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8화 〉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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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묻겠네. 아직 미완성된 실험이야, 자네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네. "
"상관없어. 이대로는... 이대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내 의지는 확고하네.. 자네의 실험 참가하게 해주게."
단호한 대답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다. 슈른은 난처하다는 듯한 시선으로 슬쩍 그를 돌아보고서는 다시금 층계를 내려갔다. 끝이 보이지 않은 지하 통로였다. 양옆으로는 사막의 모래가 스스스 기묘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다. 하늘 위로는 내리쬐는 뙤약볕이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었으나 지하로 갈수록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사이로는 서늘함이 맴돌았고 축축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막에서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다. 슈른은 마침 옆 벽에 모래가 쏟아지지 않도록 세워둔 지지대에 걸린 횃불을 들어 보이고는 다시 아래로 향했다.
저벅저벅, 고요함 속에 정과 슈른의 걸음은 한없이 아래로 향했다. 마치 지옥의 입구로 향하는 것처럼 거대한 구덩이 속 어둠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곧 어두컴컴한 지하 끝에 자그마한 빛들이 맴돌고 있음이 보인다. 별들이 내려앉은 것 마냥, 별안간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치니 슈른의 횃불이 불길하게 춤을 추며 화르르 섬뜩한 소리를 냈다.
잠시 멈춰 섰으나 다시금 나아간다. 침묵은 길어지며 무거운 분위기 속 공기는 농밀해지며 긴장감이 일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은 나지막한 소리를 들었으나 확실하지 못했다. 바람이 내는 소리인지, 혹은 쏟아지는 모래를 받치고 있는 지지대의 소음인지 아니면, 저 아래에 닫힌 차원의 문을 두고 골똘히 고민하는 이들의 목소리인지는 말이다.
적어도 아래로 내려가면서 들려오는 섬뜩함은 점점 더 가중되고 있다. 그때 슈른의 탁한 목소리가 긴장한 정의 귓가에 이어졌다. 흠칫 놀라며 슈른을 바라보니 그는 여전히 경고하고 있었다.
"생각과는 많이 다를 텐데 괜찮겠나?"
정은 말없이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럼에도 슈른의 굳은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실험 자체가 성공할지조차 의문이야. 애초에 아르킨 아크마도 헬리글의 탈락자를 통해 최후의 실험을 이어가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지. 자네도 알잖나? 헬리글이 만들어지기 전, 아르킨 아크마는 유진 슈리엘 손에 죽게 되었으니.. 뜻하지 않은 죽음이었어. 불필요한 죽음이기도 했고, 참으로 안타까운 인재였네."
"그래도 자네가 그의 실험자료를 버리지 않고 들었어. 그럴만한 이유는 그만큼 가치가 있어서 아니겠나?"
슈른이 씁쓸하게 웃는다. 그러한 웃음에 오히려 긴장감이 가중된다.
"흐음.. 맞네. 그랬지... 충분히 가치가 있어. 그래서 아르킨 아크마는 그렇게 일찍 죽어선 안 되는 녀석이었어. 연금술사로서는 이미 최고 권위자라 할 수 있어 미래에 더 중요한 일을 담당할 재목이었네. 하물며 의학 쪽으로도 난 니플하임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지.. 애초에 그 녀석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더라면, 멍청하게 직접 슈리엘 저택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했네."
다시금 멈춰 섰다. 그러며 정을 보던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짧게 혀를 찼다.
"차라리 포기하고 도망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네. 때론 자신의 주제를 알고 물러서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그렇지 못해 죽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교주는 도망치는 걸 바라지 않아. 그의 성격은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더욱이 아르킨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호언장담했어. 멍청하게 주제도 모른 채 말이야."
슈른이 쓰게 웃는다. 정체 모를 웃음이다. 여러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웃음은 아르킨을 탓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교주를 탓하는 것 같기도 하다. 전과는 사뭇 다르다. 적어도 교주의 말이자 명령에 복종했던 모습은 아니다.
어찌 되었든 교주의 성격은 그러했다. 차마 아르킨 아크마를 비롯해 다른 몇몇이 기어코 도망치지 못했던 이유, 계획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이유를 상기하면 언제나 교주가 있었다. 그의 성격이 본래 그러했다. 지는 걸 죽어도 싫어했고, 도망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불같은 성격에 어찌 보면 폭정으로 교단을 다스렸다. 그렇기에 지금, 교주가 방에 두문불출하는 작금의 상황에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는 이들도 꽤 많았다.
