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5화 〉 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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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은 짧으나 충격의 여운은 길었다.
말마따나 굳이 길게 대화를 나눌 필요 없었고 시간도 부족했다. 자칫, 본래 성녀가 있는 곳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을 다른 추기경이나 그녀를 지키려는 기사가 눈치챈다면 작금의 문제는 제법 크고 소란스럽게 번질 것이다. 하물며 이러한 비밀 통로가 그들 모르게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된다면 그 역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 마냥 대화는 빠르고 조급하게 이어졌다. 굳이 시답잖은 농담이며 구구절절한 예의는 축약했다.
그저 유진이란 사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이리스는 빠르게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물며 아무리 성녀라 불린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쉬이 감당할 수 없는 부탁이었다. 차마 확답을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유진은 그런 자신을 회유하기 위해 모든 비밀을 서슴없이 밝혔다. 최대한 간추리긴 했으나 로아나라는 존재, 나아가 갈라도의 존재에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그만큼 그가 얼마나 급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내용적인 면에는 군데군데 빈 곳도 있었고 의아한 부분도 있었으나 대략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라기보다는 주입식으로 머릿속에 그의 사정과 성배가 필요한 이유를 억지로 집어넣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작금의 복잡함이 더해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교단이란 곳에 진정한 목표를 들었다.
이번에도 확신할 수 없으며 그게 진실이라고 믿기 힘들었으나 옆에서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모를 황후가 유진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유진을 믿어도 좋다고 했다. 왠지 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면 이상할까?
간간이 조급함을 내비치는 황후의 모습과 더불어 그녀의 눈빛이 간혹 유진이란 아이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차마 그녀조차 숨길 수 없는 무언가 또 하나의 감정을 담은 듯했다. 물론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섣불리 추론하고 싶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 둘 사이에 어떠한 만남이 계기가 되었고 대화 때마다 간간이 전해지는 '거래' 라는 모호한 단어로 진실을 얼버무리고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시움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성배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성배에 달린 보석을 칭했다. 그러며 유진은 두 개의 보석을 보여 주었다.
하나는 황후의 목걸이였고 모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가장 놀랐다. 여태까지 이어진 대화 내용도 놀랍긴 했지만, 황후가 대대로 내려오는 목걸이를 그 정통과 근본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목걸이를 친히 유진에게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는 다시 한 번 '거래' 라는 단어로 얼버무리니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이어 또 하나 보석은 진녹색의 그윽함이 가득했던 보석이었다. 이 역시 심상치 않은 곳에서 얻었다고 하는데 유진이 말하기를 북부에서 세 여인 다르게는 세 명의 주술사 혹은 예언자라 불리는 이들에게 받았다고 들었다. 그러므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고도 한다. 마치 자신처럼 신탁을 받은 사람처럼 말이다.
아이리스도 모를 수 없는 이들이었다. 물론 예언자의 궁이라는 곳에서 나올 수 없었기에 직접 만나본 적은 없으나 교황님에게 듣고는 했었다. 그들의 오묘함은 하늘에 닿아 주술사이면서도 신의 대리인 즉 성녀나 교황과 같은 위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제안이 따랐다고 한다. 북부의 조언자로서 반신의 위치에 올랐으나 결국, 예언자의 궁에서 나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들었다.
이렇듯 어렸을 적, 그들이 북부 왕의 조언자라고 들었을 때,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북부의 왕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들을 영접할 수 없다는 소식에 실망하기도 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정말 그러한 존재가, 심지어 예언자의 궁에서 늙지도, 죽지도 않은 반신에 가까운 존재들이 정말 있는지 의심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심해의 돌이라고 칭하는 유물을 보았을 때에는 차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세 명의 여인과 만나면서 들었던 경험을 말해주었을 때에는 경이로웠고 신을 향한 찬미를 느꼈다. 무엇보다 유진이라는 사내가 어떠한 의무와 사명을 신께 받았는지, 무엇보다 여태껏 내려온 신탁의 중심이 누구였는지 아이리스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황후의 목걸이, 태양의 돌. 혹은 태양이라 불리는 보석과 심해의 돌이 함께 공명하는 것을 본 순간, 그 내면의 거대한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보았다.
척 보기에도 몹시 위험한 힘이었다.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으며 그 힘의 근본이 도통 어디에서 파생되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하나하나가 거대한 힘을 갖고 있었다.
어째서 몰랐을까? 왜.. 애초에 알아챌 수 없었을까?
