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5화 〉 패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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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이 능청스럽게 웃었다. 그 모호한 웃음 속에 전의를 알 수 없었던 마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으나 곧 새로 나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애를 태우듯 말을 아꼈다.
맥주잔의 반절을 비웠을 무렵 그는 한 차례 더 시원하게 트림을 해대며 마침내 말을 덧붙였다.
"목표의 최우선 사항은 어셉터, 나아가 목표물을 납치, 혹은 죽음.. 흠.. 하지만 노리는 이들이 많고 선수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이왕 이렇게 된 거 굳이 귀찮게 생각하는 것보다는 무식한 방법이 간혹 최고일 때가 있는데 말이야."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마리가 심각하게 되묻자 쿤이 껄껄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더니 뒤로 넘긴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말했다.
"사실 여러 계책을 세우긴 했지만, 아직 확실한 정보가 없어서 말이야. 제대로 이거다 할 수 있는 건 아직 없어, 즉 정보가 아직 부족하다는 거지. 만약 이대로 정보가 부족하면, 그냥 무식하게 일을 진행하는 것이 어쩌면 더 나은 방법이 될지도 몰라.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쿤의 말도 안 되는 자신감에 마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아.. 정보는 우리 쪽에서 계속 조달해 줄 테니 부디 일은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아무리 당신이라도 교단에서 좋게 보지는 않을 거야."
"그러라지!"
여전히 호탕하게 웃던 쿤이 자리에 일어섰다. 그러고는 마리의 등을 몇 차례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대신 자네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주어야만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거야. 일단 본래의 계획대로 움직이다가 자네가 주는 정보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하지, 일단 하이란이며 프레이아에서 보낸 암살자들의 위치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확실한 목표가 무엇인지 내게 전부 말해주게 세세하게 말이야. 일단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어."
말을 끝으로 낄낄 웃어대던 쿤은 여전히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난장판인 주점을 요리조리 피해 바깥으로 향했다. 한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리는 무언가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음에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보다 셀리엘의 암살 부대가 지금으로서는 득이 될지 오히려 방해꾼이 될지 가장 큰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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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각, 달이 높은 밤하늘 별들 사이 그 어느 때보다 동그랗게 차오른 시간이었다. 하이란의 황비 아리아 하이란은 궁전 테라스에 놓인 탁상에 앉아 달빛을 보며 앞에 놓인 편지를 읽고 있었다. 편지지에는 딱히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았으나 아리아는 발신자가 없는 편지를 거리낌 없이 읽어나갔고 곧 입가에 불만으로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10분여가 지났을 때, 그녀가 읽은 편지를 다시 편지 봉투에 넣고서는 슬쩍 방안을 보았으나 방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는 짧게 손가락을 튕기자 놀랍게도 마찰음과 함께 편지 봉투에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마법과는 조금은 궤를 달리하는 힘이었으나 그녀는 그러한 힘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아리아는 불꽃이 인 편지 봉투를 망연히 보며 점점 검게 물들어가는 편지 봉투를 보았다. 불꽃이 점점 편지 봉투를 좀먹으며 불길이 커졌고 곧 부는 바람에 춤을 추듯 움직이며 그을린 편지 조각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10초도 되지 않아 편지 봉투는 완연하게 타 잿가루만 남았다. 잿가루는 곧 여름날 후끈한 열기를 담은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자 아리아의 시선이 동그랗게 뜬 달에 이르렀다.
그녀의 입가에 짜증 어린 한숨이 토해졌고 곧 획 일자로 굳어진 입가에 바드득 바드득 이가 갈리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잔뜩 분노한 그녀는 평소의 인자하고 도도한 모습과는 괴리가 느껴질 정도로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흰색 고급 진 원목 의자의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자 엷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분노에 차 화를 삭이던 그녀가 벌떡 자리에 일어서더니 테라스 난간에 손을 얹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때보다 차갑게 식은 표정이 갈피를 잃었다. 그때 그녀가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확실히 그 사람과는 다르네... 한 명은 확실, 의심 정황은 두 명, 총 세 명이나 된다고? 확실히 한 사람만 좋아하던 그와는 달라.. 너무 다르네.."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아리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스름하게 맺혔으나 곧 웃음기가 사라지고 그녀를 보았던 이들은 한 번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갔다. 하물며 평소 순수함을 담았던 눈빛이 날카롭고도 사납게 변하며 평소의 그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바득바득 뼈마디가 뒤틀리는 소리가 이어지며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벌써 더러운 꼬리가 잔뜩 붙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군. 아니.. 내가 너무 늦은 것일지도 모르겠어. 엄연히 공작 가문의 후계자니 어찌 보면 당연할 테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사납게 뜬 눈가에 엷게 눈그늘이 져 있었다. 그녀는 며칠 간 편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 아이를 본 후,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넋을 잃을 정도로 떠오르고는 했다. 누군가 대화를 나누든, 혹은 남편과 대화를 나누든, 아이들과 같이 식사하는 중에도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자꾸만 넋을 잃게 했다.
