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날 겨울, 난 죽었었다-1346화 (1,346/1,410)

〈 1346화 〉 악마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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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소아렌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하물며 헬리글에서 보았던 것과도 다르게 무척이나 밝아졌다. 더욱이 현현한 기운이 가득하다. 듣기에 최초로 네 명의 요정을 다룰 수 있는 정령사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녀만큼은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본래 헬리글에서 아르킨 아크마에 실험체로 전락해야 할 여인은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하며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감격스럽기도 하다. 운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비로소 행복을 찾은 듯하자 마침내 그녀에게 갚아야 할 빚을 충분히 갚은 게 아닐까?

다가오는 미소도 전보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느껴졌다. 유진도 그런 그녀의 손을 맞잡고는 입가에 미소를 걸쳤다. 그런데 그녀가 묻는다. "많이 힘들어?" 마치 미소 끝에 걸친 슬픔을 본 듯이..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티가 났을까? 애써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져 있다.

이런, 오랜만에 만난 해후를 괜스레 망칠 것 같다.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그나저나 미안해, 편지 한 통 보내지 않아서. 사실 보내고 싶은데..." 그러자 그녀가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별안간 품을 빌려 주었다. 그때 짤막한 탄식이 터졌다. 다시금 떠오르는 악몽과 같았던 헬리글의 기억, 그러나 그러한 기억 속에 남은 자그마한 빛이자 기둥.

그때처럼 그녀는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봐 주었고 또 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는 말한다. "괜찮아. 그리고 힘들면 혼자 아파하지 마." 그녀의 말을 들었을 때, 유진은 지난 기억의 아를란과 지금의 아를란과 겹쳐 보였고 전혀 변함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참을 수 없기에 눈물이 흘렀다.

운명은 변했다. 변한 미래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치욕스럽게 적의 손에 죽거나 괴물의 죽었지만, 그녀처럼 혹은 간신히 살아남은 가족들처럼 아직 살아남은 이들이 있었다.

미래는 변하고 운명이 변했다. 마치 거래하는 것처럼, 그러나 모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행복한 결말만 바랄 수 없다는 것도 배웠다. 그래, 모두가 행복한 결말만 바라는 건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애써 웃는다. 그러며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간혹 그녀가 물어 오곤 한다. 괜찮으냐고, "물론! 난 괜찮아." 언제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 언제나 웃음을 내비친다. 애써 슬픔을 억누르고 괜스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걸 바라지 않아 억지로 주제를 돌리고는 했다. 다행히 그런 자신을 배려해주려는 걸까? 다행히 조금 전의 눈물에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한편 그녀도 꽤 힘들었던 것 같다. 처음 이곳에 이르러 정령사가 되어 생활하는 것이, 격식이며, 예절이며, 심지어 걸음걸이부터 시작해 말투며 억양 그리고 사용하는 단어까지 바꿔야 했을 테니 말이다. 엄연히 궁전에 걸맞은 여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부터 꾸지람이 있었는지 모른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족들도 간간이 궁전에 초대되었던 것 같으나 초대받을 때마다 부담스러워 한다고 그녀는 혀를 내두르며 치를 떨었다. 유진은 그런 그녀의 불평불만에 키득키득 웃었다. 치를 떨면서도,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그녀는 소아렌에서 보았던 모습보다 훨씬 밝아졌다. 분명 변했다. 분명 행복해하고 있다. 안도했다.

잠시 둘 사이에 공백이 맴돌았을 때였다. 서로 마주한 시선 끝에 엷은 미소가 오갔을 무렵, 별안간 그녀가 배시시 웃더니 말했다.

"언제나 넌 내게 빛이었어...너라는 그늘에서 쉴 수 있었고, 다시금 시작할 수 있었어."

아...

기쁨이 번진 탄성에 입가에 진한 미소로 물들었다. 다시금 저 멀리 반짝이는 바다의 지평선을 마주했다. 아름다운 파스텔 톤의 세상, 고요한 바다에 쏟아지는 태양 빛, 마침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기분이 좋아진다. 오랜만에 보람을 느낀다.

"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거야."

유진은 키득키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틀리지 않았을까.' 회귀라는 기회 끝에 새롭게 시작한 선택, 그러한 선택 중에 틀리지 않은 부분도 있었을까?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쉬이 억누르지 못했다. 잠시 뜸을 들였고 깊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틀어 그녀를 마주했다. 그러며 말했다.

"아를란... 너도 내게 빛이었다는 걸.. 너는 알까?"

"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그녀를 보며 유진은 곧 호탕하게 웃는다. 굳이 말할 이유는 없을 테다. 이제는 없고, 다시는 있을 수 없는 기억이니까..

