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7화 〉 마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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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딱 달라붙은 상황이었다. 무리슈엘라의 무릎이 유진의 턱을 노리고 들어왔다. 한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유진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무릎을 막았으나 그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턱과 함께 부딪혔다. "윽!" 짤막하게 신음을 토해냈다. 얼얼한 고통과 함께 골이 흔들려 비틀거리며 걸음을 뒤로 물렸을 때 잠깐의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그녀의 검이 다시 미간을 노리고 쏘아졌다.
눈이 부실 정도로 깔끔한 찌르기였다. 어디 모난 곳도 없는 찌르기는 깔끔한 만큼 섬뜩했으며 마치 벼락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쏘아졌다. 보자니 그녀 역시 평소 검을 놓지 않은 듯했다.
한때 '일라일라' 라는 북부에 유명한 검술 가문에서 자라 설원의 꽃이 되려 훈련받았던 여인이었다. 물론 원치 않은 제국 귀족의 결혼을 위해 일라일라 가문에 벗어나 연을 끊었던 여인이었다. 오직 사랑을 위해서, 다이크 슈리엘이라는 사람을 위해서 가족과 연을 끊고 제국으로 왔다.
그녀의 검술 솜씨는 여전히 그녀의 손끝에 남아 북부를 오랜 세월 견뎌온 강인함과 날카로움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마치 북부의 차가운 한기만큼 날카로웠으며 눈을 홀리는 눈보라처럼 무자비했다.
"헙!" 짧게 헛바람을 삼킨 유진이 검을 들어 간신히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미간에 쏘아진 한 점의 궤적을 검면으로 막아냈으나 검면이 결국 이마를 강타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유진의 입가에 짤막한 비명과 함께 결국 뒤로 나자빠져야 했다. 확실히 그녀는 평범한 여인들과 달랐다. 어쩌면 프리실라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약함이 살의가 빠져서 그럴까? 아니면 평소 검을 멀리해서 그럴까? 조금 전의 말은 변명으로 들리는구나?"
냉소적인 목소리가 나무라는 듯이 다가왔다.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니 할 수 없었다. 대신 분함에 입술을 꾹 깨물고는 검을 들어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다시금 검을 쏘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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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이어진 서슬 퍼런 공방은 한낱 대련을 넘어설 정도로 무자비했다. 그와 동시에 급속도로 무너지는 유진...
아무래도 그녀의 말이 맞는 듯하다. 말마따나 검을 멀리했다. 아프다는 핑계로, 지쳤다는 핑계로,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검을 멀리했다. 그 결과 지금의 나약함을 만들었다. 사실 나약함의 대가는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헬리글에서 보다 더 적은 피해로 끝났을지도 몰랐다. 헬리글에서 느꼈던 절망은 나약함으로 빚어졌다.
헬리글 뿐만 아니다. 북부로 가는 중에, 그리고 북부에서까지 수많은 싸움이 있었다. 그러한 싸움에 무언가 속 시원하게 적을 찍어 누르지 못했다. 그들이 설설 기게 할 수 없었다. 회귀 전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회귀 전,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강하게 몰아붙였으나 지금은?...
갈라도에서도 라와 로아나의 힘을 빌리며 나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으나 그러한 실수가 또 반복되었다. 또 로아나의 희생을 빌려 살아남았다.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유진은 목구멍까지 치미는 자괴감에 실의에 잠겼다. 그 순간 다가온 검이 실의 빠진 유진을 나무랐다.
눈을 홀리는 그녀의 검이 갑작스레 수십 개로 늘어나는 듯했다. 무자비한 눈보라가 그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듯했고 유진은 막아야 함을 알면서도 굳어진 몸이 선뜻 움직이지 않아 탄식을 질렀다.
무자비한 검이 옆구리를 치고 지나쳤다. 오른쪽 어깨를 치고 지나쳤다. 허벅지, 가슴, 팔뚝, 그리고 머리를 쳤다. "끄악!" 짤막한 비명과 함께 유진은 검을 놓쳤다. 얼얼한 고통과 함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 몸을 크게 회전한 무리슈엘라가 다리를 뻗어와 가슴을 쳤다.
퍽! 둔탁한 음과 함께 유진의 몸이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유진은 곧장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눈 깜짝할 새에 다가온 검 끝이 눈앞에 멈춰 있었다. 이윽고 차갑게 굳어 숨을 헐떡이는 어머니를 보았다. 평소 하얀 피부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머리를 한데 틀어올렸으나 격한 움직임에 풀어헤쳐 져 있었다. 그 아래 훤히 들여다보이는 매끈한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검 끝이 곧았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녀는 분명 온 힘을 쏟고 있었으나 그녀와 달리 유진은 별다른 지친 기색이 없었다. 땀도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패배하고 말았다.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반격조차 하지 못하며 다시금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내가 여자라 온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니?"
"그,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시 검을 잡아. 난 온 힘을 다할 거야. 너도 더는 날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은 부모 사이도 뭐도 없어."
