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844화 (844/1,410)

〈 844화 〉 마지막 벌, 그리고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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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의 무덤덤한 시선이 슈른에게 닿았다. 그에 반해 붉으락푸르락 된 슈른의 표정에는 간신히 분노를 참는듯하나 억누르지 못한 채 조금씩 새 나오고 있었다. 애써 꾹 눌러 참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쿤은 그런 슈른의 반응을 딱히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여유로웠다.

실패에 연연하지 않은 발걸음은 가벼웠고 태연자약함은 슈른의 심기를 살살 긁어대고 있었다. 늙고 추레한 슈른의 분노 따위 안중에도 없는 듯 시큰둥하기도 했다. 오히려 오만한 눈빛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주변을 훑으며 휘파람까지 부는 여유를 부렸다. 마침 쏘아진 휘파람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텅 빈 공동이었다.

폭이 넓어 끝과 끝이 다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간간이 주변 곳곳에 세워둔 기다란 장대 끝에 피워 놓은 횃불이 스며드는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거리고는 했으나 그림자가 더 깊었다. 서늘한 바람은 곧 동굴과 동굴 사이에 스며들어 기괴한 울음처럼 들리기도 했다. 유난히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마침 누군가에게 팔려오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빼앗은 아이가 들어찰 공간에 미리 그들의 울음이 예행연습을 하는 듯하다.

공동은 애초에 자연스럽게 난 동굴을 조금 더 보수를 이어가며 만든 곳이었다. 몇 년간 교단에서 대대적으로 준비한 곳이었으며 헬리글에 투자한 돈과 인적 자원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근에 이르러서야 쓸모 있을 정도로 완성했다. 아니 아직 이곳을 사용할 이들이 없으니 미완성이라 할 수 있을 테지만. 곧 완성이었다. 나아가 북부의 바람이 쉬이 스며들지 못하게 제대로 잘 짜여진 공동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공동은 추웠다. 오히려 바깥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는 듯했다. 매일같이 부는 지긋지긋한 눈보라는 없으나 귀곡성처럼 들려오는 바람은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심지어 천장에는 곳곳에 구멍이 나 눈발이 조금씩 흘러내리고는 했었다. 바닥에도 그러했고 동굴 벽면에도 구멍이 나 있었다. 쿤은 저 구멍 속에 아이들을 집어넣으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며 드리워진 지금의 공동을 메인 훈련장으로 사용하면 되리라 생각했다.

구상은 대충 끝냈다. 쿤은 느긋하게 구멍들을 살폈으며 부는 바람, 퀴퀴한 곰팡내 어디선가 녹은 눈이 만들어낸 물방울 소리를 들었다. 그때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이 분노에 꿈틀꿈틀 움직이던 슈른이 말했다.

"실패했음에도 뻔뻔하고도 당당하군."

쿤이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사실 조금은 억울하기는 하더군.. 제대로 된 정보가 없었어. 심지어 있는 것조차 부실했고 시간은 촉박했어. 특히 다른 암살단이 더 있다는 정보는 전혀 없었더군? 그들이 뜻하지 않게 방해했으니.. 확률은 5대 5였을 뿐이야. 그것도 많이 쳐준 거야. 사실 그것보다 적었다고 할 수 있어. 하이란 지역에서 슈리엘 가문의 후계자를 납치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것도 우리의 정체를 최대한 숨겨야 해 따로 행동하느라 명령 체계도 부실했지, 그러므로 성공 확률은 더욱 희박해져."

"그래서 이리도 당당한가? 자신감을 내보인 건 자네였는데 말이야?"

쇳소리 가득한 슈른의 목소리가 간신히 육두문자를 참는듯하다. 대신 목소리 끝이 분노가 무겁게 실려 바들바들 떨렸다. 그럼에도 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칼날처럼 쏘아지는 분노 속에 날 선 눈빛이며, 목소리 끝에 실려 다가오는 파문이며 심지어 가만히 두지 못하는 발끝이 연실 동굴 바닥을 툭툭 치며 내는 불쾌감 가득한 소리조차 전부 안중에 없었다.

말마따나 당당했다. 서로 다른 세상인 것처럼 쿤은 여유로웠고 슈른은 분노했다. 쿤은 오히려 슈른을 기만하는 것처럼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는 행동에 슈른의 화는 끝끝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분노한 교주의 전언대로 당장 쿤의 무릎을 꿇리고 그에게 목을 베 실패의 본보기가 어떠한지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슈른은 교주와는 달랐다.

최대한 차분하게 화를 억누르며 들숨과 날숨을 이어갔다. 그는 지성인답게 화를 참을 수 있었다. 언제나 차분하고 냉철한 성격의 사내였다. 그렇다고 자비롭다는 건 아니었다. 교단에서의 실패라 함은 그만한 대가를 따라야 했다. 즉, 쿤은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그것이 곧 교주의 전언이기도 했다. 슈른은 교주의 전언을 상기했다.

노발대발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처음에는 쿤의 목을 베어 실패의 표본으로 삼으라 했다. 그러나 슈른은 처음으로 교주의 말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아직 교단에서는 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근래 화를 참지 못하는 교주를 간신히 뜯어말렸다. 대신 그에 합당한 처벌을 내리겠다며 부탁했다. 슈른은 그에게 지금 어떠한 처벌이 어울릴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떠한 벌이 저 콧대 높은 암살단의 대장이자 이제는 헬리글의 총교관의 콧대를 꺾어버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될 수 있다면 그의 심기를 건들 만한 일이 필요했다. 슈른은 쿤을 잘 알았다. 그의 성격상 죽으면 죽었지 남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교단에서도 유일하게 쿤의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으며, 오만함을 감추게 할 수 있는 이는 교주뿐이었다. 저토록 당당하고 콧대 높은 오만한 사내 위에는 오직 교주만 있었다. 슈른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일단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벌은 언제든 내릴 수 있었다. 일단 보류였다. 지금의 수모는 나중 처벌로 넘기기로 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코앞에 닥쳐 있었다.

