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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1024화 (1,024/1,410)

〈 1024화 〉 금화 한 장의 팔린 하얀 꽃

* * *

엘리스는 답답했다. 너무 괴로웠다. 아무리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쳐도 지금의 응어리진 답답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괴로워 미칠 것 같았다. 그녀는 마리아 라이노가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앞에 있고 물을 수 있다면 당장 묻고 싶었다. 그 자리가, 후작부인이라는 자리가 이렇게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있었던 걸까? 버림받고 이용당하는 자리가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으면서도 고집해야 할 가치가 있었단 말인가?

고통을 느끼면서, 고독과 외로움에 점점 시들어가면서도 꺾지 않았던 고집이 정말 가치가 있었습니까?

털썩 주저앉았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검은 드레스가 축축하게 젖었다. 흙바닥에 구정물이 스며들었다. 축 늘어진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힘없이 하늘거리며 그녀의 비참함을 대변했다. 엘리스는 울부짖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마리아 라이노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할지라도, 지금의 슬픔과 비참함이 다가오는 고독이 무뎌진다 할지라도 평생 이해할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비센트 라이노에게 버림받은 직후 엘리스는 라이노라는 성을 저주했다. 원망했다. 자신을 도구로 여기는 가문의 냉혹한 행위에 치가 떨렸다. 그들이 자신이 필요치 않으면 자신도 필요 없었기에 어머니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라이노의 성, 명예는 엘리스에게 하등 지킬 이유가 없는 가치였다. 그러니 당장 던져버릴 것이다.

"저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악에 받친 목소리가 뾰족하게 쏘아졌다. 부릅뜬 눈동자가 분노로 물들었다. 마침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거센 빗줄기 사이로 엘리스는 빗물에 닿아 울고 있는 마리아 라이노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응어리진 절망과 괴로움 그리고 원망까지 한껏 토해냈다.

"절대로!!"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말들이 한데 엮이고 뒤죽박죽 섞이며 거센 빗줄기 속에 무거운 슬픔을 토해내는 그녀에게 소리쳤다.

차마 어머니 마리아 라이노... 아니 마리아 그레이프 시리안에게는 닿지 않을 원망과 슬픔, 그리고 분노가 답답한 말들을, 그간 차곡차곡 쌓았던 원망까지 전부 쏟아냈다.

신경질적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이제는 빗줄기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 벼락이 내려치고 천둥이 콰쾅하고 울어대고는 했다. 세상이 번쩍하며 새하얗게 물들더니 다시금 본래의 색을 되찾기를 반복했다. 도무지 봄비라 여길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빗줄기는 거대한 분노를 잉태한 번개의 화신이 끝내 폭발해 노기를 터트리는 것 같았다.

마치 엘리스의 분노를 대변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숨을 크게 헐떡였다. 진창이 된 바닥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앞에 빗줄기에 축 늘어진 꽃 한 송이가 있었다. 바로 묘비가 박힌 땅에 빼꼼히 고개를 내민 꽃은 너무나 위태롭고 외롭게 보였다. 마치 어머니 마리아 라이노처럼...

엘리스는 조심스럽게 더러워진 손을 뻗어 위태롭게 흔들거리는 꽃잎을 매만졌다. 그러는 사이 세상이 한 차례 더 번쩍하며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꽃의 목이 툭 부러졌다. 엘리스는 목이 꺾인 꽃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가슴에 끌어안은 채 말했다.

"다시는 라이노 성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소아렌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곳에서 학업을 끝마치고 남아서 선생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조금 더 깊이 마법도 배우고 싶고 검술도 더 배우고 싶어요. 그렇지 않아도... 2학년이 되면서 발레린 에페엘님이 검술 담당 선생이 되었어요. 그분에게 조금 더 검술을 배울 거예요. 아차! 트루먼 교장 선생님이.. 제가 마법적으로도 재능이 있다고 해요. 저도 몰랐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그런 재능을 조금 더 키워 보려고요. 장학금까지 타서 더는 라이노 가문에 손을 빌리지도 않을 거예요. 그리고 저 그곳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울먹이며 조금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입가에 웃음이 맴돌았고 다시 일그러지며 슬픔이 쏟아지고는 했다. 이윽고 파르르 떨리는 손은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에 닿았고 강하게 움켜쥐었다. 질끈 눈을 감고 바리오스를 떠올렸다.

"그를 사랑해요. 신분은 다르다고 할지라도 상관하지 않을래요. 저도 그를 사랑하고 그도 저를 사랑해요."

묘비에 닿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묘비는 너무나 딱딱하고 차가웠다. 마치 어머니 마리아 라이노의 몸처럼 느껴졌다. 그럴수록 엘리스는 묘비 앞에 어머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흐르는 눈물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냈다. 그러며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하게 어머니를 마주했다.

