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846화 (846/1,410)

〈 846화 〉 마지막 벌, 그리고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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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오늘도 유진의 방에는 프리실라와 에일린이 동반했다. 둘은 각자의 방이 있다 한들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프리실라의 모습이 아침과 달랐다. 그녀는 슬프고 괴로워했다. 도통 어떠한 이유인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녀는 무언가에 넋이 나간 듯했고 짙은 슬픔과 괴로움, 심지어 공포가 표정에 여실히 드러나고는 했다. 심지어 다가오는 손길을 피하려고도 했다. 이상함을 느꼈다. 에일린 역시 유진과 똑같이 이상함을 느꼈으나 그녀는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엷게 웃으며 침묵했다.

유진과 에일린이 도통 의아함을 느낄 무렵 프리실라는 사라 드 셀리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괴로워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자신이 낳은 아이가 언제고 그녀처럼 변하며 슈리엘 가문을 좀먹으리라는 예언이자 저주와 같은 목소리가 그녀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 몇 번이고 몰래 눈시울을 붉혔으며 끝내 식사까지 거른 채 울었다. 충격은 쉬이 잠잠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프리실라의 마음에 불안을 가중시켰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에일린과 유진이 함께 했으나 그럼에도 공포와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더욱 숨통을 옥죄듯 두려움이 들끓기 시작했다.

심지어 유진이 곁에 있어주고는 했으나 그럴수록 프리실라는 오히려 죄책감을 느꼈다. 슈리엘 가문을 더럽히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책감,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미래를 향한 불안이 끊임없이 영혼을 좀먹으며 그녀에게 공포를 심었다.이토록 더러운 핏줄이 대를 이어 슈리엘 가문을, 나아가 유진의 명성까지 더럽히지 않을까 하는 절망이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며 비아냥거렸다.

프리실라는 누구보다 유진을 사랑했다.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둘 사이에 맺은 결실이 활짝 만개하기를 매번 고대했다. 그러나 사라 드 셀리엘의 저주가 새겨진 순간, 모든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더는 유진의 손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러운 핏줄로 슈리엘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독이었다. 그를 더럽힐 독이자 오염시킬 독이었다.

유진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낳을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의 아이가 그녀의 저주처럼 슈리엘을 망치진 않을까 두려웠다. 적어도 그와 함께 있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불안을 느껴야만 했다. 그것을 견뎌내기 너무 힘들었다.

혹시라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의문을 가중시켰다. 만에 하나 유진과 이어지지 않더라도 언제고 아이를 낳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그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로 자신의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지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은 채 끝났고 여운은 끊임없는 고통이 되었다.

혼란과 혼돈, 절망과 좌절, 지독한 악귀, 마녀, 여러 악명을 떨치는 사라 드 셀리엘은 끝까지 자식을 저주했고 더러운 쇠사슬로 칭칭 감아 놓아주지 않았다. 일말의 자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악독한 마녀에게 있어 자신은 도구에 불과했다. 나아가 마녀는 도구를 이용해 유진을, 나아가 슈리엘 가문의 멸망을 원하고 있다. 어느덧 그녀의 무기가 된 것이다.

그것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독이다. 뜻대로 되지 않게 할 것이다. 뜻대로... 그러기 위해서는 유진을 포기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다. 가슴이 미어지며 내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고통 섞인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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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억울하다. 비통하다. 어떻게든 발버둥치며 거부하려 했다. 어린 나이에 도망을 치며 저항하려 해도 애석한 운명은 지긋지긋하게 쫓아왔다. 더러운 핏줄로 새겨진 운명은 차마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었다. 그녀와 자신과 같았다. 같은 피를 이어받고 있으며 자신으로부터 잉태한 새로운 생명 역시 그녀의 피를 이어받게 될 것임을 여실히 상기하게 한다. 그러며 말했다. 절대 도망칠 수 없다며 끊임없이 비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리 다른 핏줄로 희석된다 할지라도 그 피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그녀의 음흉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무자비함은 끝까지 그리고 지긋지긋하게 놓아주지 않았다. 슈리엘 가문의 재앙이자 독이 되게 했다. 거센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절망 속 숨통을 조여오는 죄책감은 감히 버텨내기 힘들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애처럼 엉엉 울었다. 등을 감싸 안는 유진의 손길조차 미안하고 두려웠다. 에일린의 따듯한 목소리조차 미안했다. 모든 것을 망치고 무너트릴 것 같아 두려웠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는 중에 귓가에는 여전히 사라 드 셀리엘의 잔혹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을 뒤로 도망치듯 홀로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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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프리실라는 며칠 동안 유진을 만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피하게 되었다. 미안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일었다.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그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결국, 방을 따로 사용하기도 했다. 프리실라는 스스로 새장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유진을 만나지 않으려 했다. 유진은 매번 문앞에 이르러 자신을 불렀으나 차마 나갈 수 없었다. 지금의 마음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벌써 사흘째가 지났다. 그러나 언제 나가야 할지 몰랐다. 아니 나갈 수 없다.

