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9화 〉 달콤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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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꿈
희미한 빛 사이로 유진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니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뚜렷하지 않은 시야는 마치 물결이 흐드러진 것처럼 흐릿했다. 짙은 안개가 낀 듯했다. 혹은 꿈을 꾸는 듯했다. 정신은 몽롱했고 온몸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붕 뜬 느낌이었다. 느낌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익숙하기도 했으나 도통 생각나는 건 없었다.
간혹 그다지 중요치 않은 곳에 깊은 고뇌에 잠기듯 유진은 이 익숙한 감각에 관해서 조금 더 심도 있게 고찰했다.
어디서 느꼈을까? 언제 느꼈을까? 어쩌면 기이한 감각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진은 곰곰이 고민했다. 그게 10분 혹은 20분이 혹은 한 시간 혹은 날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였다. 단순해진 뇌는 깊게 생각할 수 없었고 신경 세포가 전부 마비된 것 마냥 시간 개념부터 날짜 개념까지 사라졌다. 깊게 생각할수록 오히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한편 쓸데 없는 고민에 잠긴 사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금 바로 들려왔다. 살랑살랑 다가오는 바람처럼 나긋한 목소리는 듣기 좋은 하나의 자장가와 같았다. 그러자 엄습하는 어둠에 정신을 놓았다.
조금 더 아득한 어둠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몸을 감싸 안는 포근하고도 안락함이 느껴지는 어둠에서 더 깊은 아래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는 중에 함께 하나의 꿈을 꾸었다.
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짐승의 동굴이었을지도 모른다. 군데군데 짐승의 털로 보이는 하얀 털들이 즐비했고 특유의 냄새가 나는 듯했다. 설표일까? 하얀 털을 보자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 짐승들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굳이 알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제법 오랜 시간 비었던 굴인 것 같다. 아무래도 설표 역시 지독한 눈보라에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눈보라를 피해 조금 더 따듯한 남쪽으로 도망쳤다던가..
아무리 눈보라가 치는 지역에 사는 짐승들이라도 지금의 눈보라를 견뎌낼 짐승은 없으리라 여겼다. 하물며 영장류라는 인간 역시 섬뜩할 정도로 휘몰아치는 눈보라 앞에 한없이 초라함을 느꼈다.
어쨌든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짐승의 보금자리가 된 동굴에 몸을 피신한 유진은 기초적인 마법으로 젖은 나무로 불을 피웠다.
엷은 불빛이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그다지 불길이 세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무가 젖어 불길은 강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름의 자그마한 불빛으로 지긋지긋하게 쏟아지는 눈보라 속 한기를 조금은 달래주고는 했다.
유진은 능숙하게 젖은 옷가지를 벗어 불가에 나무 지지대를 세워 마치 바비큐 구이처럼 옷가지를 올려놓았다. 최대한 불길에 직접 닿지 않게 했다. 아니 어차피 닿는다 할지라도 이미 축축하게 젖은 옷은 위태로운 불길마저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지탱하는 지지대를 조금 더 깊이 땅에 박아두며 쓰러지지 않게 고정했다. 다행히 튼튼했다. 눈이 녹아 축축하게 젖은 옷가지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금세 속옷만 입은 상태로 멍하니 불을 보았고 주변에 자그맣게 쌓인 나뭇가지 몇 개를 반으로 부수고는 그리 강하지 않은 불길에 조금 더 강하게 피우기 위해 장작 몇 개를 더 올려놓았고 불쏘시개로 사용할 기다란 막대로 불길을 툭툭 건드렸다.
불똥이 튀고 불길이 이리저리 흔들며 조금씩 기세를 회복했다.
나름의 만족스러운 불길이 되었을 무렵 동굴 밖으로 시선을 틀었다. 휘이이잉, 제법 요란한 눈보라는 섬뜩한 여인의 귀곡성처럼 무자비했다. 마치 노한 북부 여신의 울부짖음처럼 들려 간간이 등골이 오싹했다. 혹시 또 모른다. 애처롭게도 아이를 찾으려는 설녀가 잠시 근처에 이르러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날이면 북부 사람들도 집 밖으로 나가지 않을 테다.
한편 걱정이었다. 한창 눈보라가 극심할 시기였다. 특히 12월부터 오는 2월 말까지는 북부는 유독 눈보라가 극심했는데 하필 이러한 시기에 임무를 받았다. 즉, 갈 길이 멀었다. 당장 제국으로 내려가야 했다. 심지어 팽커먼 숲을 통과하며 말이다.
벌써 며칠째 팽커먼 숲을 돌아다녔는지 모르겠으나 빠져나갈 길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더 꼬박 걸어야 하는데 지독한 눈보라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런 눈보라 속에서는 북부의 순찰대 혹은 레인저라 불리는 이들조차 제대로 활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불을 피워도 딱히 걱정일랑 없다는 점에 그나마 안도했다.
