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731화 (731/1,410)

〈 731화 〉 명분

* * *

/////

"으, 으이익! 뭐, 뭐야! 우억!"

갑작스레 치솟는 불길에 화들짝 놀란 돈 살리에르가 옷을 벗는 와중에 허우적거리더니 끝내 육중한 몸이 침대에서 떨어져 흉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며 돼지 멱 따는 소리를 내었다. 불길은 곧 돈 살리에르의 곱슬 머리카락을 반쯤 채웠을 때 꺼졌다.

그는 놀란 마음을 쉬이 진정시키지 못한 채 쭉 찢어진 눈이 놀란 토끼 눈 마냥 동그랗게 뜨며 갑작스레 치솟은 불길에 넋이 나간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하긴 놀랄 수밖에 없을 테다. 아무것도 없던 눈앞에 마치 마녀가 만들어낸 도깨비불 마냥 두둥실 떠오른 불길이 그를 덮쳤으니 말이다. 돈 살리에르는 병적으로 창백해진 안색으로 눈을 껌뻑였다. 심지어 숨조차 쉬기 힘든지 쇳소리 가득한 숨소리는 폐병 걸린 환자처럼 위태롭게 보이기도 했다.

잔뜩 겁에 질린 눈이 파문이 짙어지며 두툼한 입술이 다급히 열렸다.

"저, 저게 뭐야!!"

비명과 같은 뾰족한 목소리가 토해질 무렵,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그 사이로 평상복을 입은 에일린이 한 손에 검을 들어 보이며 옷을 반쯤 걸치고 있는 돈 살리에르를 혐오스럽게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직 속옷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상의는 전부 벗어 던진 채 추잡한 살집이 고스란히 보였고 고동색 정장 바지 역시 반쯤 혁대가 풀려 있었다.

한편 프리실라는 침대 위에 정신을 못 차리며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충분히 앞뒤 상황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모습은 명분을 만들었다. 에일린의 표정이 혐오와 경멸로 물들었고 곧장 돈 살리에르에게 닿아 검을 뻗었다.

화들짝 놀란 그가 한 차례 더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질끈 눈을 감는다. 덜덜 떠는 모습이 조금 전의 앞뒤 가리지 않았던 모습과는 몹시 판이했다.

다행히 에일린의 검은 그의 코앞에서 멈춘 채 더는 나아가지 않으니 추레하게 벌벌 떨며 눈을 뜬 그의 시선이 바로 코앞에 멈춘 서늘한 예기를 풀풀 풍기는 검날과 함께 어느덧 그녀의 옆에 선 불길을 마주하며 숨을 헐떡였다.

"다, 당신 뭐, 뭐야... 부, 불이.. 마법사야?!"

그 순간, 불길이 다시금 그의 코앞까지 이르렀을 때, 파리해진 안색에 돈 살리에르가 벌벌 떨며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뒤늦게 불길 속에 있는 이형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그의 쭉 찢어진 눈이 평소보다 훨씬 더 커졌다. 그때 문밖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돈 살리에르에게 닿았다.

경멸이 맺힌 목소리는 그를 향한 짙은 살의를 풍겼다. 돈 살리에르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더럽고, 탐욕적이며, 욕망에 눈이 멀어 앞뒤 분간 못 하는 돼지 새끼.. 지금 모습이 딱 그 짝이구나."

신랄한 욕설에 험상궂게 일그러지는 그의 시선이 에일린 너머 뒤로 향했다. 그 앞에 유진과 마구엘이 분노로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이 마주했을 때, 돈 살리에르는 마치 죽음의 사신을 마주한 것 마냥 핏기가 가신 안색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비대한 살결이 떨릴 정도로 몸을 떨었다.

유진은 오만할 정도로 눈을 부릅뜬 채 돈 살리에르를 굽어봤다. 분노로 점철된 시선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끙끙 앓는 프리실라를 슬쩍 보고는 더욱 차갑게 굳은 시선 속에 주먹을 한껏 움켜쥐니 뼈마디가 뒤틀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숨막히는 적막감 속에 돈 살리에르가 제대로 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그에게 유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너... 아니 스쿨라이 남작은 교단과 어떠한 관계가 있지?"

////////

"아렌 마을의 수질을 오염시킨 범인도 네가 한 것이지?"

"무, 무슨 소리 그렇지 아.. 않아!"

창백한 안색으로 소리쳤으나 티가 날 정도로 동요한 얼굴에 전처럼 본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뱃살이 혐오스럽게 흔들리며 주섬주섬 반쯤 헐벗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한편 끙끙 앓고 있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프리실라의 곁에는 에일린이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아 보였다. 유진의 굳은 시선이 프리실라에 이르렀다가 다시금 돈 살리에르에게 닿았다. 조금 전보다 더 분노로 점철된 표정에는 그를 향한 살의가 가득 묻어 나왔다.

