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1158화 (1,158/1,410)

〈 1158화 〉 분란의 씨앗

* * *

­분란의 씨앗 ­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카나리아 필로아의 걸음걸이는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전보다 훨씬 행복한 나날의 연속을 만끽하고 있었다.

물론 전처럼 시중을 들어줄 하녀도 없었고, 나름의 북부에 귀족이었으나 그러한 직책조차 사라져 버린 지금, 그녀는 오히려 지금의 생활이 훨씬 편안했다. 오히려 억압으로 다가오던 누군가의 시중, 귀족이라는 무거운 직위, 이미 몰락한 가문과 영지, 하물며 언제나 우울하고 절망만 가득한 북부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던가?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중충한 북부의 눈보라 속에 도망칠 수 있어 기뻤다.

무엇보다 유진 슈리엘, 아니 이제는 주인님이라 불러야 할 사내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는 분명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다.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물며 제국은 나아가 슈리엘 저택은 따스했다. 여기저기 화사한 웃음이 만연했다. 저택 내부의 가족들부터 기사들 하물며 하인들까지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그들 사이에는 끈끈한 유대가 있다고 할까?

분명 고독한 북부와 달랐다. 물론 그러한 웃음 뒤에 그림자도 있을지도 모르나, 그러한 그림자 따위 본래 북부에서 느꼈던 구정물처럼 우중충한 그림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매일 하루하루 기대감과 함께 일어나고는 했다. 조금의 피로감도 느끼지 않았다. 이것이 행복일까? 말마따나 이것이 행복이라면 카나리아 필로아는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여겼다.

별안간 옛 기억을 상기해 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매일 다음 날이 오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던 나날을, 하루하루가 비수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나날을, 고독하고 괴로웠던 그때, 그 시간의 절망, 간혹 죽음이란 단어가 무섭기도 해, 자는 도중에 홀연히 이 세상에 사라지길 빌기도 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르다. 행복하다. 기쁘다. 이곳이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이제는 밤이 오지 않기를 빌기도 했다. 지금의 따스함이, 웃음이, 끈끈한 유대감이 너무나 따듯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아! 폭신한 침대 위에 누워 매일 다음 날이 기다려지느라 밤잠을 설칠 때도 있었다. 그러며 사귄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행복 속에서 천천히 잠에 빠진다.

약속대로 전폭적인 지원에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이든 배울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만큼 여유가 있기 때문일까? 아니다. 그러한 여유뿐만이 아니었다. 슈리엘 가문의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배려심이 몸에 배어 있다고 여겼다.

그래! 이들은 여느 귀족과는 다르다. 여태껏 만난 오만하고 잔인하며 이득만 취하던 귀족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멍청하게' 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착하다는 건 아니었다. 마치 사제처럼 교황이나 성녀처럼 수많은 사람을 위해 자신의 것을 모두 내놓을 정도로 희생적인 사람들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이렇듯 인연이 닿는 이들에게는 진실 된 따스함을 건네주는 점이 여느 귀족과 달랐다.

적어도 북부의 그 개인주의적 성향보다는 나았다. 그렇다보니 카나리아 필로아에게 슈리엘 저택은 천국이나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이자 행복이지만 그렇다고 아쉬운 점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너무나 과분한 생활에 무엇이 아쉬움이 남을까? 사뭇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제는 주인님이라 할 수 있는 유진 때문이었다. 결국, 그와 나누었던 그날 밤, 카나리아 필로아와 유진은 그 찰나의 불나방과 같은 관계는 그저 실수로서 또한, 찰나의 충동으로 벌어진 사고로 생각했다. 카나리아 필로아는 그에게 잊겠다고 전했다.순전히 그를 위해서...

한편 그에게서는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카나리아 필로아는 괜찮았다. 아니 괜찮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하지 못했다. 사실 거짓말을 해버렸다. 죄송스럽게도 그를 잊지 못했다. 그의 다정한 손길과 부드러운 입술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짜릿한 전율 속에 노닐던 황홀경을 감히 잊을 수 없었다.

처음으로 쾌락이란 것을 알았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로부터 배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황홀했던 그날 밤, 다정한 손길, 부드러운 목소리, 매혹적인 입술, 연쇄적 폭발을 일으키던 쾌락...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저택에 돌아온 이후, 그는 일말의 여지도 하물며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랬다.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잊겠다고, 절대 피해가 가지 않겠다고 그에게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이리도 아쉬움이 남을까?

왜 그렇게 미련이 남을까? 애석하게도 그는 손을 뻗어주지 않는다.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 자신은 여성으로서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럼에도 자그마한 욕심이 아쉬움을 남긴다. 미련이 마음의 자그마한 상처를 남긴다. 간간이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무척 아프고 입가가 씁쓸하다.

