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749화 (749/1,410)

〈 749화 〉 패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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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요. 요정을 다룰 줄 안다면, 확실히 휴센의 전속 요정사가 돼 귀족이 될 수 있지요."

"네. 그래서 휴센으로 가려고요."

찻잔은 흰색에 금색 물결 모양으로 무척 고급진 찻잔이었고 그 안에 담긴 붉은 색 꽃차 역시 비싼 차였다. 아를란은 고급스러운 찻잔을 양손으로 들고서는 모락모락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차를 후후 불고서는 천천히 홀짝였다.

차는 여태껏 아를란이 마셔 보았던 차보다 더 향기로웠다. 대신 맛은 살짝 씁쓸했으나 깔끔하고 담백하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했다.

아를란은 제쉬 오언이 건넨 차가 무슨 차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쉬이 맛 볼 수 없는 차인 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또 다른 무언가가 담겼을까? 내면에 가득 들어찬 알 수 없는 답답함을 조금은 해소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를란은 한 차례 더 차를 후후 불어 홀짝이며 응어리진 답답함을 조금씩 해소했다. 그러며 제쉬 오언의 눈치를 보았다.

언제나 검은 드레스를 입은 상태로 싱긋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면 인자한 할머니와 한가한 오전을 보내는 것 마냥 편안했다. 나아가 건네는 다정한 미소에 아를란은 이러한 미소가 있다면 조금 더 학교에 있고 싶었으나 그러한 안일함을 애써 억누르며 오히려 더 확고한 마음을 품어 말했다.

"저는 반드시 휴센으로 가서 귀족이 되려 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차를 홀짝이던 제쉬 오언이 유리 받침대 위에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올려놓은 뒤 대답했다.

"흠... 그래도 아쉽지 않나요? 1년을 잃긴 했지만, 아를란 학생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어요. 만약 제대로 된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많은 것을 깨우치리라 여기고 있어요. 그리고 다음 학기 그러니까 이번에 2학년으로 올라가는 학생의 담당 선생은 이번 졸업반을 끝으로 발레린 에페엘 선생이 2학년을 맡기로 했어요. 분명 아를란 학생에게도 좋은 선생님이 될 테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리라 여겨요. 그리고 분명 아를란 학생은 검술로도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제가 프리실라 선생님이나. 에일린 선생님처럼 재능이 있을까요?"

오히려 아를란이 묻자 제쉬 오언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갑작스런 두 선생이 비교 대상으로 오르자 진중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제쉬 오언으로서는 쉬이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다가오는 대답이 없자 아를란의 입가에 처연함이 어스름하게 맺히더니 끝내 고개를 저으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그 두분만큼 검술에 소질이 없어요."

"비교 대상이..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너무 높은 것은 아닐까 싶군요. 흠.. 그들이 너무 특출난 것일 뿐이지 저는 분명 아를란 학생도 그만한 재능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검술로서는 가망이 없어요. 가끔은 확실하게 내 주제를 알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 역시 용기이기도 하죠. 저는 지금 용기를 내고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생각해요. 검술보다는 요정의 힘을 더 극대화 시키는 것이 더 제 삶을 나아지게 하리라 생각해요."

아를란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확고함을 내비쳤다. 그러며 보이는 초조함은 아를란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것 마냥 '모 아니면 도' 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제쉬 오언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뒤늦게 아를란은 단순히 검술 재능의 회의감만으로 학교를 자퇴하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아가 귀족이 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음이 분명했다.

무언가 더 근본적인 이유일 테다. 지금의 그녀를 조급하고 안달 나게 했으며 소아렌에 있는 이유에 회의적인 마음을 느끼고 끝내 요정을 이용해 휴센의 귀족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물며 이미 결론을 내린 아를란의 마음은 쉬이 굽히지도 않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만큼 단호하고 결의가 가득한 목소리는 쉬이 굽히지 않은 단단한 돌처럼 느껴졌다. 대신 적어도 이유라도 듣고 싶은 제쉬 오언이었다.

물론 아쉬움을 감출 수 없어 미련이기도 했다. 그만큼 아를란 역시 그녀가 말했던 이들과 재능을 비교한 것은 터무니없다고 여기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재능이 있다는 평가가 그녀의 학생부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미련이 남은 제쉬 오언의 입가에 맺힌 한숨이 토해졌다. 괜스레 앞에 놓인 차를 홀짝였다. 그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를란을 훑어 보며 넌지시 이유를 물었다.