특히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에는 돈 살리에르를 당장 죽여야 한다는 갈등이 새겨져 있었으나 적어도 그에게 들어야 할 말이 너무나 많았다.

힘겹게 옷을 추스린 돈 살리에르가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주변에 맴도는 로실라와 더불어 엘리사의 경멸 어린 시선 덕에 흐르는 서늘한 바람까지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유진이 말했다.

"일단 해독제부터 내놔."

"마, 만들어 놓지 않았어... 하, 하지만, 날 놔주고 이번 일을 좋게 넘어가 주면 해독제를 주겠어. 어떤가? 이번 일을 없었던 일로 해준다면.."

그때 유진의 손이 그의 뺨을 사정없이 쳤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둔탁한 음과 함께 그의 육중한 신형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입술이 부르텄는지 피가 흥건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맞아보지 않았을 테다. 그렇기에 다가오는 충격이 제법 큰지 쭉 찢어진 눈동자가 유달리 커져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한 어벙한 표정마저 혐오스럽게 느낀 유진의 시선이 경멸을 담아 그에게 닿았다. 이어 멱살을 움켜쥐자 그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지금 네가 한 짓이 어떤 짓인데 없던 일로 되길 바라는 거야? 지랄하지 마."

매정한 목소리와 함께 유진의 시선이 다시금 프리실라에게 이르렀다. 여전히 헐떡이는 숨과 함께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자면 위태롭게 보였다. 유진의 시선은 니플하임을 부르러 간 마구엘이 어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시금 돈 살리에르에게 닿았다.

그 순간,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제법 많은 수의 인기척이 다가옴을 느꼈다. 곧 요란 법석한 소음이 문앞에 이르렀고 몇 초 지나지 않아 문짝이 부서지며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찌나 흉흉한 기세가 가득한지 두꺼운 하프 플레이트 갑옷에 무거운 검과 창을 착용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사이로 유독 모습이 눈에 띄는 이들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의 출현에 겁에 질렸던 돈 살리에르의 표정이 단번에 환해지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했다.

의기양양한 모습이 너희는 곧 끝났다는 오만함을 내비치니 극심하게 짜증을 느낀 유진의 손이 한 차례 더 그의 뺨을 쳤다.

"컥컥!"

둔탁한 음이 들릴 정도로 매정한 손찌검은 일말의 자비조차 없었다. 기괴한 신음과 함께 돈 살리에르가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병사들이며 기사로 보이는 몇몇 역시 경악에 찬 모습을 했다. 그러한 모습 속에 유진의 차갑게 식은 눈빛이 병사를 이끌고 온 이들에게 닿았다.

/////

돈 페르나치오와 함께 가지 않은 채 저택을 지키던 선임 기사가 한 명 앞으로 나섰다.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 병사들을 이끌던 모습을 보았고 돈 살리에르의 곁에 병사나 기사 대표로 옆에 선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분명 남은 기사와 병사들을 이끄는 선임 기사가 분명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유독 나이가 들어 보였다. 눈가에 유독 눈그늘이 짙은 사내였으며 어깨까지 내린 흰머리는 살짝 떡이 져 있었다. 그는 투구는 착용하지 않았다. 복장 역시 다른 이들보다 더 화려한 복장에 스쿨라이 남작령을 뜻하는 밀 모양의 문장의 배지가 어깨에 매단 망토에 걸려 있었다.

처음 들어서자마자 당황한 그는 손에 검을 쥔 채 지금 상황을 이해하려 무진 애를 쓰면서 간신히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가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아무리, 슈리엘 가문의 후계자라 할지라도 어찌 이리 무례를 보이는 겁니까?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면? 어쩔 텐가?"

걸걸한 목소리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보이니 유진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그러고는 바닥에 고통의 충격에 벗어나지 못한 돈 살리에르를 슬쩍 보았다.

척 보아도 한 번도 체벌이 없이 자랐을 연약한 사내였다. 전형적인 온실 속 화초로서 천둥벌거숭이로 자랐을 망나니가 분명했다. 자신의 집이라면, 감히 더 높은 계급의 사람에게까지 욕망을 내비칠 무식할 정도로 용기가 가상한 후계자를 멸시에 찬 눈으로 보았다.

돈 살리에르를 지나 프리실라에게 닿았고 다시금 앞선 기사에게 이르렀다. 보며 유진이 말했다.

"한낱 기사 따위가 슈리엘 가문의 후계자 앞에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채 칼부터 들이미나? 스쿨라이 남작의 기사는 영주 대리도 그렇고 예의란 모르는 군, 근본일랑 없는 남작의 탓일까? 아니면 스쿨라이의 근본이 그러한 탓일까? 심히 의심스러운 상황이야. 이름부터 밝히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네 늙은 기사여."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