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1332화 (1,332/1,410)

〈 1332화 〉 과거와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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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안간 차가운 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두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노란 불빛이었다. 무엇일까? 흐릿한 시야와 몽롱한 정신은 도통 형체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전 차가운 물줄기에 갈증이 조금 달래지는 기분일까?

그때 무언가 다가온다. 차마 반응할 수 없다. 위험의 경종이 울렸으나 무언가 강하게 몸을 옥죄고 있었다. 기어코 퍽! 둔탁한 음과 함께 고개가 홱 돌아간다. 입가에 핏물이 터진다. 코가 얼얼하고 축축한 것이 코피까지 흐르는 듯했다. "흐으으..." 나지막이 신음을 토해낸 뒤 다시금 차가운 물이 얼굴을 끼얹는다. 번쩍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듯하나 서서히 초점이 맞춰진다.

그러며 마주한 이를 보며 다시 옛 기억이 떠오른다.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 계속해서 유진을 괴롭힌다. 나직이 신음 섞인 웃음을 토해낸다. 몸을 들썩이며 앞서 팔짱을 낀 사내를 마주한다. 분명 회귀 전과 지금은 시간 때가 다른데. 과거보다 더 늙은 듯한 그의 모습에 통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웃던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러며 나직이 힘겨운 웃음 사이로 말한다. "슈른.... 배아트라체..." 팔짱을 낀 사내, 슈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팔짱이 풀어지며 한 차례 더 유진의 뺨을 치려던 사내를 막아선다. 그러며 이어진 무거운 공백 끝에 별안간 슈른이 나직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게 많네 유진, 그리고 자네에게 바라는 것도 있고 말이야. 물론 자네도 우리에게 바라는 게 있을 테지? 그렇기에 홀로 이곳에 왔을 테야."

"예나... 지금이나 궁금한 게 많은 건... 다르지 않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슈른의 표정이 한 차례 더 일그러진다. 그때 그가 눈짓하니 두 명의 흑기사가 방을 나선다. 곧 유진과 슈른만이 어딘가 지하 토굴을 깎아 만든 듯한 방안에 있게 되었다. 흔한 창문도 없다. 조금의 바람도 통과할 수 없는 공간은 퀴퀴한 곰팡내와 더불어 서늘한 공기가 맴돌고는 했다.

사막인가 싶을 정도로 어디선가 서늘한 공기가 주변을 맴도는 듯하다. 그리고 귓가에 뚝뚝.. 물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고요함이 생각보다 꽤 무겁게 느껴진다. 을씨년스러운 서늘함은 곧 살갗을 타고 근육을 찢어 뼈마디조차 얼려버릴 듯하다. 살짝 몸이 떨린다. 치미는 오한은 꼭 북부에 이른 듯하다. 다시 한 번 이곳이 사막이 맞은 가 의문이다.

"아버지는 어디에 있지."

침묵을 참지 못해 유진이 먼저 적막을 깼다. 그러자 곰곰이 고민에 잠겼던 슈른이 다시금 팔짱을 낀 채 그를 마주했고 이윽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잘 있지.. 아주 잘..."

그러며 이어진 무거운 공백, 그러나 서늘한 공기는 더욱 농밀하게 변한다. 어딘가 모르게 위태롭고 불안하다. 그때였다. 유진이 끅끅 웃어댄다. 숨을 헐떡이며 나직이 웃다가 또 마른기침을 하다가 핏물이 섞인 침을 툭! 뱉어내길 반복한다. 핏물 섞인 침이 축축한 흙바닥에 툭 떨어진다.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나직이 말한다.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것처럼 뭘 그렇게 망설이지?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은 모습인데. 알고 싶은 거 아니야? 어째서 교단에 대해서 빠삭하게 알고 있는지, 어째서.... 네가 그토록 혐오하고 경멸하던 성까지 알고 있는지 말이야."

"맞네. 잔의 말처럼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순순히 물으면 말해주겠나? 도대체 자네의 정체가 무엇인지, 도대체 교단에 관해 모르는 게 없는지,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지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너무 많았네. 슈리엘 가문은 갈라도에 관해서 아무런 연관도 없었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갈라도에 관해서 알고 있었던 거지? "

봇물처럼 쏟아지는 의문점들에 별안간 유진이 나직이 웃는다. 그럴 법하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하물며 자신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인데. 그저 회귀라는 선택이 작금의 상황을 만들었다. 유진은 슈른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며 반쯤 풀린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했고 핏물을 신경질적으로 뱉어내며 나직이 말했다.

