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988화 (988/1,410)

〈 988화 〉 차갑게 식어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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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적어도 로아나가 보기에는 그러했다.

평범한 태양이라면 능히 그래야 할 빛이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엷은 빛조차 시들어가는 꽃잎처럼 간신히 피어오르는 듯해 우태롭게 느껴졌다. 더욱이 태양은 서늘했다. 유난히 섬뜩하고 고독한 한기가 맴도는 태양은 을씨년스러움을 느꼈다. 어쩌면 주변에 맴돌며 호시탐탐 빛을 앗아가려는 그림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로아나는 고민했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 맴도는 어둠을 그림자라 할 수 없었다. 더 끈적하고 점성이 짙고 덩어리진 역겨운 악취를 뿜어대는 점액질이자 한 마리의 야비한 짐승처럼 느껴졌다. 로아나는 원망 어린 시선으로 그것들을 쏘아보았다. 다행히 손에 쥔 빛 때문인지 점액질이 덤벼들지 못했다. 분명 그 돌 혹은 별과 같은 것에서 나오는 빛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떠한 힘이 작용한 것일까? 로아나 역시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으나 적어도 그 빛을 뿜어내는 별인지 혹은 돌인지 모를 힘 덕분에 유진의 내면으로 올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로아나는 급히 유진을 보았다. 태양이 바로 앞에 있음에도 서늘함이 만연하게 맴도는 빛 아래에 그가 있었다. 공포, 절망, 좌절, 여러 악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짓눌린 그는 유일하게 내리쬐는 빛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문득 유진의 모습이 흑백으로 보이는 건 왜일까? 죽어가는 태양 그 아래에 내리쬐는 빛으로도 흑백으로 물들어 서서히 시들어 가는 그를 보자면 생기를 느낄 수 없었다.

어쩌면 태양처럼 그 역시 똑같이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태양이 그의 생명력은 아닐까?

그는 몸을 웅크린 채 홀로 처연한 시선으로 죽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시들어 조금만 건드려도 그대로 바스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에 로아나는 왠지 가슴이 메었다.

그는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조금의 미동이 없었다. 여전히 동그랗게 몸을 말아 양쪽 무릎을 끌어안은 상태였다. '유진...' 그를 불렀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자그마한 파문을 실어 나아갔다. 아쉽게도 대답이 없다.

불현듯 의문을 느꼈다. 자신이 목소리를 내었을까? 마치 육체에 벗어나 영혼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에 목소리가 공허에 삼켜진 듯하다. 분명 성대를 울려 목소리를 낸 것 같으나 먹먹한 목소리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이질감이 짙었다. 어쩌면 주변에 드리워지는 타르와 같은 점액질이 목소리가 유진에게 닿지 않게 방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항하듯 한달음에 다가갔다. 여전히 요지부동인 유진의 뒷모습은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였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유진의 앞모습도 보였다.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허가 담긴 눈빛을 보았을 때 로아나는 흠칫 놀랐다. 아름다웠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탁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희망을 잃고 고통과 공포에 잠겨 생기를 잃은 잿빛의 눈동자는 죽어 있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해 보였다. 더욱이 새파랗게 질려 흑백의 몸은 산송장 같았다.

'유진.'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묵무부답이었다.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잿빛의 눈동자는 여전히 로아나에게 닿지 않았고 점점 더 빛을 잃어가는 태양을 갈망하고 염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로아나의 시선도 태양으로 시선을 틀었다. 무엇을 원하는 갈망이자 염원일까? 유진은 무엇을 위해 태양을 보는 것일까? 죽어 가는 태양을 향한 위로일까? 사그라지는 생명력을 향한 간절한 갈망이자 염원을 내비치는 걸까?

로아나의 시선도 다시금 태양에 닿았다. 하얗게 물든 자그마한 구는 빛이 응축된 듯하나 전혀 밝지 않았다. 주변에 넘실거리며 추악한 손길을 뻗어오는 그림자를 밀어내지 못하는 나약한 태양 혹은 생명... 그림자에 고립돼 점점 사위가 좁혀 오는 악독한 손길에 벌벌 떠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대로 있다가는 금세 그림자에 삼켜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유진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의 영혼은...

몹시 나약하고, 몹시 위태로운 태양은 무자비한 그림자 앞에 속수무책으로 잡아먹힐 것처럼 보이자 로아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대로 있다가는 태양이 삼켜짐과 함께 유진의 영혼이 완전히 삼켜지리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지금 유진이 내비치는 갈망과 염원은 태양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일지도 모르겠다. 유일한 기둥이자 유일한 빛, 유일한 방패가 무너지는 것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유진!' 다급히 그를 불렀다. 여전히; 그림자가 목소리까지 삼켜지며 닿지 못했다. 하물며 그는 하릴없이 태양을 바라만 볼 뿐이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어깨에 얹은 손에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딱딱했다. 마치 시체를 손에 댄 것처럼, 손끝에 스며드는 차가움에 왈칵 눈물이 터졌다.

