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1006화 (1,006/1,410)

〈 1006화 〉 달콤한 꿈

* * *

아무도 로아나의 존재를 혹은 그녀가 본디 검이었다는 것조차 믿지 않았다.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만큼 둘의 기억에는 로아나의 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충격에 안색이 파리해진 유진은 점점 더 짙어지는 이질감과 저들과 자신 사이에 괴리감을 견딜 수 없었다. 불현듯 지금의 상황, 분위기, 하물며 엘리시아와 아리사에게조차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한편으로는 거짓처럼 느껴지는 걱정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리사와 엘리시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정신이 없었다. 모든 것들이 전부 의문과 괴리감으로 변했다.

그래 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점차 극심해지는 거리감은 저들과 자신 사이에 닿을 수 없는 벽이 있는 듯했다. 유진의 시선이 어머니 무리슈엘라와 아버지 다이크 슈리엘에게 닿았다. 반응은 똑같았다. 모두가 로아나를 몰랐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유진은 엘리시아와 아리사에게 했던 것처럼 검 어셉터가 변해 로아나가 되었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웃어 보였다. 비웃듯 조롱했다. 깔깔 웃으며 배를 잡고 웃었다. 도무지 믿지 않았다. 아리사처럼 검이 어떻게 인간이 되느냐며 꾸지람을 들었다.

"근래 피곤해서 꿈을 꾼 건 아니니?"

걱정 어린 어머니의 목소리에 담긴 비웃음이 너무나 선명하다. 그럴수록 유진은 납덩이를 삼킨 것 같은 답답함에 가슴을 툭툭 쳤으나 둘은 정말 로아나를 몰랐다.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균형을 잡고 털썩 주저앉았다. 몇 번이고 정말 모르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똑같았다. 그때 어머니 무리슈엘라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다. 유진은 당연하게 말하려 했으나 갑작스럽게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어진 안색이 핼쑥해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가 선뜻 떨어지지 않고 머뭇거렸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이던 뇌가 갑작스레 멈춘 듯하다. 머릿속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정말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꿈...' 나지막이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내뱉은 단어와 뒤로 로아나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꿈처럼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흐릿했다.

결국, 설명하지 못했다. 검이었을 때의 모습조차 설명하지 못했을 때에 유진은 그녀가 모두의 기억 속에 하물며 자신의 기억 속에 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금 조롱 어린 웃음이 귓가에 닿았다. 그때였다. 마침 다이크 슈리엘이 말했다.

"허튼소리는 관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꾸나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유진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격렬한 충격에 몸이 녹초가 된 듯했다. 의자에 축 늘어진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마침 엘리시아와 아리사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러한 모습에 유진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하물며 어머니도 연실 찻잔을 홀짝이던 찻잔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모락모락 뿌연 김을 내는 찻잔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지금의 침묵이, 유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침묵이 그들과 자신 사이에 거리감을 더 늘리는 듯했다.

한편 잠시 뜸을 들이던 다이크 슈리엘의 시선이 모두를 훑었다. 그는 진중했다. 중대 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살짝 긴장한 듯한 모습이기도 했고 어딘가 모르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숨과 함께 붉은 입술을 혀로 축이기도 했다.

유진은 전혀 이해하지 못해 아직도 넋이 가나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은 로아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흐릿한 그녀의 모습을 좇느라 바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왜 모두의 머릿속에 로아나가 사라졌는지 이해할 수 없어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한껏 가라앉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 큰 충격을 몰고 다가왔다.

"장례식을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않아도 국장으로 지내기 위해 장례식을 밀었으니 말이야."

'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장례식이라니?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장례식이라니요?' 그때부터 아버지의 표정에 불편함을 남았다. 붉으락푸르락.. 험상궂게 일그러지더니 마치 포효하기 전의 짐승처럼 섬뜩한 기세를 내비쳤다. 그때부터 분위기가 변했다. 어머니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지다 못해 분노를 담았다.

뜬금없는 소나기처럼 뜬금없이 이어지는 분노의 소용돌이 속에 혼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문득 이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저택이지만, 저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곳은 서재였던가? 식당? 여긴 어디지?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와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한 장소에 적응하는 것이 몹시 힘들었다. 그때 최대한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어찌 잊을 수 있느냐?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미루고 있었거늘... 하물며 널 지키기 위해, 널 도와주기 위해 돌아가신 분이지 않더냐?"

'도대체 무슨 소리지? 날 지키기 위해서라니?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니?' 머리가 아프다. 바늘로 뇌를 콕콕 지르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파리해진 안색을 손끝으로 쓸어내리길 반복했고 바짝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길 반복했다.

"유진!"

강압적인 목소리에 고통이 더 극심해졌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되고 끝내 결림을 느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메스꺼운 속은 구역질이 일었다. 혼란으로 가득한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른 바가 없었다. 하물며 로아나의 모습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장례식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 무언가 기억의 파편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간 듯하다.

결국, 잔뜩 성난 아버지의 표정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그는 끝내 노기를 참지 못하며 소리쳤다.

