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884화 (884/1,410)

〈 884화 〉 알리센 프레이아

* * *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사라 드 셀리엘이 노기가 가득한 음성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뻔뻔한 되물음이 신경을 긁었을까? 되묻는 질문 자체가 자신을 우롱한다고 느꼈는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된 알리센의 얼굴이 전보다 더 부르르 떨렸다. 특히 몇 개 남지 않은 가늘고 푸석푸석한 그의 턱수염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얼굴에 깊게 새겨진 주름들이 기괴하게 움직이며 눈썹이 한껏 추어 올라갔다.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매부리코와 갈라지고 부르튼 입가에는 폐병 환자 마냥 쇳소리 섞인 거친 숨소리가 토해내며 분노를 노골적으로 내비치던 그는 힘겹게 심호흡으로 분노를 억누르고는 갈라져 기괴한 쇠의 마찰음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언성이 높아졌다.

"첫 번째 셀리엘은 나와의 약속을 어겼다. 두 번째 입궁하라는 명령을 멋대로 어겨 이제야 그 뻔뻔한 낯짝을 들이밀며 오만방자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다. 이에 설명하라."

"위대하신 모두의 지도자이자 북부의 지배자이며 여신 프레이야의 간택 되시어 세 주술사의 대리인이기도 한 전하에게 감히 청하옵곤 데, 부디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준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허락한다."

사라 드셀리엘이 고개를 끄덕여 여전히 딱히 두려움일랑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자존심을 꺾지 않았으며 태연한 눈빛에도 어떠한 동요도 실리지 않았다. 하물며 목소리 역시 곧게 뻗어 나가 기품이 흐르는 예법 속에 무고함이자 당당함을 내비쳤다.

"첫째는 약조했던 성년이 된 프리실라를 입궁시키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는 점이 있습니다. 이 역시 셀리엘의 뜻이 아니었으며 딸아이는 가문의 명령을 어겨 그녀의 스승과 함께 도망쳤다는 점입니다. 무렵 저와 페르난도는 전하의 명령을 받아 사교계에 입궁한 상태였고 마구엘은 기사단에 훈련을 받고 있었지요. 안타깝게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 보아라."

콧방귀를 뀐 왕의 시큰둥한 목소리에도 사라 드 셀리엘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고개를 살짝 조아려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므로 가문은 사라진 딸아이를 몇 년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보니 성년이 되었을 때 프리실라가 궁에 입궁할 수 없었던 이유며, 끝내 전하의 성은을 입지 못했다는 점이지요. 그것은 셀리엘 가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알리센이 짧게 콧방귀를 뀌며 여전히 언성을 높였다.

"애초에 막을 수 있었던 일이다. 셀리엘이 내 전언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

"셀리엘 가문은 모두가 전하의 녹을 먹고 사는 처지임에 딸아이의 행실을 마냥 지켜만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예로부터 셀리엘 가문의 교육 방식에 틀린 점이 없었습니다. 즉, 셀리엘 가문으로서도 이번 사태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전혀 뜻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프리실라는 14살이 되었을 적 입궁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조금 더 신경 써야 함은 옳지만,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았음을 부디 헤아려 주길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좋다!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의 부름이라 치자 이후로 넘어가겠다. 프리실라와 함께 입궁하라 했다. 하지만, 셀리엘은 또 그러하지 않았다. 이러한 점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프리실라는 7년간 바깥에 나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혼기가 지나도 훨씬 지난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궁전의 예절을 배우지 못했으며 귀족의 예절조차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한낱 용병처럼 생활했습니다. 그러한 점은 곧 왕실과 귀족의 품위를 저하하는 일이라 생각해 심히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이 아니었습니다. "

사라 드 셀리엘의 시선이 슬쩍 유진에게 닿았다. 그때 유진이 앞으로 나서서 직접 대답하려 했으나 사라 드 셀리엘이 막아서며 말했다.

"가문에서 이미 손을 쓰기도 전에 슈리엘 가문과 이미 이어진 사이였습니다.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디 셀리엘을 향한 분노를 푸시기 바랍니다."

"정말 뜻하지 않았던 바인가? 이것이 전부 제국으로 진출하려는 셀리엘의 뜻이 아닌가? 북부로 진출하기 위해 혈연을 맺으려는 슈리엘의 간사한 생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쇠심줄 마냥 고집 어린 목소리가 여전히 고집을 꺾지 않은 채 의심을 물고 늘어졌다. 잿빛으로 탁하게 물든 시선이 사라 드 셀리엘을 타고 유진에게 닿았다. 유진은 그러한 눈을 마주했으나 여기저기 들려오는 무례라는 단어에 다시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괜히 고군분투하는 사라 드 셀리엘의 해가 끼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한편 사라 드 셀리엘은 그런 유진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자신의 무고함, 나아가 셀리엘 가문의 무고함을 피력했다.

