건가?"
모호한 대답 속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다시금 수화란의 목소리 끝이 살짝 높아졌다. 더욱이 찌푸린 표정과 날카롭게 뜬 시선은 금방이라도 욕설을 토해낼 것처럼 살벌하기만 했다. 그러한 모습에 유진이 킥킥 웃었으나 입가에 묻은 씁쓸함까지는 쉬이 떨쳐낼 수 없었다.
간혹 몇몇 기억이 이렇게 사라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곳을 찾은 연유이기도 했다. 혼자서 끙끙 앓는 것보다는 그나마 믿을만한 정보 길드에 도움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비밀리에 둘러싸인 그곳이나 교단을 향한 정보 역시 단번에 알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대다수 정보 길드가 교단의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곳도 많았으니 말이다. 심지어 자신의 구역 앞에서 교단이 발호하고 있음에도 몰랐던 곳이 많았다.
그만큼 교단은 정보를 차단하고 독식하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렇기에 교단이 만든 지하 도시 지옥을 찾기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만약에 찾을 수 있다면, 유진 역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교단의 성지를 찾을 실마리 역시 얻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옥' 그곳을 반드시 찾아야만 했고 찾음으로써 교단을 무너트릴 시발점이 되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믿을만한 정보 조가 유진에게도 필요했다. 그것도 가문의 정보 조가 아닌 개인의 정보 조로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이가 바로 수화란이라 여겼다.
물론 지옥을 찾는 이유 중에서도 다른 사심이 있기도 했다. 유진이 조금 전의 진중함과는 다른 모습으로 말했다.
"그곳에 로렌스라는 여자가 있어. 홍화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여인이기도 해 그 여인을 좀 찾아줄 수 있어? 아니 지금은 기생이 아닐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여인을 찾는다면 지옥의 실마리는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을 테지. 그리고 나 역시 빚을 진 여인이기도 하고 말이야."
"빚을 져? 당신 아크네랑 소아렌 밖을 나가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하는 말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아. 더욱이 숨기는 게 분명 있잖아?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나에 대해 많이 아네?"
수화란이 곰방대를 입에 물어 숨을 들이켰다. 살짝 부푼 볼이 불만이 한가득 쌓인 듯 보였다. 이어 신경질적으로 숨을 토해냈을 때, 불만과 의심, 의혹이 가득 담긴 연기를 쏟아지며 얼굴에 닿고 흐드러졌다. 씁쓸한 향 속 엷은 달콤한 숨결을 느꼈다.
유진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높으신 귀족 가문의 정보는 특별하니까.. 말했다시피 크루네 지부는 메디테움과 아크네 지역까지 담당하고 있고 그중에 황실과 공작 가문의 정보는 우리가 담당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특히 그 후계자의 성향 파악이며 무엇을 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아는 것 역시 정보 길드에서 중요한 역할이지. 그러므로 연대할 수 있고 말이야."
"귀족과 연대하고 싶은 건 알지만 조금 기분 나쁘네. 특히 그 당당하고도 뻔뻔스러운 모습이 말이야."
수화란이 빈정거리듯 웃으며 한 차례 더 곰방대를 피워댔다. 그러며 이어진 정적은 보다 빠르게 깨어졌다. 불만 어린 표정을 보이던 유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표정을 풀었다.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와 말했다.
"뭐 넘어가기로 할게. 아무리 당신들을 밀어내려 해도 계속해서 생길 테니까 그게 당신들의 생리라는 것을 아니까.. 오히려 이렇게 연을 쌓고 서로 정보를 좀 공유하면 없애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공유? 정말 공유할 생각이 있다면 아까처럼 말도 안 되는 금화를 부르지 않았을 텐데? 지금처럼 숨기는 것도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동등한 거래이지."
여전히 의심과 의혹이 마음에 남았는지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들리자 유진이 쿡쿡 웃어대었으나 금세 표정을 굳혔다. 여태껏 가벼웠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진지함에 수화란을 몸을 살짝 움찔거렸으나 애써 곰방대에 풀풀 피어오르는 연기로 동요를 감췄다.
뿌연 연기가 둘 사이에 맴돌아 어디선가 부는 바람에 흐드러졌을 때, 유진이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100 골덴은 그냥 허투루 한 소리가 아니야. 그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뜻이야. 이건 장난이 아니야."
"흥! 진지한 척은.."
퉁명스러운 대답과 함께 그녀가 시선을 틀자 유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맺혔고 조금 전 끊긴 말을 이었다.
"어쨌든 로렌스라는 여인으로 성은 모르고 이름만 알아. 지옥에서는 홍화라는 기명을 사용했고 인상착의는 어렸을 적부터 붉은 드레스를 즐겨 입었다고 했어, 검은 머리카락과 살짝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여인이기도 하고, 살짝 불그스름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어. 아니 고동색이라 해야 정확할까? 잘 기억나지 않네? 아무튼, 무척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고 살짝 프레이아의 악센트를 가지고 있긴 한데. 사실 뒤죽박죽 섞여 있어. 키는 나보다 작을 거야. 한 10센치 정도 더? 어쨌든 그녀에 대해 좀 찾아줘. 그녀를 찾게 된다면 지옥에 대한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의심 어린 눈초리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유진은 그녀의 의심을 이해할만했다. 분명 그녀가 가진 정보에 따르면 슈리엘의 후계자는 소아렌이나 아크네 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온실 속 도련님이었다. 그런데 그가 마치 천리안을 얻은 것 마냥, 혹은 미래를 보는 것 마냥 말하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이를 찾아달라 하니 누가 쉽게 믿을까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유진은 진실을 숨겼다. 진실을 묻는다면 허투루 제안한 것이 아닌 100 골덴을 요구했고 굽히지 않았다.