한편 슈른은 생각했다. 어쩌면 교주가 우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버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의 존재가 오히려 계획에 불필요한 죽음을 강요한 것이 아닌가.... 혹은 그가 모든 실패에 원흉은 아니었을까?
몹시 미세한 의혹은 자그마한 불씨가 되어 별안간 확 타올랐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씨는 사그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진다. '교주가 오히려 교단을 망가트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 교주가 정말로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재목일까? 확신할 수 없는 의심...
곧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교주에게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유진 슈리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겠는가? 유진 슈리엘이라는 특이성이 여태 모든 계획이 망가지고 말았다. 그의 등장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무언가 이상하게 꼬인 것은 오직 유진 슈리엘이라는 존재 하나 때문이다. 그가 없었더라면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테지.. 이렇게까지 조급하게 진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진 슈리엘의 존재와 연거푸 이어진 계획의 실패 끝에 교주라는 두려움의 상징이 바로 뒤에 있기에 불필요한 희생이 있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맞아... 교주는 도망치는 걸 바라지 않지... 어쨌든, 아르킨 아크마의 실험 자료를 회수한 건 나였고 역시 버릴 수 없었던 것도 맞아. 확실히 그는 그런 쪽으로 천재적이라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었네. 쿤이 교단에 필요했던 것처럼 아르킨 역시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했어. 너무나 일찍이 죽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네."
쿤와 아르킨, 슈른과 정의 표정이 한없이 씁쓸해진다. 말마따나 둘의 공통점은 교단의 미래에 중요한 이들이라는 점이지만, 너무나 일찍 죽었다는 점이다. 짧게 혀를 차며 다시 깊은 어둠 속으로 향했다.
그렇게 둘은 지하 끝에 이르렀다. 겉에서 보기와 달리 꽤 많은 이들이 지하에 있었다. 문을 발견하고 공사는 끝났으나 계속해서 토사가 밀려올 수 있기에 지탱해주는 지지대에 유지보수가 필요했다. 물론 그러한 인부를 제외하고도 비밀이 새 나가지 않도록 그들을 감시하는 기사들을 비롯해 학자들 역시 문을 앞에 두고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에 여전히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은 여전했다.
대부분 문을 열기 위해서는 특별한 열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열쇠는 유진 슈리엘이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모든 미스터리의 끝에는 유진 슈리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지금 다이크 슈리엘이 이곳에 있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많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 식사까지 여기서 해결하는 교단의 학자들을 보며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슈른은 곧 옆으로 난 작은 토굴로 향한다. 그의 걸음은 조금씩 빨라지고 더욱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또 하나 등장하는 토굴 입구가 있었고 옆으로는 흑기사가 지키고 있다.
철저하게 관계자 외에 출입을 금한 곳이다. 정 역시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그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흑기사를 지나쳐 다시 아래로 향했다. 본래 발견한 '문'보다 더 깊은 아래로 향했고, 알 수 없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서늘함은 더욱 짙어져 살갗이 오돌토돌 닭살이 일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정이 다시금 물었다.
"실험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었던 거지? 교주가 허락한 건가?"
슈른은 잠시 멈칫했고 말을 아꼈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허락했지.." 라는 말로 어영부영 넘기고는 하나의 문앞에 이르렀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려서 도착했다. 슈른은 품에서 하나의 쇠로 된 열쇠를 꺼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을 열고서 문을 열었다. 덜커덩, 요란한 소음과 함께 위태로운 터널이 살짝 흔들리며 흙더미가 떨어졌으나 무너지진 않았다.
초조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어느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슈른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두꺼운 철문 안으로 향했을 때였다. 온통 어두컴컴한 공간으로 좁은 토굴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선선한 바람을 차갑게 변했고 알 수 없는 알코올 향과 더불어 암모니아처럼 코를 톡 쏘는 듯한 향이 뒤죽박죽 섞여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슈른은 횃불을 든 채 익숙하게 나아갔다. 그리고는 그가 손가락을 딱 튕기는 순간이었다.
지잉... 기괴한 소음이 이어지더니 주변을 가득 채우는 마법적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 순간, 자그마한 빛 무리가 그의 손가락을 타고 곳곳에 맺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정은 교단 내에 간부라 할지라도 한 번도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미지의 공간이자 슈른의 개인 공간을 볼 수 있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더 거대했고 꽤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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