"자네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내가 직접 따로 내리지."

"왜? 지금 해도 되는데. 변명할 거리가 있긴 했지만, 자네 말마따나 실패는 실패니까 실패에 따른 대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네."

말 끝마자 비아냥이 섞인 목소리에 슈른은 차분하게 치솟는 울화를 삼켰다. 그러나 쿤은 실패에 있어서도 당당했으나 그것에 따른 대가를 받는 것에서도 덤덤하게 수용했다. 그만큼 자긍심이 높은 사내를 쉽게 무릎 꿇릴 수 없음을 슈른은 생각했다.

슈른은 깊게 심호흡하며 어색하게 웃는 낯을 내비쳤다. 쿤은 그런 슈른의 표정을 비웃었으나 슈른은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의 탁한 눈빛이 텅 빈 공동 사이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훑으며 치미는 울화를 진정시켰다.

"앞으로 일주일 뒤, 이곳으로 아이들이 올 것이네."

"호오! 제법 빠르군? 뭉그적거리며 한 달은 대기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만큼 수가 줄었으니까.. 굳이 시간에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안타깝게도 대부분 북부 출신이 많아. 어쩔 수 없지.. 누군가들이 임무 실패를 하다 보니 가장 높은 분께서 도통 참지 못하고 있어서 될 수 있다면 빠르게 시작하는 게 좋으리라 여겼네. 어쨌든! 자네가 뽑은 다섯 명의 교관가 함께 모이게 될 아이들을 훈련하도록 하게. 사정 봐주지 마.."

킥킥 웃던 쿤이 되물었다.

"그나저나 사정 봐주지 말라는 말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부 죽여도 좋다는 거야?"

슈른은 잠시 머뭇거리며 고민했다. 교주는 헬리글의 첫 번째 아이가 교단의 근본이 되기를 희망했다. 나중에 세울 나라의 영웅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므로 확실한 이가 필요했다. 확실하게 교단의 충실한 개가 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곧 만족할 만한 실력자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곰곰이 고뇌에 잠겼던 슈른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실패작을 만들 바에 차라리 죽이는 게 낫지... 더는 교주의 심기를 건들 수 없어. 자네의 목을 베어서 실패의 표본으로 삼으라고 했네. 그것을 간신히 뜯어말렸어. 그러니 이번 헬리글이 가장 중요하네."

"그럼 다 죽였다고 또 그가 노발대발하지 않겠어?"

"그에 따른 대비도 다 된 상태다. 그러니 자네는 양성에만 힘을 쓰도록 여기를 완전히 지옥으로 만들어 놓아도 상관하지 않겠어."

처음으로 슈른과 쿤의 생각이 일맥상통한 것 같다. 마주 보던 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혔다. 그러며 쿤은 다시금 이곳에 채워질 아이들을 향해 깊은 기대감을 내비쳤다. 쿤과 슈른의 시선이 다시금 주변을 훑었다. 북부, 산맥의 외진 줄기에 만들어진 헬리글 안에 기괴한 울음이 계속해서 울리는 듯했다.

울음이 실체를 가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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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셀리엘 저택이었다.

페르난도의 모호한 시선이 유진에게 닿아 있었다. 그에 반해 유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하며 찻잔을 홀짝이고는 했다. 그러는 중에 잠시 둘 사이에 적막이 맺혔으나 적막은 금세 페르난도로부터 깨졌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진중했으나 진중하게 뜬 눈빛 속에서는 의문과 의심이 가득했다.

"교단이라는 곳에 주요 지부 중 한 곳이 프레이야에 있다 이 말인가? 솔직히 믿고 싶으나 그게 쉽지 않음을 이해해주게. 무엇보다 자네는 그러한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가 가장 의심스럽네. 아무리 슈리엘 가문이라 할지라도 하이란 출신의 정찰대가 이곳에 있을 수 없는 노릇인데 말이야. 혹시라도 슈리엘의 스파이가 북부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 그렇다 보니 자네가 말한 이야기를 도통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겠네. "

그가 눈을 빛내고는 짧게 불만 어린 콧바람을 내며 마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자네의 말마따나 저택에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니지 이제는 교단이라 할 수 있는 끄나풀을 발견했다는 것에는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솔직히 오히려 그러한 점에 더 의심스러운 건 어쩔 수 없네 그것도 자네가..."

책상에 손을 올려 턱을 기댄 페르난도 셀리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굳어진 눈빛에는 쏟아지는 의문과 의심은 유진에게 닿아 있었다. 의문은 때론 의심으로 혹은 오해로 변질하려는 듯, 이마에 새겨진 주름과 미간에 새겨진 깊은 골을 따라 시시각각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페르난도는 유진을 교단의 끄나풀이 아닐까? 의심하는 듯했다. 그럼에도 유진은 페르난도의 의심 어린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당당하게 의심에 마주했다. 나아가 초조한 기색을 지우고 여유를 품으며 따스한 홍차로 온기가 닿지 않은 내면까지 따스함을 더해 급급해지는 마음을 달래며 차분함과 평정심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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