"마지막이에요. 이제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거니까... 그러니까... 어머니도.. 그만 푹 쉬세요... 만약 나중에. 어엿한... 아니, 아니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저는 돌아오지 않을래요.이제 다시는... 이 땅을 밟지 않을 거예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사랑... "

벅차오르는 슬픔에 잠시 멈칫했고 이윽고 웃으며 말했다.

"사랑해요. 어머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말마따나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미련은 너무나 깊게 남아 발길을 붙잡았으나 더는 이곳에 남았다가는 그 미련 때문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그때 그녀의 걸음이 뚝 멈췄다. 산의 겉면을 깎아 만들어 굽이지고 경사진 길목에 그가 서 있었다. 장례식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그가 우산을 쓴 채 서 있었다.

문득 비가 오는 줄도 몰랐던 엘리스는 애써 눈물을 닦아내자 마침 그가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저 남처럼 스쳐 지나갔으면 하나 그는 하필 앞에 이르러 멈춰 섰다. 차가운 눈빛에는 딱히 감정일랑 실리지 않았다.

엘리스 역시 원망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무심한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만하고 뻔뻔스러운 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스 역시 정면으로 마주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 속에 이내 엘리스가 그를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여태껏 침묵했던 비센트 라이노가 뒤편에 자리한 마리아의 묘비를 보더니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였다.

"마리아는... 죽는 순간까지 행복했다고 들었다. 후회는 없다고 하더군."

뻔뻔스러운 대답을 경멸하듯 코웃음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터무니없게도 어딘가 모를 처연한 시선이 어머니 묘비에 닿아 있자 그 마저도 역겨워 엘리스는 잔뜩 날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에게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아... 애초에 당신은 임종하는 순간에도 곁에 있어주지 않았어!"

뾰족하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비센트 라이노는 쓴웃음과 함께 슬쩍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머뭇거리던 입술이 다시금 획 일자로 굳어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가 마침 손에 쥔 우산을 내렸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며 몸이 축축하게 젖어들어 갔다. 그럼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불현듯 엘리스는 그런 비센트의 얼굴에 흐르는 빗줄기가 눈물처럼 보이는 듯했다. 그래서 더 싫었다. 뒤늦은 후회라도 하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혐오스럽고 역겨워 치가 떨렸다.

'하! 뻔뻔하게도 뒤늦게 후회하며 그 더러운 낯짝을 들이미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후회하고 사과하며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것일까?'

기만이자 희롱에 가까운 행위에 불과했다. 기가 막히고 혐오가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오히려 더 큰 분노가 쌓였다. 당장 떠나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한때 아버지였으나 이제는 아버지라 할 수 없는 사내의 기만과 희롱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당장 소아렌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소아렌으로 돌아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아봐 주는 그가 너무 보고싶었다.

'바리오스.. 바리오스.. 바리오스! 지금 네가 너무 보고 싶어! 지금.. 내게는 네가 너무 필요해!'

무어라 반박하려던 엘리스는 그를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때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방으로 가봐라... 마리아가 네 앞으로 편지를 남겨두었다. 책상에 놓아두었다."

엘리스는 그가 마리아라는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소리치려 고개를 돌렸으나 어느덧 그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를 맞으며 묘비로 향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그런 비센트의 뒤를 보았다. 왠지 모를 처연함이 맺힌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문득 그의 모습이 1년 전보다 몇 배는 더 늙어 보였다. 그러나 엘리스는 그가 새로운 여인들과 밤일에 치중하느라 늙어간다고 생각하고는 코웃음과 함께 시선을 틀었다.

사소한 것보다 어머니가 남긴 편지가 더 중요했다. 하물며 왜 이제 와서 그 편지를 주는지 혹시 편지를 미리 읽은 것은 아닌지 짜증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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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오스가 라이노 가문이 다스리는 밀리언에 도착한 것은 일주일 뒤였다. 쉬지 않고 달려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근육이란 근육과 뼈마디가 연실 비명을 내지르고는 했다. 하물며 오랜 시간 달린 말도 지쳐 신경질적은 투레질에는 침이 질질 새 나왔다. 바리오스는 지친 말을 최대한 다독이며 가장 화려한 저택 앞에 멈췄다. 말이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용케 달려왔으니 이제는 푹 쉬게 해주리라 여겼다.

바리오스는 저택에 도착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막막함을 느꼈다. 라이노 저택은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밀리언이라는 대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을씨년스러움이 가득한 곳으로 뒤로는 그들 소유의 산이 있는 듯했다. 말에서 내린 바리오스가 3층의 거대한 크기의 저택을 보았다. 도로에서 저택 건물의 모습 역시 멀게만 느껴졌다. 그 앞에 말끔하게 꾸민 정원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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