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5화 〉 달콤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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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덩이보다 더 무거워진 죄악과 더러움에 고귀한 그녀에게 닿을까 해를 입힐까 두려웠다. 감히 그녀가 품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경이로움에 방해될까 두렵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가 먼저 손을 뻗었고 뻗은 손이 마침내 뺨에 닿았다. 붉어진 눈시울 사이로 그녀를 마주했다. 덜덜 떨리는 입술 사이로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목소리가 닿았을까? 이상하리만큼 답답한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상하리만큼 목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렸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었어도 그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듯했다. 마치 바닷속에 잠겨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분명 그녀에게 닿은 것 같다.
그녀는 원망보다 그리움을 담아, 슬픔보다는 환희를 담아, 걱정보다는 미소를 담았다.
"난 괜찮아. 기다리고 있었어. 나는 네가 돌아올 거라는 걸 믿고 있었어."
무조건적인 믿음, 대가 없는 사랑..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을 사랑, 그러한 사랑에 이기적이었던 자신을 더욱 초라하고 아둔하게 만들었으나 그녀는 충분히 이해하고 포용했다. 모든 것을 포용했다. 어머니가 품은 하해와 같은 마음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죄인을 보듬어주었다.
다정한 손길, 목소리가 자비와 자애를 담아, 죄를 용서했다. 나아가 사랑을 담아 잠시 질투를 놓았고 탐욕을 놓았다.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던 여인이다. 무엇보다 사랑했던 칼을 놓게 했다. 차마 검을 들 수 없는 몸을 만들게 했다. 그랬던 자신이 정작 중요할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아아.. 토해지는 탄식은 자신을 향한 채찍질이 되었다. 납덩이보다 더 무겁게 짓누르는 절망과 좌절이 차마 그녀를 두 눈 똑바로 볼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직접 손을 뻗어 뺨을 어루어만지며 괜찮다는 말과 함께 상냥함을 주었다.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부르르 떠는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한편으로는 절실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이어서 조심스럽게 움직인 손끝이 그녀의 배에 닿았을 때였다. 꿈틀거리며 태동하는 반응에 유진은 경외심을 넘어 찬미하듯 그녀를 마주했다. 더할 나위 없는 황홀경에 환희를 느꼈다. 짜릿한 전율에 휩싸이며 자신의 죄악을 더욱 힐난했다.
눈가에 눈물이 줄줄 새 나왔다.
그 순간 그녀의 뱃속에서 태동하는 움직임을 느꼈을 때에는 벼락이 등줄기를 타고 솟구쳤다. 헉하고 헛바람을 삼켰다. 멍청한 신음이 허파에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로 새 나오고는 했다.
'내 아이라니... ' 한편으로는 너무나 멍청하게 '정말 살아있어!! 진짜 움직였어!' 라는 목소리가 토해지기도 했다. 마침 엘리시아가 킥킥 웃었다. 뒤이어 아리사와 어머니 무리슈엘라도 그러한 모습이 웃겼는지 쿡쿡 웃었다.
부끄럽지 않았다. 유진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자그마한 생명의 태동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실이 그녀의 뱃속에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자그마한 것이 무척 힘이 세 보였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마음 같아서는 자상하고 자애로운 그녀를 닮았으면 좋겠다. 도도하고 기품이 흐르는 어머니를 닮았으면 좋겠다. 천진난만하고 활기찬 아리사를 닮았으면 좋겠다.
유진은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서도 미안함과 감사함에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을 무렵 저택의 문앞에 비스듬하게 기댄 아버지가 서 있었다.
엷은 미소와 함께 어느덧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그가 평소처럼 조금은 피곤해 보이나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유진은 여전히 엘리시아를 껴안은 채 그를 보았다. 그때 유진은 의문을 느꼈다. 어딘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을 들었다. 분명 가족 모두가 있었으나 자그마한 의문이 연실 고개를 빼꼼히 내밀기도 했다.
도대체.. 이 이상한 기분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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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날이 이어졌다. 사랑하는 여인을 곁에 둔 채, 매일 배가 부푸는 엘리시아 곁에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그리고 저녁때까지 모든 의무감에서 벗어나 모든 시간을 엘리시아에게 할애했다.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시간만큼, 거대하게 부풀어 짓누르는 죄악을 갚기 위해, 용서를 구하기 위해 유진의 모든 시간을 그녀에게 주었다.
간간이 아리사와 요정에 관해 얘기를 나누기도 했고 어머니 무리슈엘라와 차를 즐기기도 했다. 아버지와 서재에 이르러 정식으로 가문의 뒤를 이을 후계자 수업까지 받기도 했다.
