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7화 〉 프리실라 드왈즈 슈리엘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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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유진의 방이었다. 프리실라와 에일린이 여전히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에일린은 여전히 사라 드 셀리엘의 잔혹한 모습에 잔뜩 화가 난 상태로 홀로 씩씩거리고 있었고 프리실라는 여전히 두려움과 공포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지독한 슬픔이 그녀의 마음을 들끓게 했다.
잔혹한 여인의 진실이, 그녀의 목소리, 단어, 문장 하나하나 비수가 돼 프리실라의 가슴에 마구 파고들고 있었다. 무자비하며 냉혹한 비수는 전부 그녀의 마음에 균열을 일게 했고 공포와 슬픔을 느끼게 했으며 무너지게 했다.
알고 있었다. 사라 드 셀리엘에게 프리실라라는 존재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을, 더욱이 이제는 그러한 도구조차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셀리엘 가문의 죄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혈육이었다. 피로 이어진 사이였거늘, 쓸모없어진 도구를 대하는 그녀의 잔혹함은 프리실라를 더욱 절망으로 이끌었다.
결국, 유진 역시 둘을 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아무도 홀로 두고 싶지 않았던 유진과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두 여인의 바람에 어느샌가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위, 무거운 침묵이 제법 오래 이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양옆에 누워 두 여인에게 정반대로 느껴지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한 명은 불만과 분노를 가시지 못한 채 한숨을 푹푹 내쉬길 반복했다. 한 여인은 지독한 슬픔에 헤어나오지 못하며 몰래 눈물을 쏟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낀 유진은 복합적인 감정 속에 사라 드 셀리엘의 냉정함을 상기하며 씁쓸함을 느꼈다.
팔 베개를 해주던 상태에 둘을 잡아끌어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각기 다른 숨결이 양쪽 가슴에 닿아 흐드러졌다. 그때 마침 에일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유복한 가족의 품에서 행복하게 자랐을 에일린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유진 역시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자주는 아니더라도 귀족 가문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려는 일, 혹은 같은 혈육이 서로 죽여 권력을 쟁탈하는 일, 유독 궁전에서도 자주 있는 일이기는 했다.
보통 후계자 싸움 때문이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지는 후계자 간의 권력 다툼, 가족 간에 이어지는 알력 다툼, 그럼에도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 왕은 후계자 싸움에 관여하지 않았던 일들도 간혹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죽여 왕권을 찬탈하려는 일부터, 부모가 자식을 죽이려는 일 역시 종종 있었다. 물론 지금 시대에 이르러 많이 사라졌다 한들, 엄연히 명맥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버젓이 눈앞에 벌어지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사라 드 셀리엘은 당당했다. 오히려 아쉬워했다. 일말의 변명조차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진실된 목소리 속에 매정함은 산맥의 만년설보다 더 차갑다. 유진 역시 그러한 모습을 상기하자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연실 창문을 덜그럭거리게 하는 폭풍보다 더 난폭했다. 납덩이를 삼킨 것 마냥 가슴이 무거워졌다. 그 사이로 불쾌감이 가득했다. 그런데 당사자는 어떨까?
연실 프리실라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들지 않고 있었다. 가슴팍이 축축하다. 어떻게든 달래주고 싶으나 그럴 수 없었다. 주제넘게 조언할 수 없었다. 그저 이렇게 함께 한 침대 위에서 가슴을 빌려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녀는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물며 유진 역시 그러했다. 이렇게 모두와 함께 있지만, 사라 드 셀리엘과 한 지붕 아래 있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어서 슈리엘이 있는 도시 아크네로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그래도 다행히 대화는 잘 끝난 상태였다. 자신이 직접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서신에 보냈던 수많은 의문, 교단의 존재부터 시작해, 페르난도가 꾸미는 일 등등, 어느 정도는 풀렸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의심도 함께했다. 페르난도가 꾸미는 일에 대해서 알게 된 경위를 유독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더욱이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비밀을 알았으니 더욱 의심했으나 차마 회귀했다는 비밀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아직 사라 드 셀리엘에게 회귀에 관한 이야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것을 제외한 교단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앞으로 그들의 동향까지 전부 얘기를 끝냈으나 터무니없는 이야기 속에 호의적이던 페르난도까지 쉬이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파생된 여러 의문은 아직 남아 있었으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한편 사라 드 셀리엘은 대화에 진중하게 끼지 않았다.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간혹 유난히 날카롭게 뜨인 눈빛에 담긴 알 수 없는 기세가 스멀스멀 내면에 숨기고 있는 비밀을 들춰 보는 듯했다.