도통 집중할 수 없었다.
절절하게 사랑했던 페르르모와 똑 닮은 그를 가지고 싶어 미칠 것 같다. 타인으로서 채워지지 않은 욕망이 내면 깊은 곳에 응어리져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러다가는 숨이 턱턱 막혀 끝내 죽을 것만 같다.
필요했다. 그가 간절히 필요하다.
지금 이 답답함을 해소해줄 그가 필요했으며 할리온으로 채워지지 않은 욕망을 채워줄 그가 당장 필요했다. 짜릿한 쾌락을 느끼고 전율을 느끼며 황홀경으로 인도해주는 이... 내 안의 괴물을 잠재워줄 이가 필요했다.
평범한 사내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 내면의 괴물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 그는 분명 그러하리라..
아직 한낱 촉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이러한 촉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내 안의 괴물을 잠재워줄 이는 오직 그뿐이라는 육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웃음이 내 가슴에 새겨지기를 바랐다.
다른 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을 그가 해결해주리라 여긴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 이미 여인이 있다고 하니 이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까?
감히...
움켜쥔 주먹에 뼈마디가 뒤틀리는 섬뜩한 소리가 공허한 밤하늘을 울렸다. 더욱이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굳게 다문 입술도 똑같이 떨린다. 분노, 질투, 원망 여러 감정이 내면을 가득 들어차며 소용돌이치듯 전신에 고루 퍼졌다. 숨이 거칠어지며 점점 더 질투가 쌓여만 간다.
더욱이 후회도 일었다.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을까?
하필...
어렸을 적부터 탐욕과 질투가 심했다. 무엇보다 그렇지 않은 얼굴, 거짓된 순수함 속에 괴물처럼 자라난 탐욕을 숨길 수 없었다. 바라는 것은 뭐든 가져야 속이 시원했다. 언제고는 이러한 탐욕 덕에 엘리시움에서 수습 사제로 있을 때에도 제법 많은 문책을 듣기도 했고 몇 번이고 회개 기도도 자주 했다.
허나 한낱 회개 기도로는 점점 자라나는 괴물을 막을 수 없었다.
질투, 욕심은 점점 더 거대하게 변했고 그의 지배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며 생각했다. 내가 가지지 못한다면, 상대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욕심마저 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내를 사랑했다. 자신과 똑같은 수습 사제였다. 특별한 사내는 전혀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은 핏줄, 평범한 핏줄에 평범한 사제, 외모도 평범했다. 감히 그런 사내를 내가 좋아해주었거늘....
감히 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 터무니없게도....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했는데,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택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매정하리만큼 단 한 번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이리도 원하는데!
마침내 내면의 괴물이 눈을 뜬 것이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른 이도 가질 수 없게 망가트려야 한다고 속삭였다.
인정했다. 받아들였다. 내가 가질 수 없으면 다른 이들도 가질 수 없어야 한다는 괴물의 속삭임을 몸속 깊은 내면에 받아들였다. 철저하게 망가트리고 짓밟아 나의 존재를 각인시켜야 했다.
오직 나만 바라볼 수 있도록... 평생을 후회하도록...
그런데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지 않은가? 어찌 이리도 운명이 얄궂은지 모르겠다.
하물며 내겐 이미 가족이 있었다. 남편을 가진 여인으로서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고 조신하게 행동해야 하는 황비로서의 마음가짐, 행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알고 있다. 내 행동이 할리온의 얼굴이 되기도 했으며 간혹 나라 전체의 품위를 정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내면의 괴물이 그를 만나는 순간 눈을 뜨며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귓가에 음험하고도 불길처럼 뜨거운 목소리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를 가지고 싶다.
아직 잊지 못했다. 나를 버리고 끝내 다른 이와 함께한 죄로 망가진 그처럼, 그 아이가 내 것이 아니라면 똑같이 망가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했다. 당연한 것이다.. 몹시도 당연한...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니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허나 어떻게 가져야 할까? 더욱이 그 아이는 왜 프레이아로 가는 것일까?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의심이 가득 찬 눈빛이 공허한 테라스를 훑었다. 곧 그녀는 곧장 테라스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가 화장대 옆에 놓인 고급진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편지를 꺼내 잉크 통에 담긴 깃펜을 들어 보였다. 그러며 생각했다.
일단 슈리엘 가문에 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적어도 가문에 이르러 무슨 연유로 근친혼을 준비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무리슈엘라나 엘리시아라는 년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무언가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힌 그녀의 시선이 다시 고급 편지지에 닿았다.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깃펜을 들어 슈리엘 가문에 들르고 싶다는 편지를 작성했다. 채 10분도 필요치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면의 괴물은 몇 번이고 질투와 탐욕을 뿜어대고 있었고 응어리진 답답함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쉽게 손에 넣으면 재미없지 하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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