간혹 그를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때론 넋을 잃고 그를 마주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곁에는 카나리아 필로아라는 여인 따위는 발끝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잉태했다. 곧 어머니가 될 여인이다. 그럼에도 그 미모가 조금의 흠집도 가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처음 초췌하고 야위어 위태로웠던 모습일 때에도 그 미모가 하늘에 닿았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던 여인이다. 그러나 다시금 건강을 되찾고 활발해진 모습을 보자니 그 미모가 말마따나 하늘에 닿은 듯하다. 이런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르다. 감히 닿을 수 없다. 너무나 그 격차가 심해 감히 그녀를 질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아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미모부터 시작해 그 고귀함까지..

아무래도 집의 안주인 또한 공작부인이라 불리는 여인을 닮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신에게 있어 귀족이라 함은 반드시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이상향에 가까운 여인, 무리슈엘라, 그랬다. 엘리시아는 그의 어머니를 쏙 빼닮아 있었다.

카나리아 필로아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제국의 두 명의 꽃이 있다고 한다. 한 여인은 황후 아리아 시엘르 하이란을 말하며, 또 다른 한 명은 무리슈엘라 드왈즈 슈리엘을 말한다고 했다.

공작부인 무리슈엘라...

그녀의 명성은 북부에서도 퍼져 있었다. 아니 두 여인의 명성은 북부를 넘어 이미 모든 나라에 퍼져 있을 테다. 그 아름다움, 고귀함, 무엇보다 황후와 비견될 정도의 무리슈엘라라는 여인의 소문은 특히 북부에서 더욱 유명하다. 그녀의 본가 일라일라 가문은 사실, 가문이라 하기에도 모호할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자신과 비슷한 변방 하원 귀족의 가문이었다.

듣기에 기사의 가문으로서 전쟁 때 제법 큰 업적을 쌓았으나 끝끝내 대부분 전사하고 난 뒤 패잔병으로 남은 가문이었다. 하긴 결국, 북부와 제국이 동맹을 맺었으나 엄연히 따지고 보면 북부의 패배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살아남았다 한들 그저 패잔병에 불과했다. 여차여차 일라일라 가문 역시 가까스로 소수 인원만 전쟁통에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들었다.

그렇다 보니 친인척이라고는 아무도 남지 않은 전쟁의 피해자 가문이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슈리엘 가문과 비슷하다. 슈리엘 가문 역시 오랜 전쟁으로 그 친인척들이 단명했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일라일라 가문은 하원 가문으로서 딱히 알려진 바가 없는 볼품 없는 가문이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가주마저 병상을 벗어나지 못해 일찍 여위어 몹시 어린 나이에 그녀는 가문의 뒤를 이어야 했던 몹시 불우했던 여인이었다. 그것이 무리슈엘라였다.

어렸을 적부터 무리슈엘라는 가문의 뜻을 따라 기사가 되길 희망했다고 한다. 가문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궁전의 여인들로 이루어진 기사단 설원의 꽃이 되길 희망했다고 한다. 심지어 시험까지 준비했다고 했고 그녀는 제법 검술로서 재능이 뛰어났다고 했다.

그러던 찰나 그녀에게 새로운 운명이 다가오게 되었다. 마침내 슈리엘 가문과 연이 닿았던 것이다.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정전 협정을 끝내고 처음으로 동맹 협정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기억했다. 그곳에서 슈리엘 가문이 참석했으며 당연히 다이크 슈리엘도 지루드 슈리엘과 함께 참석했다. 그곳에서 다이크 슈리엘은 무리슈엘라를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터 다이크 슈리엘의 일방적인 구애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며 차츰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어찌 보면 적국의 가문이라 할 수 있었고 북부를 패배로 이끈 적국 그것도 수장의 가문이었으나 무리슈엘라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고 한다.

이어지는 구애에 끝끝내 받아들인 여인 무리슈엘라는 다이크 슈리엘과 함께 제국으로 향했다. 세세한 부분은 빠졌으나 큰 틀은 대체로 이러했다. 그러므로 무리슈엘라는 하위 귀족에서 제국의 공작부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분명 신분의 차와 북부와 제국이라는 지역의 차가 있어 반대도 심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무리슈엘라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못마땅함을 즉시 철회했다고 한다. 눈이 멀 것 같은 아름다운 미모와 더불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느껴지는 기품을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천상 귀족이었다. 마치 하늘이 왕가의 혈육을 점지여 준다는 말처럼 무리슈엘라 역시 하늘이 점지여 준 천상 귀족이라 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