천천히 숨을 고른 그녀가 검을 물리고 물러섰다. 그녀는 지금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해 평소의 모습과 괴리감을 느껴졌다.
어머니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에 하는 수 없이 다급히 목검을 쥐고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검을 들어 보였으나 이상하리만큼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 검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이상하리만큼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신체 나이가 부지불식간에 중장년으로 늘어 버린 듯했다. 그러며 다가오는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하물며 내 몸이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지?' 이상하리만큼 대련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마침 그녀가 다시 몸을 날렸다. 처음보다 더 빠른 몸놀림은 한 마리의 암고양이처럼 재빨라 눈으로 좇기 힘들엇다.
이윽고 쏘아낸 목검에 실린 무게도 전보다 더 무거워졌다. 언뜻 그녀의 목검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검을 들어 보였다. 툭! 둔탁한 음과 함께 유진의 목검 날 부분이 살짝 파일 정도였다. 그럴수록 무리슈엘라의 숨도 더욱 거칠어졌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쏘아낸 검의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지며 이제는 섬뜩한 궤적만 보일 정도였다.
서슬 퍼런 파공성이 이어졌다. 궤적은 소리보다 더 빠르게 느껴졌다.
"핫!" 짤막하게 기합성을 터트리며 가까스로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제법 묵직해 손목이 살짝 아려왔다. 그녀는 점점 더 강해지는 듯했다. '아니.. 내가 점점 더 약해지는 걸까?' 분명 그녀에게서 빈틈이 있었으나 이상하리만큼 무거워진 몸은 노골적이게 보여주는 빈틈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했다.
답답함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몸을 움직일수록 답답함은 더욱 짙어졌다. 분명 두 눈에 훤히 보이는 틈이 이리도 뚜렷하게 보이거늘 몸이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방어하는 것조차 힘에 부쳐 어찌할 바를 모르니 이보다 더 답답한 적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순간 뾰족한 기합성이 들려왔고 달빛을 머금은 궤적이 아래에서 위로 쳐올렸다.
놀라 헛바람을 삼킨 유진이 검을 막으려 했으나 분명 보였던 궤적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며 다가오는 궤적, 그것이 뱃가죽을 찔렀다. 컥! 소리가 날 정도였고 허리가 절로 굽어졌다. 이윽고 속에 있는 것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유진은 끝내 검을 놓쳤고 그대로 엎어지며 배를 움켜쥔 채 꺽꺽거려야 했다. 이윽고 패배를 알리는 목검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벼려진 듯 바로 앞까지 다가와 최후를 알렸다. 유진은 입술을 꾹 깨물며 그녀를 보았다. 어머니는 크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다시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되어 다그쳤다.
"내가 여자라 무시하는 거야?!"
아까보다 더 격양된 목소리였다. 유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구멍까지 치미는 구역질에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내부가 완전히 진탕된 듯하다. 연실 끅끅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손이며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목검을 움켜쥐었고 목검에 체중을 기대 어찌어찌 몸을 일으켰다. 그러며 여전히 검을 겨누고 있는 그녀를 마주했다.
제법 지친 모습이었으나 고집스럽게 검을 겨눈 어머니를 보자면 이대로 멈추지 않을 듯했다. 유진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며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간신히 검을 들어 보였다.
"온 힘을 다하란 말이야!"
억울했다. 자신은 분명 온 힘을 다했다고 여겼는데 그녀에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굳어버린 근육이 도무지 마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아 더 억울했다. 마침 그녀가 몸을 날렸다. 그러며 다가오는 궤적 다급히 검을 들어 보였으나 그만큼 몸이 굼떴다.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은 근육은 이미 70대 노인의 근육처럼 흐물흐물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검을 막아냈지만, 다시금 다가오는 연속 동작에 틈을 허용했다. 한 차례 어깨를 더 공격을 허용했다. 얼얼한 고통을 느꼈다. 심지어 옷이 살짝 뜯길 정도였다. 뜯긴 셔츠 사이로 피부가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눈을 홀리는 듯한 수많은 궤적이 마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을 또 놓쳐 버렸다. 하늘 높이 날아간 검이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동시에 유진은 아릿한 손목을 움켜쥐며 그녀를 보았다. 한심스럽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다시 검을 들라 재촉하자 짜증이 일었다. 더욱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조금씩 오기가 생기고는 했다. 연거푸 이어지는 비참한 패배는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어머니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과 달리 멋대로 움직이지 않은 몸에 짜증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온 힘을 다하라며 재촉하는 목소리가 가장 자신을 한심스럽고도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를 악문 유진은 신경질적으로 발을 내디뎌 널브러진 목검을 움켜쥐었다. 다시 검을 겨누었다. 그러며 이어진 대련, 서로의 경쾌한 검술이 화원을 갈랐고 바람을 갈랐다. 그러며 경쾌한 소리가 이어지며 제법 오랜 시간 실전에 가까운 대련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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