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6화 〉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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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살리에르가 하나의 방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무거운 구둣발소리는 거대한 복도를 외로이 울렸고 몇 번이고 머뭇거리길 반복했으나 이내 결심을 했는지 무거운 걸음이 차차 문 가까이 이르렀다. 조금의 망설임이 섞인 걸음은 그의 비대한 몸집과 한데 어우러져 제법 요란한 소음을 일으켰다.
만약 근처에 머물고 있는 이가 있다면 전부 깰 정도로 구둣발 소리가 우렁찼다.
한편 요란스러운 구둣발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은 돈 살리에르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의 울긋불긋하게 솟아난 여드름이 꿈틀꿈틀 움직였고 간혹 곧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불거져 나온 여드름을 시작해 흉측하게 여드름을 억지로 짜 분화구처럼 파인 부분도 제법 있었다.
그가 버릇처럼 뺨을 긁적였다. 불거져 나온 여드름이 그의 손톱에 닿고 터져 진물이 흘렀으나 제법 긴장한 그는 눈치채지 못했고 쓰라린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분명 기대감과 긴장 나아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엷게 소등된 복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의 비대한 몸 사이사이 머물렀고 움직일 때마다 그를 놀리듯 혹은 애무하듯 이리저리 춤을 추며 그의 흥분감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는 기장이 무릎을 살짝 넘는 정도의 긴 기장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제법 화려하게 치장된 큰 치수의 코트는 여름날에도 나름 그의 두툼한 뱃살을 가려주고는 했으나 영 불편했는지 아니면 긴장했기 때문인지 몇 번이고 불편한 옷매무새를 여미길 반복했다.
그가 짧게 헛기침을 했다. 이어 셔츠며 코트 옷매무새의 단정함을 다시 한번 여몄고 혹시나 싶어 버릇처럼 주변을 훑었다.
길게 늘어진 복도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고요했다. 노란빛에 전등갓이 씐 전등의 빛이 엷게 복도를 비추고 있었으나 깊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전부 몰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주변을 훑었으나 확실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들이나 저택 내부 순찰을 하는 기사들에게 미리 언질을 주었던 돈 살리에르는 자신의 판단이 좋았음을 인정했다. 나아가 아무도 없이 텅 빈 방안에 만족스러움을 내비쳤다.
그는 손에 쥔, 고급 용기에 포장된 와인과 두 개의 잔을 슬쩍 보았고 이내 결연한 표정을 했다. 비대한 몸집에 간신히 껴입은 멋들어진 예복을 문 앞에서 한 차례 더 확인하고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문을 노크했다.
쿵쿵! 둔중한 노크가 이어질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방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돈 살리에르의 긴장감을 맺히게 했다. 이어 바로 앞에 다가옴을 느꼈고 조금의 망설임과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이 살짝 열린다. 그 사이로 하늘하늘한 잠옷 복장을 한 프리실라의 모습이 보이자 돈 살리에르의 얼굴에 그림자조차 숨기지 못할 정도로 잔뜩 흥분해 빨갛게 물든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프리실라의 얼굴이 살짝 경멸 어린 눈빛이 맺혔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 살리에르 영주 대리.. 무슨 일이죠?"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쏘아졌으나 돈 살리에르는 쭉 째진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 움큼 기름을 바른 것 마냥 능청스럽고도 여유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프리실라는 느끼한 기름이 한껏 담긴 목소리에 몸서리쳤다.
"흠흠.. 그, 그것이 좋은 와인이 있어서 말입니다. 레이디... 괜찮으시다면 같이 한 잔 나눠 볼 수 있을까 해서... 늦은 시간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제안은 고맙습니다만, 죄송해요. 오늘 피곤해서 말이죠. 그리고 안타깝게도 저에게는 이미 몸과 마음을 준 사람이 있어 늦은 밤 외간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없답니다. 부디 영주 대리께서는 저의 입장을 헤아려주세요."