"어찌 잊었느냐! 널 지키려다 돌아가신 분을! 배은망덕하구나!"

갑작스레 높아진 언성이 천둥처럼 쏘아졌다. 유진은 괴로워 끙끙 앓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되묻는 의문과 방황이 더욱 극심해졌다.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야!', '장례식이라니! 로아나는 또 누구지! 여긴 어디야! 당신들은 누구야!!' 유진은 응어리진 목소리가 입가에 맴돌았으나 끝내 토해내지 못했다. 아니 갑작스럽게 벙어리가 된 듯 뻐끔뻐끔 붕어 마냥 입술을 달싹였으나 어떠한 소리도 토해지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이 여태껏 말을 하지 않고 있음을 깨닫자 지독한 고통이 전신에 치밀었다. 무엇보다 목안이 쓰라리다 못해 비수로 마구 헤집는 고통을 느꼈다.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집어삼켜 몸이 크게 휘청였다. 그러는 사이 차갑게 식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쏘아졌다.

"내 아버지이자 너의 할아버지인 지루드 드왈즈 슈리엘의 장례식이지 않더냐!"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왜?"

처음으로 후련할 정도로 목소리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기억의 파편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세상이 와장창 깨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곧 평화가 깨어지는 것과 같았다. 그러며 펼쳐진 지옥, 지독한 고통 속 공포와 절망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마침내 하나하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것은 끔찍한 악몽보다 더 악몽 같은 기억들이었고 공포이며 고통이었다. 유진은 지독한 고통에 사무쳐 비명을 내질렀고 끝내 바닥을 나뒹굴었다.

소용돌이치듯 장례식이라는 단어, 할아버지의 죽음, 로아나의 모습까지 내면 깊은 곳에서 마구 휘몰아치기 시작한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숨을 크게 헐떡였다. 전신이 걸레 짝이 된 듯 고통스러웠다.

1분쯤 지났을까?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하던 심장이 잠잠해진다. 그러며 흐릿해진 시야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온다. 흔한 마차의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익숙한 노인과 너무나 익숙한 사내가 보였다.

유진은 눈을 껌뻑이며 입술을 달싹이다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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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위태로운 숨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미약해지고 있다. 안색은 점점 더 초췌해져만 갔고 드리워진 그늘은 점점 짙어진다. 마치 죽음의 손길이 차츰 지루드 슈리엘의 몸을 휘감는 듯했다. 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분명 마차 바깥은 봄의 절정에 이르러 꽃내음 가득한 따스함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차 내부 역시 따듯했고 지루드 슈리엘의 몸은 두꺼운 모피 담요를 덮고 있음에도 오한이 일어 몸을 덜덜 떨며 괴로워했다.

지루드를 위해 준비한 커다란 마차 내부에는 적재적소에 응급치료할 수 있는 약재나 약초 혹은 붕대와 물약, 연고, 환약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환자를 위해 바닥 가운데에 푹신한 모피를 깔아 침대처럼 눕힐 수 있게 했다. 이어 벽면에 약재 상자들이 있었고 양옆으로 창이 나 있었으나 벨벳 원단으로 단열 효과가 있는 커튼이 달려 있었다.

내부로는 노란빛을 내는 랜턴이 언제든 환자의 상태를 볼 수 있게 꾸민 고급 마차였으나 그러한 마차 내부에 수많은 약재로도 지루드 슈리엘의 고통을 억제하지 못한듯하다.

왼쪽 창가 옆에 앉은 프리실라는 걱정 어린 표정으로 그의 몸 위에 두꺼운 모피 담요를 여며 주었다. 간혹 몸이 몹시 차갑다가도 뜨거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마치 그의 몸은 한겨울과 한기와 뙤약볕이 쏟아지는 여름이 공존하는 듯했다.

오한이 일어 덜덜 떨리는 몸을 달래다가도 다시 담요가 답답해 내리길 반복했다. 연실 식은땀을 흘러 그의 몸에는 시큼한 땀내와 씁쓸한 약재 냄새가 공존했다.

프리실라는 그런 지루드 슈리엘을 정성껏 돌보았고 오른쪽 옆에 에일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의 옷깃이나 담요를 꽉 움켜쥐며 안절부절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맞잡아 주고 싶더라도 그럴 수 없었음을 한탄했다. 특히 지독한 독이 오른 듯한 피부는 살짝만 스쳐도 고통스러워 했다. 심지어 옷깃이나 부드러운 모피 담요에 스쳐도 고통에 겨워 신음을 흘렸고 흐르는 땀방울조차 그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안레사..."

사경을 헤매던 그의 입가에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 나오는 이름이 되새겨졌다. 너무나 애절한 목소리, 간절한 호소가 담긴 이름은 처연함을 담아 흐드러졌고 끝내 공허함에 삼켜졌다. 프리실라와 에일린은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대륙 전체에 모르는 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지루드 슈리엘과 안레사의 너무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대륙에서도 하물며 음유시인들 사이에서도 몹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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