"이유가 뭘까요? 왜 검술로서 재능이 없다고 느끼고, 왜 그렇게 조급해하는지 제게 말해줄 수 있나요?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아를란 학생이 검술적 재능의 회의감보다는 다른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당장에 학업을 멈추고 요정을 이용해 휴센의 전속 요정사가 되려는 이유, 나아가 아를란 학생이 반드시 귀족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이자 지금 당신을 조급하게 하는 고민을 내게 말해줄 수 있나요?"

고민하는 걸까?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아를란이 머뭇거린다. 그럴수록 제쉬 오언은 학교 내부 일이 아닌 다른 이유임을 확신했고 충분히 차를 홀짝이며 그녀의 머뭇거림을 존중하며 재촉하지 않았다.

제법 오랜 정적이 이어졌다. 그때까지 제쉬 오언은 차를 홀짝였고 금세 찻잔이 비어 새로운 차를 보충했다. 그때까지 아를란의 대답을 차분하게 기다렸다. 아를란은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하물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것에 제법 골머리 쓰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결연해진 표정 속에 조금 더 확고한 마음이 새겨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침내 10분여가 더 지났을 때, 아를란이 시선을 들었다. 확고한 의지가 서린 눈빛에 제쉬 오언은 그녀의 마음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구나 생각했을 무렵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좋아하는 이와 비슷한 위치가 되려면, 저는 반드시 귀족이 되어야 해요. 물론.. 그래 봤자 말도 안 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뛰어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요정이 있다 한들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계급을 얻게 되는 것도 아니겠죠. 그래도 하나하나 나아가고 싶어요. 그와 비슷한 수준에 걸맞게, 그렇기에 먼저 휴센의 전속 요정사가 되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어요. 그곳에서 요정학에 대해서 더 많은 배움이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면 언젠가 그 발치에 닿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제법 긴 말을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한 아를란은 살짝 목소리가 상기 돼 있었고 뺨도 불그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그러고는 조금 식은 찻물을 입안에 털어 넣어 거칠어진 숨을 진정시켰다.

한편 제쉬 오언의 머릿속에 언제나 아를란을 도와준 한 아이를 떠올렸다. 그리고 아를란이 했던 말을 곰곰이 대입했을 때, 너무나 당연하게 한 사내만 떠올랐다. 지금은 이곳에 없는 아이, 아를란의 말마따나 평범한 요정사와는 너무나 거리감이 있는 계급을 가진 아이....

아를란이 흠모하는 아이는 그녀의 말마따나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 쉬이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극심한 차이가 있었다. 어쩌면 아무리 발버둥친다 한들 근본적인 이유로 차이를 좁힐 수 없을지도 모르나 아를란은 그러한 점을 알면서도 도전하려 했다.

흠모하는 정인의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이러할 진데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제쉬 오언은 애초에 그녀의 결심을 꺾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음을 깨닫고 인정했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이란 삼자가 왈가왈부한다 한들 쉬이 바꿀 수 없는 것이 마음이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사랑이 담긴 마음은 더더욱 삼자가 어찌할 수 없음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금 아를란의 빈 찻잔에 차를 채워준 제쉬 오언이 말했다.

"그렇군요."

"네.. 그러니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제쉬 오언 선생님, 트루먼 교장 선생님 그리고 절 도와준 많은 분들 모두.. 하지만 저는 반드시 귀족이 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소아렌에서 나가야만 해요."

단호한 의지는 굽히지 않으리란 확신이 서려 있으니 결국, 제쉬 오언으로서 나아가 소아렌에 선생과 제자의 입장에서 그녀에게 해줄 것은 응원이 전부였다.

미련과 아쉬움에 짧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를란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러한 모습을 보며 제쉬 오언은 한 차례 더 차를 권하니 아를란 역시 후련한 얼굴로 차를 한 모금 해 입술을 축였다.

"당신의 도전을 응원하겠어요. 아를란 하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각오해야 해요. 나아가 휴센의 전속 요정사가 된다면, 어쩌면 자유롭지 않은 삶의 후회할 수 있어요. 그렇기에 한 국가의 소속 마법사나 기사 혹은 요정사가 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는 것이고요."

"충고 감사합니다. 교감 선생님 하지만, 전 각오하고 있어요. 그저 조금만 더 가까워진 채 멀리서만 그를 봐도 좋아요. 대신 그와 비슷한 위치에 서고 싶고 이대로 망연하게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제가 직접 그의 발치에 따라가고 싶어요."

"그렇게 마음이 확고하니 어쩔 수 없군요.."

담당 교사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교직에 있는 선생으로서 제쉬 오언은 제자의 도전이 부디 성공적으로 혹은 만족할 정도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었다. 그러며 찻잔을 들었고 함께 차를 기울이며 성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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