"아르킨 아크마를 죽일 때 내게 했던 말이 있지.."

"그의 이름까지 알았군..."

"내가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그의 심장을 꿰뚫면서 말해주었지. 내가 지옥에서 돌아왔다고.. 역겨운 교단의 행태에 참을 수 없기에, 지옥에서 기어 나온 존재라고 말이야. 그러며 다짐했다. 벨라리안 드 갈라도의 심장을 씹어 삼켜주겠노라고. 그나저나 교주는 어디에 있지? 여전히 뒤에 꼭꼭 숨어 있는가?"

'지옥' 이라는 단어를 되뇌던 슈른에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한 시선은 모호하게 물들어 있을 뿐이다.

의문은 커져만 간다. 아무리 생각해도 슈리엘과 교단 사이에 접점은 없다. 그러나 그는 교단에 관해서 모르는 게 없다. 자신을 비롯해 교주에 관해서도, 하물며 교단의 목표까지 그는 모르는 게 없다. 그러며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말마따나 지옥에 돌아온 것은 아닌가?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그러한 마법이 있었을까? 슈른은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회귀라는 마법은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심지어 한창 마법이 부흥기였던 마도 시대에서도 그러한 마법은 없었다.

그것은 신의 영역이 아니겠는가? 공간을 뒤틀고, 시간을 되돌리며 미래를 바꾸는 일은 감히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신의 영역이다. 더욱이 죽은 존재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나는 건 강령술사와 같은 존재도 이룩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말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걸까?

신께서 유진 슈리엘을 특별히 보살펴주고 있다는 걸까? 어째서? 그들은 어째서 유진에게 이러한 기회를 주겠는가? 마치 자신들을 막아내려는 것 같지 않은가? ...

입안이 씁쓸함이 맴돈다. 슈른은 그의 말에 진위를 찾기 힘들었다. 물론 결국, 그가 교단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더욱이 열쇠조차 드디어 교단의 손에 들어왔으나 작금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진실의 행방이 슈른의 불안함과 불길함을 자극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유진의 주변을 서성였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그를 바라본다.

한참 그의 주변을 서성이다가 다시금 물었다.

"교단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라... 그래 네가 여태껏 교단을 방해했던 것을 보자면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건 사실이지.. 말마따나 네가 무언가 마법이나 특이한 힘을 사용했더라면, 죽음으로부터 돌아왔다고 한다는 것을 믿어보도록 하지, 그렇다면 앞으로 일도 알 수 있는가? 네가 이렇게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도 계획인가? 그리고 앞으로 더 다가올 미래까지 알고 있는가?"

대답은 없다. 슈른은 그런 유진의 침묵에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튕기니 다시금 두 흑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유진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뭐 좋네! 네가 바라는 건 다이크 슈리엘의 행방이겠지? 피차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일 테니 굳이 대화를 길게 이어갈 필요는 없지, 서로 바쁜 몸이지 않겠는가? 거래를 진행해보도록 하지, 자네가 이미 알다시피 다이크 슈리엘은 우리 손에 있다. 그를 대가로 너는 열쇠로 문을 열어주면 돼."

"도서관을 말인가?"

"그거까지 아는가? 뭐 좋아. 이제는 그다지 놀랍지도 않군, 자네가 교단이며 갈라도에 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인정하겠네, 적어도 교단은 슈리엘 가문과 더는 같은 하늘에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하물며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니 이제는 숨기지 않겠어. 나는 지식의 보고를 열고 싶다. 그렇기에 네가 필요하지. 아! 이미 알고 있겠지? 자네는 미래를 보지 않았나?"

비아냥 섞인 목소리에 유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차원에서 떨어져 나간 갈라도를 이 땅에 소환하려는 건가?"

"모르는 게 없는데 왜 묻는 건가? 아니면 미래가 바뀌고 있나? 네가 아는 미래가 지금의 시간과 달라지고 있는가?"

슈른이 낄낄 웃고는 유진에게 다가가 그의 등을 툭툭 친다. 그리고는 흑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 그를 억지로 끌고 방을 나서려 한다. 흑기사에 끌려가며 유진이 다급히 말했다.

"갈라도를 지금에 이르러 소환해서 무엇하려고 하는 거지? 너희가 생각하는 갈라도는 없어. 이미 그곳은 폐허야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 불과해! 그리고 그곳에 넌 무엇이 있는지 몰라!"