정중한 거절 뒤, 프리실라가 문을 닫으려 했다. 허나 문이 닫히지 않았다. 어느덧 문을 잡고 있는 돈 살리에르의 손이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더욱이 자신의 제안을 이리도 매정하게 거부할 줄 몰랐는지 붉으락푸르락 된 여드름 투성 얼굴에도 비대한 살집 마냥 고집이 함께 서려 있었다.
억지로 문을 닫으려던 프리실라가 최대한 경멸 어린 시선을 숨긴 채 힘겹게 미소로 화답했다.
"이만 물러나 주기를 바라는데요."
"잠깐이면 됩니다. 아주 잠깐이면.."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이미 제게 다른 분이 있으니 부디 예를 중시하며 여성의 정조를 지킬 의무가 있는 귀족이라면 여기서 더는 제게 무례를 보이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대로 물러나시면 오늘의 무례도 없었던 일로 넘어가 드리도록 하겠어요."
"자, 잠시.."
그가 말을 자르고 이내 문을 강하게 닫았다.
애초에 프리실라의 악력을 이겨낼 수 없었던 돈 살리에르는 결국 힘에 못 이겨 문을 놓았고 이내 매정하게 닫히는 문 앞에 이르러 허탈함을 남겼으나 곧 비릿한 웃음이 터졌다. 돈 살리에르의 단추 구멍 마냥 찢어진 눈이 매정하게 닫힌 문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찢어진 두 눈은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아리따운 푸른 달빛과 같은 여인을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들창코는 조금 전 맡았던 그녀의 체취를 잊지 않고 있었다.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점점 더 마음을 앗아가는 짜릿한 전율 속에 돈 살리에르의 하체의 몹시나 큰 자극이었다.
잠시 손에 쥔 와인을 보았고 한 참을 문 앞에 이르러 머뭇거리던 그가 신경질적으로 와인 뚜껑을 열고서 병나발로 벌컥벌컥 마셨다. 제법 독한 와인의 알코올 향이 목안을 타고 식도를 지나 위장에 채워지며 들끓는 마음을 차츰 잠재우고는 했으나 아직 모자랐다.
이내 쭉 찢어진 눈이 분노를 담았다. 신경질적으로 남은 와인 병을 열린 창문을 향해 던져 버린 그가 급히 품을 뒤졌다.
음흉한 속내는 거대한 갈망이 들끓고 있었다. 한낱 여인에게 무시 받았다는 사실이 분노를 들끓게 했으나 오히려 더 마음의 조급함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 오늘이 아니면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전신을 헤집었다.
돈 살리에르는 부유하게 자라왔다. 부유하게 자란 그는 단 한 번도 갖지 못한 것이 없었다. 어렸을 적부터 성인 채 되기도 전에 원하는 여자며, 원하는 재물, 그 모든 것을 얻었다. 그런 자신이 얻지 못하는 것은 없어야 했다.
물론, 저 여인과 같이 온 사내 중 한 사내가 하필 슈리엘이라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분명 방도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슈리엘이라 할지라도 아직 자신처럼 계급일랑 받지 않은 후계자에 불과하니...
하물며 자신은 영주 대리라는 직책이 있지 않은가? 즉 이곳은 자신의 집이며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돈 살리에르는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낱 여인이, 성조차 없는 하찮은 여인이 정조를 지켜달라는 말을 비웃었다. 오늘 당장 그녀를 탐하리라...
하지만, 슈리엘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긴 한다. 마음에 결의를 내릴 때마다 위험의 경종이 자꾸 울려대며 신경 쓰이게 한다.
분명 스쿨라이 남작 가문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중앙 귀족의 수장 가문이지 않은가? 나아가 하이란에서 가장 총애를 받는 가문이며 하이란의 첫 번째 검이라 불리며 그 명성이 거대한 존재가 일행이라는 것이 꺼림칙함을 남는다. 그렇다고 스쿨라이 역시 중앙 귀족의 일원으로서 제법 큰 가문인데...
