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6화 〉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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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저택에 묘지가 있을 수 있을까? 본래라면 저택에 묘지를 세우지는 않는다. 애초에 마당에 묘지를 만들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무리 영지가 협소하다 할지라도, 가문에서 배출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사는 곳에 묘지를 만들지 않는다.
하물며 타인의 시선에 유달리 신경 쓰는 귀족이라면 더더욱...
본래 귀족의 묘지는 나름의 특별함을 살려 짓는다. 따로 땅을 산다거나, 혹은 산을 하나 매입해 그곳을 묘지로 사용한다. 간혹 화장을 한다든가, 바닷가 근처에 있다면, 정통 방식에 따라 수장을 이용하기도 한다. 더욱이 가문에 중요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풍수 지리학적으로 좋은 토지를 사들여 그곳을 가문의 묘지로 사용하고는 했다.
심지어는 묘지에 적합한 땅을 봐주는 장의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한 점은 사시사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북부도 그러했으며 사막이 바로 앞에 붙어있는 휴센도 그러했다. 하물며 엘리시움 역시 집 근처에는 묘지를 짓는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땅을 망가트리고 그 땅 위에 음기를 드리워지게 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꼴이 도대체 무슨 일이람? 어찌 귀족 가문에 묘지가 있을까? 그것도 이렇게 허술한 묘지가? 하물며 그 수가 손가락과 발가락을 전부 이용해도 넉넉지 못하리라...
프리실라는 크나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눈앞에 드리워진 저택의 뒤편은 온통 묘지였다. 흙을 파고 덮은 봉분이 분명하다. 심지어 타원형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삐뚤삐뚤했고 중구난방이었다.
본래 죽은 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정성이 담겨야 하나 봉분을 만든 것만으로도 그 정성이 보이지 않았다. 묘지는 그저 작금의 시체를 대충 치워내기 위함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러한 봉분이 왜 이곳에 있는 걸까? 하물며 누가 죽었기에 이리도 많은 묘비가 저택의 뒷마당을 전부 차지하게 되었을까?
묘비명조차 쓰여 있지 않다. 이름 없는 묘지에 그 충격이 이만저만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살아있는 이에게도 좋지 않을뿐더러 죽은 이에게도 가혹한 짓이었다. 어쩌면 작금의 흐르는 귀기를 비롯해 우울함은 억울한 죽음에 이르러 구천을 떠도는 이들의 영혼 때문이 아닐까?
저며오는 한기에 저들의 원한이 실려 있는 듯하다. 더욱이 작금의 을씨년스러움을 가중시키는 빗줄기와 한기 속 짙게 내려앉은 어둠에 불어오는 바람의 음성은 서글픈 귀곡성처럼 느껴진다.
쿵쿵! 충격에 요란스럽게 뛰는 심장을 달랬다. 그렇지 않아도 또 주변의 순찰을 도는 흑기사들이 빗줄기 사이로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등불이 보여 프리실라는 곧장 이름 모를 봉분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여야 했다.
저벅, 저벅, 진창이 된 바닥을 걷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이윽고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어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끼익끼익, 등불이 흔들거리며 내는 마찰음이 이어지며 수군거리는 소음이 들린다. 그들이 착용한 복장이 흑색의 갑옷이라 그럴까? 등불이 홀로 두둥실 떠올라 움직이는 듯하다.
꼭 도깨비불처럼 보이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모르겠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컥 삼킨다. 마침 다가온 몇몇 기사들이 묘지가 즐비한 곳에 이르렀다가 잠시 멈춰 선다. 이윽고 짧게 혀를 차더니 신경질적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러며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만 오면 꺼림칙해." 그러자 다른 사내가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지, 갑자기 시체가 저택에 쏟아져 나오면 분위기가 더 최악으로 치닫는다잖아? 묘지는 차츰 치운다고 했어. 그때까지 참아야지 뭐. 그나저나 확실히 공작의 저택이라 그럴까? 하인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내 낄낄 웃어댄다. 그러며 서슴없이 그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묻는 일이 고역이었다며 시시덕거리며 지나쳤다. 프리실라는 가만히 그들의 목소리를 들며 바드득 이를 갈았다.
그들의 기척이 점점 멀어진다. 그러나 충분히 그들의 말을 듣고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비로소 묘지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들끓는 분노를 잠재우기 힘들었다.
그랬다. 한때 저택에 하인들, 일꾼들이었다. 저들은 분명 그들을 전부 죽여 이곳을 묘지화시킨 것이 분명하다. 저들의 잔혹함에 놀라 신음이 새 나오려는 것을 다급히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한 그들의 한이 느껴지는 듯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귀곡성이 점점 서글퍼진다. 살갗에 닿는 한기는 그들의 한처럼 선명하다. 그러므로 슬픔을 느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아무런 죄 없는 이들까지 전부 죽여야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어떠한 이유로 이토록 많은 피를 보려는 걸까? 충격과 경악으로 빚어진 슬픔은 곧 이러한 일을 자행한 흑기사들을 향한 분노가 되었다.