안색이 파리해진다. 유진은 흑기사의 우악스러운 손길을 저항하며 외쳤다. 그러며 떠올렸다. 꿈이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분명 포마트와 만났다. 자신을 지켜주던 로아나의 태양이 사라지고 저택은 폐허가 되었고 곧 사막으로 변한 곳에서 그를 마주했다.

그의 웃음, 무언가 기다리는 듯한 모습을 보며 유진은 거대한 공포를 직면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육체와 영혼을 빼앗을 날이 다가왔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물며 그 역시 그렇게 말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닌가 지금에 생각했다. 등골이 오싹해진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긴장감이 일기 시작했다.

이윽고 들려오는 그의 조소...

그는 차원에 갇혀 있지 않으려 했다. 자신의 몸을 빌어 지금의 차원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세계수 나무가 그를 막았다. 그의 야욕과 야망을 짓밟아 버렸다. 자신을 희생해서 그렇게 차원을 넘나드는 포탈의 문은 닫혔었다. 그렇게 무너진 갈라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완전히 소멸했을까? 정말 무로 돌아간 건 아닐까?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엘리시움에서도 말하지 않았던가?

자칫, 전염병과 같은 저주가 갈라도가 이 땅에 돌아온 직후 새롭게 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갈라도는 저주에 도시가 되었어! 자칫 그 저주가 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면 이 세상도 갈라도와 똑같이 망가지고 말 거야! 너희는 갈라도를 재건하고 싶다 하지 않았나? 교주는 새로운 갈라도를 세우고 싶었던 게 아니야?"

"갈라도를 재건할 수 있다면 좋겠지.. 오랜 시간, 아버지의 아버지를 더 윗세대에서부터 우리는 우리의 얼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 교주 역시 그러하길 바랐어. 그러나 그럴 수 없었어. 계속된 실수와 실패 끝에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러며 갈라도는 사람들 기억에 천천히 사라지고 말았지.. 그럼에도 교주는 갈라도를 다시 재건할 수 있으리라 믿었네. 물론 나 역시.."

잠시 슈른의 신호에 흑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그가 다가와 나직이 눈을 빛낸다. 불현듯 그의 표정은 원망을 담기도 했고 또한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어 마저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번 세대에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바로 자네 때문이지, 결국, 또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흔적은 지워졌어. 아무리 갈라도를 전파하고, 그 근본을 전파하고 이 땅 위에 새롭게 갈라도를 세운다 할지라도 우린 그저 반역도에 불과하지, 어째서 우리가 반역도가 되어야 하는가? 오랜 세월 이 대륙 전체를 이끌던 갈라도의 후예가 이제는 아무런 근본도 없는 반역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렇기에 생각했다. 그간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는 거라고, 새롭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본래에 있던 것을 다시금 이 땅 위에 소환하기로 말이야."

"그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소환한다는 거야? 난 그곳에 최후를 보았어. 그곳에 뭐가 있는지 몰라?"

별안간 슈른이 깔깔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한참을 웃었고 이내 등을 툭툭 친다. 더욱이 그 웃음이 어찌나 기괴하게 보이는지, 마치 광기가 가득해 보여 섬뜩하기 짝이 없다. 그러며 그가 말했다.

"갈라도가 이 땅 위에 안착하기위해서는 본디 기존에 있는 걸 깡그리 밀어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혼란스러운 땅은 이제 희망은 없네,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네. 그래 그럴 바에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지, 말마따나 르나프 교단의 모토처럼 말이야. 그래 새롭게 시작이야. 새롭게 시작! 모든 혼돈의 끝에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갈라도의 후예가 아닌 진정한 르나프 교단의 신도가 되는 거지!"

"저주가 퍼지면 갈라도든 뭐든 모두가 위험할 텐데? 그곳에 어떠한 악마가 있는지 몰라!"

다급히 반박했으나 그는 오히려 웃었다. 마치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하하! 유진 슈리엘 우리가 이렇게 된 건 전부 너 때문이다. 네가 모든 것을 망친 순간, 우리도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야. 자! 가자 가서 문을 열어라! 그러면 내 자비를 내려 다이크 슈리엘을 살려주마."

또 나 때문인가.. 내가 망쳤단 말인가?

유진은 생각했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끌려가며, 슈른의 비아냥 속에 몇 번이고 '나 때문인가?' 라는 의문을 품었다. 억울하다. 지키려고 했다. 막아내려 했다. 그런데. 결국, 또 이렇게 되는 걸까? 한편 그러는 사이 보인다.

아아..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인 기이한 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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