"뜻하지 않은 바였음을 프레이야 여신과 북부이자 궁전에 충성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린 셀리엘의 영령에 다짐하는 바입니다. 하물며 유진 슈리엘 역시 프리실라와 처음 이어졌을 때에는 셀리엘 가문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점이며 프리실라가 전하의 성은을 입어야만 하는 존재였는지 몰랐다는 점이지요."

"아무리 긴 혓바닥을 놀린다 할지라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일이 하이란의 슈리엘 가문과 프레이아의 셀리엘 가문이 서로 합작해 내 것을 빼앗고 날 기만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 의심은 어떠한가?"

왕의 물음에 다시금 웅성거림이 들렸다. 여전히 이어지는 그의 쇠심줄 같은 고집은 조금 전 사라 드 셀리엘의 말 중, 셀리엘의 영령과 프레이야 신을 거론한 것을 믿지 않겠다는 점이다. 그것은 곧 셀리엘 가문의 옛 충심을 무시하고 비하하는 발언이기도 했다. 때론 증거보다 귀족 가문의 한 마디 말이자 명예를 중요시하는 이들에게는 지금 알리센의 고집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한편 사라 드 셀리엘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일이 프리실라의 일탈로 이루어진 일, 그녀는 셀리엘 가문의 피를 혐오했으며 나가서는 셀리엘이라는 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슈리엘 가문 역시 그녀가 셀리엘 가문인지 몰랐습니다. 이러한 의견을 뒷받침해줄 이가 곧 입궁할 겁니다."

"곧 입궁한다고?"

알리센이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표정에는 호기심과 함께 탁한 눈빛이 슬쩍 알현실 문에 이르렀으나 아직 잠잠했다. 더욱이 주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으나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럼에도 사라 드 셀리엘은 여유를 가진 채 왕을 마주했고 수많은 귀족의 웅성거림을 마주했다.

귀족들의 웅성거림은 곧 비웃음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언제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라 드 셀리엘의 비굴한 모습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입궁했던 것이 분명하나 오히려 당당한 지금의 모습에 동요하는 듯했다. 그러는 중에 사라드 셀리엘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북부를 위해 피를 흘린 영령의 이름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살아있으며 만인이 아는 명예로운 이라 할 수 있으며 이번 일에 나름 연관이 있는 이입니다. 어찌 되었든 프리실라는 더이상 셀리엘 가문 만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기에 유진 슈리엘이 뜻하지 않게 프레이아 왕궁에 입궁한 것입니다. "

"그러한 점은 알겠다. 말마따나 곧 입궁한다는 이를 맞이하고 나서 다시 심도 있게 시시비비를 가리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두 번째 연유를 묻겠다. 왜 내 명령을 기만하고 우롱했는가?"

"그런 적 없사옵니다."

사라 드 셀리엘 말에 여기저기서 조소가 들렸다. 더욱이 알리센의 입가에도 냉소가 맺히더니 신경질적으로 철제 의자의 손잡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다시금 침묵이 일었다. 고요함 속에 알리센의 분노가 숨통을 조여오며 넓게 퍼져 있었다. 유진은 등가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며 내면에 기운을 퍼트려 다가오는 압박감과 여전히 숨을 쉬는 것에 방해하는 고산병 증세로부터 간신히 견뎌내고 있었다.

한편 사라 드 셀리엘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오만함이 가중되는 듯했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일말의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자 노기를 띤 알리센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듯 쏘아졌다.

"입궁하라는 명령을 무시하며 갖은 핑계로 입궁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셀리엘은 왕이 그리도 아둔한지 아는가? 이러함이 왕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라는 셀리엘의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그렇지 않습니다."

뻔뻔함에 대답에 냉소가 여기저기 맺혔다. 그러면서도 귀족들은 이상하리만큼 사라 드 셀리엘을 압박하려는 알리센의 행동에 조금은 의아함을 느끼고는 했다. 조소 속에 담긴 웅성거림은 의문이었다. 동시에 불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알리센은 끝까지 사라 드 셀리엘을 억지로 억누르려 마치 발악하는 듯 언성을 높였고 노기를 표출했다.

"아직도 구차한 변명으로 궁전을 더럽힐 셈이구나? 그렇게나 프레이아의 궁이 만만하게 보였던 것이냐? 내 당장 너의 오만함 가득한 두 눈을 뽑아야만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용서를 빌 테냐?"

"말했다시피 변명도 아니었습니다. 입궁하기 전부터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몸이 나았을 때, 마차에 올라 성도로 갔으나 안타깝게도 곧 눈보라가 칠 시기임을 알기에 입궁하기 전에 고립되는 것을 방지해 발베르센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엄연하게 사실만을 전해야 하는 부분에서 가문의 명예와 왕실의 충심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여 말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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