치를 떨듯 몸을 부르르 떤 그녀는 그들이 사라진 곳을 보며 바드득 바드득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저들을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한 손은 이미 허리춤에 찬 검에 이르기도 했다.
유진이 선물한 검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검의 이름은 여전히 그랑베르였다. 사실 여러 새로운 이름을 생각해 보았으나 여전히 미련이 남은 자신의 첫 애검이자 스승님에게 받은 검을 기리기 위해서 또한 익숙함을 위해서 그랑베르라는 이름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럴까? 검은 오래 사용한 것 마냥 손에 착 감긴다. 이미 익숙해져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감이 샘솟는다. 은밀하게 그리고 단칼에 저들을 베어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주변을 감싸는 원한과 서글픈 귀곡성을 달래기 위해 복수해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멈칫한 걸음은 섣부르게 나서지 못했다. 이윽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그럴 수 없다. 이대로 허무하게 이목을 집중시킬 이유는 없었다.
프리실라는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하며 다가오는 귀곡성이며 원한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나중에.. 언제고 나중에 꼭 되갚아 주겠어요.'
북받쳐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그들이 완연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을 무렵, 불어오는 원한의 귀곡성을 향한 죄책감을 뒤로 묘지 사이를 지나쳤다. 부서져 있는 나무들이며 바닥에 짓밟힌 꽃잎이 가득하다. 본래 화원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 황량한 묘지로 변한 이곳은 꼭 네크로멘서의 실험실처럼 보인다. 프리실라는 다시 한 번 묘지로 변한 화원을 쭉 훑고는 이내 슬픔과 미련을 뒤로 시선을 틀었다. 이윽고 그녀는 화원으로 이어지는 저택의 뒷문에 이르렀다.
다행히 뒷문은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앞은 꽤 경비가 삼엄하거늘 뒤편에는 그다지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 하물며 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조차 없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문을 타고 어두컴컴한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어떠한 기척도 없다. 그저 텅 빈 것처럼 고요할 따름이며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귀곡성이며 부슬부슬 내리는 빗줄기 소리가 전부였다.
이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잠입은 아직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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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한층 더 우울했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풍겼고 창틀이며 바닥에 먼지도 가득했다. 더욱이 기름을 가르지 않아 나가 버린 전등도 꽤 많았고 거대한 저택이 텅 비어 있어 정말이지 폐가를 연상케 했다.
도통 믿을 수 없었다. 어찌 한 나라의 귀족이라는 재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가문이 이리도 폭삭 망할 수 있을까? 어찌 이렇게 망가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게 아무리 교단이라는 전대미문의 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의 음흉함이 오랜 세월 제국의 빛이자 검이 된 가문을 이리도 쉽게 무너트릴 수 있었을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교단이라는 음흉한 존재들을 제외하고 또 다른 이유가 있기에 이렇게 급속도로 무너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을 하물며 그 진위를 모르지 않았다. 덩달아 무리슈엘라가 어째서 침묵으로 일관했지, 한편으로 다이크 슈리엘이 어째서 침묵했는지 사뭇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이 진위를 찾을 필요도 없다. 안타깝게도 거짓말이 아니었으니...
생각하는 것조차 씁쓸함이 밀려오는 진실이다. 몹시 괴로운 진실이며 가슴 한편이 몹시 쓰라린 고통이다. 그러며 다가오는 배신감은 여전히 거대하다. 그들을 향한 원망 역시 선명하다.
무시하려고는 했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남는 충격적인 진실은 끊임없이 프리실라에게 무거운 번뇌이자 배신으로 다가오게 했다.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북부에서도 오래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옛 풍습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그러한 관계가 현시대에 일어날 수 있는지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무리슈엘라가 직접 밝힌 진실에 그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았던가?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가? 그러나 떨쳐내지 못했다. 여전히 가슴 한켠에 남아 배신으로 빚어진 원망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원망은 결국 거짓말로 일관한 유진을 향하기도 했고, 스스로 자신이 먼저 덮쳤다던 무리슈엘라를 향하기도 했다. 그들을 원망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들을 원망하며 마음의 번뇌를 베었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평생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선명하게 전해지는 배신감을 떨쳐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며 곰곰이 생각했다. 유진과의 관계, 그와 나누는 모든 일들, 이 모든 것을 지워내야 할까? 하는 고민까지 이르렀으나 그럼에도 미련이 남는다 .참으로 아둔한 마음은 배신감에도 미련을 남았고 여전히 그를 원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을지...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 사라 드 셀리엘에게 보란 듯이 잘 살아 보겠다고 했다. 셀리엘 가문의 저주를 떨쳐내 보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삐걱 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애석한 여인의 마음은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고집스럽게 유진을 향한 마음이 아직도 선명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얼한 충격보다 여전히 유진을 향한 집착도 덩달아 커지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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