유진은 그녀의 시선에 불쾌감을 느꼈었다. 마치 심연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녀의 눈을 마주하면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프리실라를 죄인 혹은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며 눈길조차 주지 않은 점이 가장 불편했다. 그나마 가문의 가주 페르난도만이 어떻게든 무거운 분위기를 타도하려 살짝 고무된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기도 했으나 한 번 무너진 부위기는 쉬이 돌아오지 못했다.
이렇듯 페르난도는 제법 호의적인 모습이었다. 간간이 프리실라를 향해 애틋한 눈빛을 보이기도 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이미 무너진 마음은 공황 상태에 빠져 아버지가 보내는 시선조차 느끼지 못했다. 적어도 저택에 사람 중, 나아가 셀리엘 가문의 핏줄 중에 프리실라를 반기는 이들도 있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어찌 보면 이 저택에 가장 강한 지위와 지배력을 행사하는 이가 노골적으로 프리실라를 무시하니 그 누구도 저항하지 못하는 듯했다.
한숨과 함께 그녀의 이마에 한 차례 더 입술을 포갰다. 그러며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며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에일린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다 같을 수 없는 법이니까요. 모두의 부모가 다 같을 수 없는 법이고, 낳았다고 부모가 될 수 없는 법이기도 하죠..."
"여기서 나가고 싶어. 당장... 당장 나가고 싶어 유진.."
마침내 프리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덩달아 에일린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나도! 한시라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아. 저 여인과 한 지붕 아래에 있고 싶지 않아! 우리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해? 내일 당장 돌아가면 안 돼?"
"글쎄요. 일단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네요. 일단, 프리실라 누나와 저의 관계를 더 확고하게 다져야겠죠. 무엇보다 누나를 노리는 다른 분에게도 확실하게 알려야 할 테고 말이죠. 앞으로 지금보다 더 셀리엘 가문은 시끄러워질 거예요. 그런데 당사자인 제가 갈 순 없겠죠. 그렇다고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물론 그것 외에도 이곳에 남은 일도 좀 있고요."
"하아... 그렇다면 저어도 며칠은 여기에 더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며칠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치를 떠는 에일린의 모습에 유진이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물며 프리실라 역시 며칠 더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은지 옷깃을 쥔 손이 떨리며 깊은 나락으로 추락한 감정에 파문이 다가왔다. 그럴 때마다 유진의 입가에 깊은 한숨이 흘렀다. 그럼에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온 이유는 아직 남아 있었다. 오히려 이제 막 시작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때 프리실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시울 사이 언제나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푸른색 눈빛이 탁하게 물들어 있었다. 짙은 슬픔이 담긴 눈빛에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고는 했다. 유진은 그런 그녀를 마주 보며 천천히 이마에 입술을 포개며 불안한 그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달랬다. 다행히 입가에 힘겨운 미소가 걸쳤다. 그러며 조금 더 가까워지고 한 차례 더 입술을 포개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매일 곁에서 잊게 해줘.."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그녀가 조금 더 절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 너무 무서워.. 이곳에 있다는 것 자체가 무섭고.. 너무 답답해 죽을 것 같아. 심지어 너무 슬퍼... 지금 이 감정 잊게 해줘.. 이대로는 절대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아서 그래.. 그러니까... 제발.. 잊게 해줘. 여기에 있을 때마다 공포를 잊을 수 있게 날 좀 도와줘."
두려움과 공포가 담겨 간절한 목소리는 호소였다. 어느덧 붉어진 눈시울에는 끝끝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유진의 가슴에 뚝뚝 떨어졌다. 어찌나 안쓰러운지 모르겠다. 하물며 그 눈물이 얼마나 무겁고 뜨거운지 모르겠다. 그녀가 불쌍했다. 하물며 그녀에게 이곳이 얼마나 두렵고 공포로 만연한 공간인지 알 수 있었을 때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뻗은 손으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곧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쌓여가는 눈물이 유진의 가슴에 점점 차올라 무겁게 짓눌렀다. 끌어안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부디 그녀가 두려워하지 않게, 무섭다고 느끼지 않도록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때 마침 에일린도 손을 뻗어왔다. 어느샌가 셋이서 서로 끌어안은 자세가 되었을 때, 그제야 프리실라의 떨림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서로 다행이라 여겼고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북부의 칼바람 앞에서도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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