그렇지 않아도 헬리글도 사라진 마당에 굳이 옛 기억을 꺼낼 이유는 없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며 마침 뒤편에 조금은 심기가 불편한 사내를 보게 되었다. 뒤이어 아를란도 슬쩍 뒤를 돌아보자 흠칫 놀라며 종종걸음으로 다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덩달아 유진도 그에게 고개를 숙여 예의를 보였다.

물론 아를란처럼 깍듯이 예의를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 깎듯이 예를 보이는 아를란을 보며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대는 내게 그렇게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니까.. 몸은 좀 괜찮소? 아픈 곳은 없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왜 나와 있는 것이오?"

걱정이 다분한 음성이다. 아를란은 그런 그의 각별한 걱정에 조금은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도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다. 새초롬하게 뺨을 붉히며 입고에 걸친 미소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그러한 모습을 보았을 때, 유진은 알게 되었다. 그가 아를란을 좋아하는구나, 하물며 아를란도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마침 사내의 시선이 다가온다. 심히 불쾌한 표정이다. 유진은 그런 사내, 아니 차기 휴센의 왕이 될 왕자 다우드의 시선을 마주했다.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한 시선이 마주했다. 그러며 이어진 공백 끝에 아를란만이 어찌하지 못해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곧 유진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며 나직이 속삭였다.

"둘이 무척 잘 어울린 듯합니다."

뜬금없는 말에 아를란이며 다우드까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그러며 헛기침하며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풋풋한 두 사람의 모습에 유진은 다시금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무래도 방해꾼은 잠시 빠져 주어야 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왕자님."

"아, 아닐세 유, 유진 슈리엘이라고 했나? 내 나중에 따로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네. 물론 지금은 좀..."

"저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를란과 시선을 마주하고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괜히 다우드 왕자에게 밉보이기 전에 빠져 주는 게 좋을 듯하다. 그만큼 그가 아를란을 향한 마음이 꽤 진지해 보였으니 말이다.

짧았으나 오랜만에 아를란과 대화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더욱이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어 다행이었다. 뒤늦게 생각하니 소아렌에서 그녀를 마주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녀를 본 순간부터 그녀가 부디 행복하길 빌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행히 그러한 바람은 이룬 듯하다.

적어도 하나의 목표는 이루었을까? 조금은 안도감이 일었다. 그래도 자신의 회귀가 누군가에게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름 감격스럽기도 하다. 나름의 뿌듯함일까? 그렇게 다시 공허한 방을 지나 다른 방으로 가려던 찰나였다. 열린 문을 통해 나가라던 찰나 별안간 기척이 느껴졌다.

"유진!"

고개를 돌려보니 아를란이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자 그녀가 물었다.

"난 널 만나서 정말 행복해, 정말.. 정말로 행복해. 이토록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내가 가져도 될지 두려울 정도로 행복해, 다 네 덕이야. 그래서 고마워! 정말 .. 정말 고마워! 그런데 조금 걱정이야. 난 이렇게 행복한데. 넌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너무 많이 힘들어 보여. 그래서 묻고 싶어. 넌 지금 행복하니?"

잠시 뜸을 들인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응...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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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왔을 때, 모두가 함께 있었다. 그들을 보자니 솔직히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이들이 이렇게 가득한데. 어찌 불행할 수 있을까? 엘리시아를 비롯해, 프리실라 그리고 에일린, 하물며 어머니까지 이렇게 있는데. 아쉽다 롤랜드와 바리오스가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들은 지금 쯤 한창 제국으로 향했을 테다.

물론 자신도 슬슬 제국으로 가야 할 테지만, 그러나 아직 이곳에 남은 일이 있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이들과 함께 방에서 두런두런 여태껏 나누지 못한 얘기를 나누었다. 잠시 무겁고 괴로운 대화 주제는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마침 아리사와 로아나가 들어왔다.

여전히 두 사서와 함께 있었다. 아리사와 로아나로부터 남자아이는 진이라는 이름을 여자아이는 리사 라는 이름을 받게 된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듯하다. 하루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 있기를 지치지도 않은 듯하다. 한편 샤오 룬이 아이들과 함께 놀았는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리사의 또래와 다를 바 없는 그녀의 행동에 방안은 잠시 웃음이 가득했을 때였다. 마침 방문자가 더 있었다. 유진은 드디어 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다. 성녀에게 도움을 받아 휴센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니플하임과 요안나를 만났고 또 그녀와 함께 다가온 사내를 보게 되었다.

40대 중후반 정도 돼 보이는 모습이다. 짧게 자른 금발,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보통 목사들이 입을 법한 복장을 한 사내였다. 본래 하얀 피부였으나 오랜 시간 사막의 태양이 그의 살을 살짝 구릿빛으로 물들인 듯하다.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 사막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성녀 아이리스가 말했던 터너 신부가 분명했다.

흐르는 땀을 소매로 툭툭 닦아내며 그가 말했다.

"반갑습니다. 유진 슈리엘님, 저는 엘리시움의 사제 터너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리스님과 니플하임 님에게 들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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