슬쩍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미 오후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 때였다. 몸을 녹이고 계속해서 걸을까 했으나 아무래도 오늘은 더 갈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눈보라가 통 걷힐 기세가 안 보이니 말이다.
듣기에 하이란 역시 제법 거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이라 들었는데 갈 길이 멀었던 유진은 아직도 북부에 발목이 잡혀 걱정이었다.
또 늦어지면, 구시렁거릴 이들의 잔소리가 벌써 귀찮게 느껴졌다. 하긴 애초에 물 먹일 생각으로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을 테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바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던 유진은 짧게 혀를 차며 시선을 틀었다. 괜스레 어깨가 뻐근했다. 뻐근함은 곧 어깨부터 가슴을 길게 지나 왼쪽 허리까지 이어졌다.
표정이 조금씩 굳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전번의 임무 덕에 제대로 회복하지 않고 바로 이어진 임무는 육체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무엇보다 가장 꺼림칙한 제국으로 향해야 한다는 점이 더 불편했다. 물론 정확히는 제국에 이르러 다시 남쪽 무쥬엘라로 향해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 보니 평소처럼 홍화를 안아보지도 못해 아쉽기도 했다.
물론 며칠째 물주가 오지 않아 홍화가 더 아쉬워할 테지만 말이다.
유진은 홍화를 생각했고 안타까움에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약해지려는 모닥불에 장작을 툭! 던져 얹었다. 불꽃이 화르르 피어올랐고 다시금 요란스럽게 흔들거리며 다시금 사그라지려 하자 급히 불쏘시개로 툭툭 건들며 공기가 통할 수 있게 했다. 차츰 약해지려는 불길이 다시금 힘을 받았다. 슬슬 깊지 않은 동굴 내부에 온기가 퍼졌다.
빠듯한 시간에 이제 막 두 달 정도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적어도 봄이 되기 전에 무쥬엘라에 도착해야 하는데, 터무니없는 제한이었다. 북부에서 제국까지 거진 한 달 정도 되는 거리였다. 여기서 조금 더 빠듯하게 잡으면 한 달 조금 안 되는 거리라 할 수 있었다. 거기서 가장 큰 제국을 일직선으로 횡단한다 할지라도 무쥬엘라까지는 두세 달은 족히 걸렸다. 그런데 임무 시간을 두 달이라니?
터무니없는 임무에 혀를 찼다.
아무래도 늦어지는 건 당연했다. 북부에서 남쪽 끝으로 향하는 건, 그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무쥬엘라로 향하는 길목에 제국을 경유하지 않고 엘리시움이나 휴센으로 경유해 가고 싶었지만, 빠듯한 시간에 그럴 수 없었다.
분명 제국으로 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자신을 물 먹이려는 뜻이 다분했다.
특히 슈른 그 망할 노인네가 작정하고 물을 먹이려는 거겠지. '좀생이 같은 노인네.' 나지막이 속으로 슈른을 욕한 유진은 옛 기억을 상기했다. 슈른이 가장 통쾌하게 일그러지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럴 때마다 낄낄 입가에 웃음이 터지고는 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진다. 쿤을 죽인 그날, 마침내 헬리글을 빠져나왔을 때, 마중 나온 그의 표정... 절망과 좌절 나아가 분노로 뒤덮인 표정을 보자면 아직도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마치 홍화와 관계를 나누다가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후련함과 짜릿함이었다. 그만큼 슈른의 당황한 표정은 결여된 감각으로도 짜릿함을 느끼게 했다.
그만큼 쿤이 교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인지 척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교단에 있어서 가장 중요 인사를 죽인 대가가 이렇게 유치하게 이어지고 있었으니 사형을 면한 것은 오히려 다행일 정도였고 이런 유치한 보복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애초에 개의치도 않았다.
마음대로 해보라지..
한쪽 축축한 물기가 맺힌 벽 가에 놓아둔 가방을 들어 보았다. 지퍼 부분을 열어 가방 속을 살폈다. 식량이며 소량의 수고비 그리고 예비용 옷들을 하나하나 살피다가 마침 하나의 서신을 찾았다. 슈른의 직인이 찍혀 있는 편지였다. 몇 번이고 보았던 서신인지라 밀랍 부분이 뜯겨 있었고 종이가 살짝 꾸깃꾸깃해져 있었다.
편지를 다시금 꺼내며 모닥불 불빛에 의지해 대충 훑었다. 간단한 날림 체로 해야만 하는 임무만이 딱딱하게 쓰여 있었다. 무쥬엘라를 향해 허큘레아의 별의 소재 파악이 주된 임무였으나 그것보다는 교단의 상단 호위도 있었다.
유진이 가장 의심스러운 건 상단 호위였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듣기에 연금술 재료 거래 상단이라 들었던 것 같았으나 교단의 정보부도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다. 그저 내용물은 상관 끄고 명령에만 따르라는 무책임한 임무였으나 아무렴 이제는 익숙했다.
그저 명령에 움직이는 개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는 뜻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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