한편 수화란은 의심과 의문이 응어리지듯 심장에 콕 박혀 있음을 느끼며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럴수록 목소리는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정말 그게 다야? 더 없어? 어떻게 찾으란 말이야?"
"글쎄.. 이게 전부인데. 아차! 한 사람 더 찾을 사람이 있어. 앵화.. 아니지 지금은 그렇지 않겠구나.. 이 사람은 이름조차 모르는데."
유진이 잠시 입맛을 다시고선 버릇처럼 뺨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한참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건 설명하기 더 어렵네. 그다지 계급이 높지 않은 귀족 가문일 거야.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귀족이라고 하면 조금 좁혀질까? 자식을 창기로 팔려 나갈 정도로 위태로운 귀족 가문이라 할 수 있겠지... 나이 또래는 나보다 어릴지도 모르겠군."
"그런 귀족은 많지 않긴 해. 자식이 몸이 팔 정도로 위태로운 가문은 말이야. 그런데 그건 또 왜?"
"이 역시 지옥과 연관이 돼 있다고만 알아."
모호한 대답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수화란이 퉁명스럽게 콧방귀를 뀌며 다시 곰방대를 물었다. 유진은 그런 수화란의 모습에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지금은 예전이라 할 수 없겠다. 정확히 회귀 전과 지금의 모습이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녀를 보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도 매번 퉁명스러운 대답을 보이면서도 언제나 정확한 정보를 주고는 했다. 오히려 안위가 위태로울 위험마저 무릅쓴 채 확실한 정보를 얻어다 주고는 했다. 그러한 점을 잘 알기에 유진은 단순히 회귀 전 친분이 있다는 것만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수화란은 확실히 수완 좋은 정보 조를 꾸리고 있었다. 붉은 꽃, 자세한 명칭은 알 수 없으나 제법 많은 곳에 여러 지부를 세워둔 거대 정보 길드였다. 그러는 거대 조직에서 제국의 성도와 공작 가문을 담당하며 중요 지역 지부장을 허투루 단 것은 아닐 것이기에 믿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가문이 있다면 좀 모아주겠어. 음 인상착의로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어.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하게 생겼는데 하이란 귀족 가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 아닐 수 있어. 요즘은 국경이 사라져서 사람 특성만 가지고 출신지를 알 수 없으니까. 자세히 모르겠지만 부탁할게. 기한은 빠르면 좋겠지만, 딱히 제한은 없어."
"너무 광범위해."
"어려우면 찾지 않아도 돼."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이렇게 광범위한 의뢰는 인력도 많이 소모되니까."
그녀가 손가락으로 탁상을 툭툭 치며 시선을 끌었고 곧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원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돈을 뜻하는 그녀의 버릇이기에 유진 역시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의뢰기도 했다. 인상착의 역시 앞으로 몇 년 뒤의 모습일 테니 말이다. 머리를 바꾼 것일 수 있고 또 지금은 잘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지옥이라는 도시가 아직 없을지도 모른다.
허나 만에 하나라는 것을 믿었다. 지옥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홍화와 앵화 두 여인이 제법 도움이 되리라 여겼고 그곳을 찾게 되는 순간 마침내 교단의 중심부 즉 성지에 이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물며 홍화와 앵화는 회귀 전의 인연으로 도와주고 싶기도 했다. 어쩌면 아를란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아를란과 더불어 홍화 이 두 여인 만큼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기에 도와주고 싶었다. 그 외에는 성인군자가 아니라 알 바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동정이나 연민이 아닌 회귀 전이라 해도 은혜를 입었으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보상 심리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앵화는 겸사겸사였다. 찾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고, 찾을 수 있다면 나름 도와주고 싶은 여인이랄까? 엄연히 회귀 전에 그녀의 처음을 가져간 사람이 나였으니 말이다.
간혹 소소한 인연으로 사람의 목숨마저 구원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하물며 유진 역시 그러함을 느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적어도 둘을 도와준다면 비가 쏟아지는 날마다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들의 기억을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물론 할 수 있는 호의는 이것으로 최선이다. 만약 수화란이 그들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이 그들의 운명일 테니 어쩔 수 없다. 굳이 발 벗고 모든 것을 동원에 찾을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만약 운명이라면, 아직 그들과 연이 닿았다면, 도와줄 수 있을 범위까지 도와주면 그만이었다.
아를란처럼..
즉 자신의 노력은 여기서 끝이었으니 유진은 조금 후련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찾으면 알려주고 찾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럼 계산을 하도록 할까?"
의문이 많으나 지금은 일단 넘어가기로 한 수화란이 돈 얘기로 넘어가자 유진이 살짝 난처함을 그리더니 피식 웃었다. 수화란은 그 웃음의 진위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할 때, 유진이 버릇처럼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돈이 많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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