나날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몸이 축 늘어져 녹초가 되어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만개한 봄이 절정에 이르렀다. 다가오는 포근한 봄바람이 만연한 삶은 그토록 염원했던 삶인지라 입가에 번진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그토록 염원했던 평화로움을 만끽했다. 그러나 유진은 침대에 누울 때면, 엘리시아와 함께 한 침대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아 줄 때면, 나아가 부푼 배를 살며시 보듬어주며 유진은 간혹 불길한 의문에 잠기고는 했다.
불길한 의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 평온한 나날이 이어질수록 점점 더 부풀고 있었다.
며칠이 쏜살같이 지나고 난 뒤였다. 식사하는 중에 유난히 유진은 극심한 의문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텅 빈 느낌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전신을 짓누르고 있었다. 누군가 잊으면 안 될 사람을 잊은 듯하다.
어느날은 식사하는 둥 마는 둥했고 끝내 한숨을 내쉬고는 했다. 의문은 가족들에게 번지기도 했으나 그럴 때면 유진은 애써 의문을 지우고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극심해지는 불안함은 점점 더 부풀어 어느 순간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으며 두통을 유발하기도 했다.
두통약을 먹기도 했다. 혹은 진통제를 먹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불길한 의문으로 파생한 두통은 쉬이 해결할 수 없었다.
며칠이 더 흘러 식사가 끝난 무렵이었다. 차를 즐길 무렵이었다. 갑작스레 엘리시아가 물어왔다.
"아이 이름은 정했어?"
'이름?' 이름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딱히 떠오르는 바가 없자 엘리시아가 뾰로통한 얼굴을 지었다. 유진은 머쓱함을 담아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고는 제법 깊은 고뇌에 잠겼다. 입가에 연거푸 '이름' 이라는 단어를 되새기고는 했다.
짧게 앓는 소리를 내며 버릇처럼 머리를 긁거나 뺨을 긁적였다. 그 순간 입가에 한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 고뇌에 잠긴 유진을 보며 웃던 엘리시아는 더 의아함을 더했다. 자그마한 얼굴이 살짝 모로 움직이며 연실 의문을 남겼다.
유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입가에 헉하고 짧은 헛바람을 삼켰다. 그러며 뾰족하게 소리쳤다. '왜 잊고 있었지! 아니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며칠간 왜 몰랐던 거야! 왜 잊고 있었지!!' 멍청했던 자신을 잔혹한 채찍으로 힐난하며 엘리시아를 마주했다. 천연덕스럽게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로아나! 로아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목소리가 또 입안에 맴돌다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목소리를 냈으나 먹먹해진 귀에는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마치 귀마개로 귀를 틀어막은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마침 엘리시아가 되물었다.
"로아나? 그게 누구야?"
놀랍게도 그녀는 로아나를 몰랐다. 충격을 받은 유진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몇 번이고 아리사를 부르며 정말 모르느냐고 물었다. 엘리시아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그녀의 시선이 다른 이들에게도 닿았다.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답잖은 장난도 아니었다.
마침 방문이 열렸다. 막 씻고 왔을까?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에 물기가 맺힌 아리사가 들어왔다. 그러는 중에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하나하나 떠오르는 기억에 고통스러웠다.
고통을 무릅쓰며 병적으로 창백해진 안색을 한 유진은 곧장 아리사에게 다가갔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몸을 움츠렸으나 사소한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미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로아나와 그녀와 함께 만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아리사! 로아나를 기억해? 지금 로아나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유진은 절규하듯 몇 번이고 로아나라는 이름을 부르며 물었으나 살짝 겁에 질린듯한 아리사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유진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아리사조차 로아나를 몰랐다.
분명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던 이들이었다. 저택에 일하는 모든 이들조차 친자매라 믿었고 무리슈엘라나 혹은 다이크 슈리엘의 숨겨둔 자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황된 소문이 무성할 정도로 우애가 돈독했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아리사는 로아나를 알지 못했다.
당황한 유진이 눈알이 빠질듯한 고통과 함께 부릅떠 엘리시아를 보았다.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리사도 똑같았다. 결국, 유진은 어셉터라는 말과 로아나가 사실 검이란 말을 했다. 그리고 고대 도시 갈라도에 관해서 얘기했다.
그러나 둘은 코웃음 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 했다. 하물며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조차 로아나의 존재가 기억에서 지워졌다.
"검이 어떻게 인간이 돼? 하핫! 장난하지 마! 오빠! 말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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