'유진! 제발 날 좀 봐! 제발...' 이번에는 태양을 등진 채 소리쳤다. 목소리는 여전히 그림자에 삼켜져 야속하게도 그에게 닿지 않았다. 심지어 막연한 시선 속 초점은 여전히 나약한 태양에 닿아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보이지 않은 듯하다. 그럴수록 유진의 몸은 점점 더 색채를 잃어 죽어가고 있었다.

순간 그림자가 발치 앞까지 밀려왔다. 유진의 몸 위로 슬금슬금 역한 악취를 흩뿌리는 그림자가 침범했다. 소스라치게 놀란 로아나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여전히 유진과 이어진 인연의 끈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아 두려웠다. 마치 부모의 연이 끊어진 것처럼, 연인의 연이 끊어진 것 마냥 텅 비어 공허함이 맴도는 가슴에는 뼈에 사무치는 슬픔이 맴돌았다. 그럼에도 야속한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너무나 서글퍼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눈물은 금세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닥에 삼켜졌다. 끝내 무력함을 원망하며 유진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점을 잃은 유진의 눈을 보며 로아나가 서글픈 목소리를 내었다.

'나 무서워.. 이대로 또 혼자가 될 것 같아 무서워... 유진이 사라질 것 같아 무섭단 말이야.. 평생 지켜준다며? 그런데 이게 뭐야... 이게.... 제발 날 좀 봐줘..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제발...'

손을 뻗어 시체처럼 차갑고 딱딱한 몸을 끌어안았다. 서럽게 울었다. 비통함에 잠겨 애처로운 눈물이 그의 뺨에 닿았다. 그를 원망하고 또는 그리워하고 또는 이대로 사라질까 두려워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유진의 굳어진 입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다정했던 목소리가 들려오지 못했다. 따스한 온기며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조금 더 강하게 그를 품에 안았으나 유진의 몸은 계속해서 차가웠다.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자그마한 몸, 무기력한 몸, 이런 자신이 몹시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의 품에 꼭 끌어안아 주지 못한 자그마한 몸이 하염없이 안타까웠다.

나는 어쩌면 좋지? 어떻게 하면 유진을 깨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드리워진 그림자를 떨쳐낼 수 있을까?

그림자를 지워내기 위해서는 태양이 필요해..

갑작스러운 목소리..

소스라치게 놀란 로아나가 시선을 틀어 태양을 보았다. 빛을 잃은 태양은 위태로운 촛불처럼 흔들거렸다. 이제는 한 줄기 빛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림자는 점점 더 유진을 뒤덮고 로아나에게도 번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림자가 태양에게도 닿으려 했다. 야금야금 집어삼켜 지는 나약한 태양은 무척 초라하게 보였다. 그때.. '태양은 너에게도 있어..' 다시금 귓가에 닿은 목소리에 로아나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유진에게 닿았다.

머뭇거리던 로아나는 침을 꿀컥 삼켰다. 그러며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림자가 유진의 반을 집어삼켰다. 이내 로아나가 그의 귓가에 이르러 나지막이 속삭였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닿을까? 의문이 일었으나 그저 부디 닿기를 바랐다. '유진.. 들려?' 나지막이 물었다. 아직 미동은 없었다. 닿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로아나는 무언가 단호한 결심을 끝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그렸다. 붉어진 눈시울에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유진의 뺨에 입술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너의 태양이 되어줄게...' 의미심장한 말이 유진에게 닿기를 바라며 로아나의 시선이 태양에게 닿았다. 그러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려는 순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그림자가 더럽고 역겨운 손을 뻗어왔다.

'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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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갈라도를 망가트린 악마의 손길과 같았다. 불온하며 혐오스러우며 더러웠다. 그뿐이 아니다. 그 손길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 손길은 분명 그 형태는, 그 추악함은, 그 더러움은 분명 진심으로 연모하던 라를 절망으로 무너트린 존재의 손길이었다.

그가 또다시 소중한 것을 앗아가려 했다. 다시금 행복을 무너트리려 했다. 로아나는 들끓는 용암이 폭발하듯 분노했다. 예전처럼 무력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시금 무력하게 소중한 이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며 끊임없이 다짐했다.

뻗어오는 그림자의 수많은 손길 사이로 로아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육체를 갖고, 영혼을 갖고, 자아를 갖게 된 이유가 이러하기 위함이 아닐까? 소중한 이를, 사랑하는 이를 지킬 수 없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지키기 위해...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도록...

'라!..' 나지막이 간절한 염원을 담아 사랑하는 이를 불렀다. 그리고는.. '유진!' 또 다른 소중한 존재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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