고민이 깊어질수록 더욱 프리실라라는 여인을 굴복하고 싶은 지배욕이 비대해져만 간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욕망의 들끓음에 어찌할 수 없다. 이대로 놓친다면, 상사병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만큼 가지고 싶은 여인이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분명 괜찮으리라..
프리실라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여인은 성은 없는 것 같으니 귀족은 아니리라...
슈리엘의 하녀쯤 될까?
하녀라 할지라도 단번에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니, 이번만큼은 한낱 계급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와인의 알코올 때문인지 돈 살리에르의 몽롱하게 풀린 시선이 다시금 프리실라를 눈에 담았다. 아무리 와인을 마셔도 그 갈증이 쉬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제법 강렬하게 남은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눈이 부실 정도로 달빛을 투영한 하얀 피부며 푸른 창공을 닮은 눈동자,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 살짝 큰 키가 흠이라면 흠이겠지만, 그까짓 흠 따위 아무것도 아닌 몸매에 연실 하체에 피가 쏠리게 한다.
오히려 가장 큰 흠이라면 그러한 아름다운 여인이 성조차 없는 평민이라는 점이 흠이 될 것이다. 즉 그러한 흠이 내겐 기회가 되리라.. 아! 어서 정복하고 싶다.
짧은 탄성과 함께 돈 살리에르의 입가에 비아냥 섞인 미소가 함께했다. 한낱 하녀 주제에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는 그녀의 말에 낄낄 웃어댔다.
가증스럽게, 한낱 하녀 주제에 도도하게 구는 그녀를 생각하자니 하체가 움찔움찔 떨릴 정도로 굴욕을 선사해주고 싶어 미칠 것 같다. 처음으로 마음을 홀릴 아름다운 여인의 미모를 일그러트리고 자신의 아래에 앙앙거리며 울게 하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 없다.
과연 어떨까? 그녀의 앞에 수천 금이 쏟아진다면, 여태껏 만나본 어떠한 여인들처럼 순순히 받아들일지도... 그만큼 여인들은 쉬운 존재였다. 귀족의 명예조차 없는 여인을 굴복시키란 누워서 떡을 먹는 것보다 쉽다.
비릿한 웃음이 점점 더 기괴하게 일그러진다. 그러며 닿는 욕망 속에 낄낄 웃어대던 돈 살리에르는 과연 그녀가 얼마나 비싸게 굴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대단하다는 슈리엘 가문은 어찌 하녀도 저리 어여쁜 하녀를 둘 수 있을까? 혹시나 노리개는 아닐까? 그렇기에 몸과 마음을 주었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닐까?
짧게 앓는 소리를 낸 돈 살리에르의 시선이 매정하게 닫힌 문을 슬쩍 보며 중얼거렸다.
흠.. 이미 중고라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봐주기로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문제가 될 테지만, 돈으로 이루지 못하는 것은 없다. 정 뭣하면 슈리엘과 돈으로 그녀를 사면 될 테고 말이다. 한낱 노리개 한 명 때문에, 슈리엘도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을 테다. 아무리 슈리엘이라 할지라도 엄연히 스쿨라이 남작령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중앙 귀족의 후원금의 제법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스쿨라이 남작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 할 존재일 터이니 말이다.
입맛을 다시며 추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돈 살리에르의 입가에 킥킥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그러고는 품에서 꺼낸 하나의 작은 병을 들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신조를 떠올렸다.
원하는 게 있으면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신조, 나아가 후회가 일기 전에, 또는 여러 생각에 휘둘리기 전에 시행하는 점이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이리라..
고작 하루만에 마음을 앗아간 여인을 탐하는 기회는 바로 오늘뿐이라는 생각이 돈 살리에르의 판단력을 흐릿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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