고대 시대 때부터 전해진 성배가 어째서 갈라도의 보물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일까? 별안간 성배의 유리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해졌다. 아무래도 교회로 돌아간다면 곧장 성배의 탄생이나 유래를 찾아봐야 할 듯싶다. 그나저나 또 다른 부분에 의문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거래' 라는 단어로 얼버무리는 둘 사이에 묘한 감정을 아이리스는 의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도대체 어떠한 거래가 있기에 그녀가 대대로 궁전에서 내려오는 가보를 그에게 주었을까?'
본디 황후 아리아는 매번 그 목걸이를 착용하고는 대외적 활동하고는 했었다. 아이리스 역시 지난 한 달간 그녀가 같은 목걸이를 착용한 것을 몇 번 보았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그러한 목걸이 말고 더 화려한 목걸이를 함께 착용해 어찌 보면 수수한 목걸이는 별다른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매번 그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전혀 어떠한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가보라고는 하나 그저 볼품없는 목걸이에 불과했다. 어쩌면 지금의 때를 기다리며 곤히 잠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유진이라는 사내가 오기까지 말이다. 생각처럼 목걸이가 그의 손에 들어간 순간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새롭게 변했다. 그 기세가 가히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심해의 별과 공명을 이룩한 순간 아이리스는 여태껏 유진이라는 사내가 설명한 내용이 거짓말이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힘을 가진 것을, 정통과 근본으로 가득한 목걸이를 순수하게 타인에게 주었다는 황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황후의 욕심을 그녀 역시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시 본래의 의문으로 돌아갔다. '거래' 그 단어가 자꾸 입가에 맴돌게 된다.
차마 묻지는 못했다. 아직 그것을 물어볼 때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거대한 힘이 담긴 듯한 갈라도의 보석 혹은 유물이 두 개나 더 있었고 하나는 북부 셀리엘 가문의 영애인 프리실라라는 여인에게 있다고 들었고 또 하나는 무쥬엘라에 그것도 발키리와 그로니악에게 있다고 들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자신과 만난 이유로 성배에 있는 어머니의 별이라는 보석을 부탁했을 때, 아이리스는 어딘가 모르게 불길함을 느꼈다.
기묘한 힘이 실린 보석 그리고 갈라도 또한 세상을 지금 떠들썩하게 하는 교단 마지막으로 유진 슈리엘이라는 이들이 한데 엮어 무언가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 것 같았다.
그것도 좋지 않은 쪽으로 말이다.
아이리스는 차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성배에 자신이 모르던 힘이 담겨 있었다고 한들, 오래전부터 옛 신의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컵으로 여전히 엘리시움의 교황청 최고층에 오직 교황과 성녀만이 출입할 수 있는 기도실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도 마음대로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마음대로 바깥으로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그게 아무리 성녀라 할지라도 말이다. 옆에서 황후는 어떠한 보상도 하겠다는 말을 했으며 유진 역시 로아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아이리스도 마음이 아팠다. 유진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기에 말마따나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로아나는 소아렌에서 아리사와 함께 있던 아이였고 나름의 친구로 여기던 이들이지 않았던가? 그녀가 희생으로 유진을 살렸다는 이야기와 이번에는 유진이 그녀를 위한 처절한 노력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야기에 동정하고 연민을 느끼며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확답을 줄 수 없었다.
결국, 교황님과 대화를 나눈다는 말로 대화를 끝냈고 다음에 조금 더 여유가 있을 때 다시 만나 세세하게 대화를 나누길 바라며 그렇게 전초전과 같은 만남을 파했다.
아이리스는 다시 소피아의 안내를 따라 본래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피아는 이미 이 미로와 같은 방과 방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곳을 훤히 꿰고 있는 듯이 머뭇거림이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여전히 감정이 결여된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음이 복잡했다. 소피아도 그러하고 유진의 부탁도 그러하고 하물며 유진과 아리아 사이에 나눈 거래도 복잡함을 더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게 있었다. 그것은 유진 때문이었다. 그가 갈라도에서 사악한 것을 가지고 왔다는 점이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 않아도 꿈을 꾸지 않았던가 비명이 끊이질 않고 눈물이 피로 변해 강이 되고 또 바다가 되는... 유진을 만나고 대화를 나눈 순간, 아니 정확히 그가 내면에 품고 있는 태양과 그 태양 근처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이리스는 그 무언가를 본 순간 거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러며 묻자 유진이 불경스럽게도 그의 이름을 말했다.
"포마트...."
갈라도의 악마를 그가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다. 그 악마가 근래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교단이란 존재보다 더 두렵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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