어쩌면 이대로 유진과 연을 끊는 것이 가장 최선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신의 더러운 핏줄이 유진의 피를 더럽힐 바에 이렇게 새장 속에 갇혀 그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도 여전히 그를 향한 사랑이란 미련이 남아 억울함과 후회의 눈물이 흘렀다.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유진에게 이끌리듯 나아갔으나 굳게 닫힌 문을 앞에 두고 차마 손을 뻗지 못했다.

뻗은 손이 문에 닿았으나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없었다. 절절한 들끓는 가슴은 유진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원망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더럽고 혐오스러운 핏줄을 지우지 못하는 이상 유진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쿵쿵! 오늘도 여지없이 노크소리가 들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통에 겨워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의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도 제발 대화 좀 나누자는 말을 해왔다.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으나 프리실라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베개에 머리를 묻은 채 귓가에 잊혀지지 않은 사라 드 셀리엘의 잔혹한 저주에 괴로워하며, 핏줄을 혐오하며 서글피 울었다.

"제발.. 날 혼자 내버려 둬.."

울다 지치면 침대 위에 앉아 망연한 시선으로 창가에 이르렀다. 우중충한 하늘에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온은 하루가 다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됨이 분명했다. 북부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뚜렷하지는 않으나 계절이 있었다. 물론 지긋지긋한 눈발이며, 저만치 끝 프릴 산맥의 만년설은 비슷하나 계절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겨울에 이른 북부는 몹시 난폭했다.

이래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온 세상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추웠다. 공허했고 허무했다. 무엇보다 가슴이 너무나 시리다. 얼어붙은 것처럼... 차라리 이대로 얼어 죽었으면 했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는 프리실라에게 없었다.

방은 예전과 똑같은 방을 사용했다. 처음 태어난 순간, 유모와 하녀로부터 돌봐지던 그때와 같은 방이지만, 참으로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 빈 방이었다. 그 이후로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방이 분명했다. 보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조촐한 장롱, 화장대, 거울, 그게 전부인 곳이었다. 도망친 균열이자 이제는 무기로 만들 자신에게 화려한 장신구 따위는 필요치 않다는 듯하다.

허술하고 형편없는 방이었다. 텅 빈 커다란 방에 유진과 에일린이 없으니 공허함만 가득했다. 문득 프리실라는 무언가 생각나 침대에 벗어났다. 여전히 유진의 노크소리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으나 차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애써 신경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장롱을 열었다. 그러자 드러나는 옷가지 퀴퀴한 곰팡내가 가득하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행히 매번 이 방을 청소하기는 한 것 같다. 물론 사라 드 셀리엘이 시킨 것은 아닐 테다. 그나마 아버지 페르난도? 어쩌면 하녀들이 그저 깔끔한 것에 집착하는 귀족 가문 특성답게 텅 빈 방이라 할지라도 그저 의무감으로 쓸고 닦은 것일지도 몰랐다. 굳이 별다른 명령 없이 당연하게도 이 방까지 청소했으리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프리실라가 장롱 깊숙이 손을 뻗었다. 텅 비어 있었다. 입가에 씁쓸한 그림자가 맺혔다. 그럼에도 혹시나 싶어 구석구석에 손을 뻗었을 때, 무언가 꺼칠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짧게 탄식을 흘렀다. 목소리는 잠겨 쇳소리로 가득했다.

조심스럽게 손에 잡힌 꺼끌꺼끌한 것을 집어 빼내자 그것은 꼬질꼬질한 목각 인형이었다. 피식 웃음이 걸쳤다. 참으로 볼품없는 목각 인형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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