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8화 〉 진격
* * *
//////
진격
다시 말 위에 오른다. 베르카랑의 군마였다. 그 몸집이 여태 탄 말보다 훨씬 컸다. 이 역시 말의 이름은 짓지 않았다.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또 홀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말에 이름을 짓는 것조차 지긋지긋하다. 오히려 말이 죽고 자신만 홀로 살아남은 건 그만큼 운이 따랐으니...
마갑을 정비한다. 안장에 쌓인 눈을 치우고 마지막 빗질로 말을 다독인다. 공포를 억누를 흥분제가 들어간 먹이를 먹였다. 그렇지 않아도 발을 구르고 투레질하기를 당장에라도 달리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다. 성기도 빳빳해지며 똥오줌을 지려 최후의 준비를 끝낸 듯했다.
유진은 말의 목을 툭툭 치고는 단번에 올랐다. 살짝 몸을 들썩인다. 흥분제 때문일까? 어쩌면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쉬쉬 소리를 내며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눈 덮인 전장에 시선을 틀었다.
눈발이 생각보다 거세다. 잿빛의 하늘에 시야가 불분명할 정도로 거센 눈보라가 전장을 휘감으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섬뜩한 고요함은 흥분제를 먹인 말들의 동요를 일으켰고 병사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마른침을 꿀컥 삼킨다. 새해가 곧 이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 물릴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렇지 않아도 거센 눈보라에 진경을 며칠 뒤로 물렸다. 마침 겨울에 정점에 이르렀을 무렵, 더는 군사를 밀릴 수 없었던 듯하다.
할리온은 새해가 끝나기 전에 무쥬엘라에 제국의 깃발을 세우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가 처음으로 따듯한 지휘소에서 나와 전장에 이르렀다. 시선을 뒤로 틀었다. 할리온이 보인다. 그 아래, 눈보라 때문일까? 아니면 총력전이 이어질 순간이라 그런지 공포에 떨고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 침을 꿀컥꿀컥 삼킨다. 이미 수통에 물을 전부 마셔버린 병사도 있다.
그리고 귀곡성처럼 들려오는 한기와 지긋지긋한 눈보라에 몸을 떨며 나직이 신을 부르짖는다.
그들의 동요가 전해졌다. 거센 공기 중에 미묘하게 전해지는 흔들림은 그들의 공포로 빚어져 있다.
유진도 물을 마시려 수통을 들었다. 가죽으로 만든 수통 내부에 물이 살얼음이 낄 정도로 한기가 지독했다. 이번 해 한파의 정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차가운 물이 입안을 타고 타는 듯한 갈증으로 쓰라린 목구멍을 스쳐 지나가니 한결 나아진다.
숨을 깊게 들이켰다. 폐부 깊숙하게 한기가 파고든다. 늑골이 살살 당기는 듯하며 무거운 긴장감에 뼈마디가 삐걱삐걱 울어대고는 했다. 이내 고삐를 꽉 쥔다. 어느덧 식은땀이 흐른다. 그래서 더 춥게 느껴질까? 착용한 두꺼운 갑옷과 내피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에 근육을 움츠러들게 했다.
마침 나팔소리가 이어진다.
달칵달칵 곳곳에 불협화음처럼 터지는 치찰음이 들린다. 거칠어진 숨소리가 고조되기 시작하며 동요가 커진다. 그 동요에 흥분제를 먹인 말들도 동요한다. 투레질하고 바닥을 구른다. 그들도 곧 격렬함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참지 못하고 똥오줌까지 지린다.
흥분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이 분명하다. 유진은 말의 목을 툭툭 쳐주며 진정시켰다. 그리고 섬뜩한 눈보라 사이로 앞을 마주한다. 흐릿하나 보인다. 전장 곳곳에 흉측한 흉터가 나 있다.
쏟아지는 눈으로 가린다 한들, 1년간 이어진 그다지 길지 않은 전쟁에서도 그 상흔은 짙게 남아 있다. 그 아래 깔린 시체조차, 쉬이 감출 수 없었다. 눈으로 뒤덮인 저 먼, 숲의 경계선, 하얗게 눈꽃이 핀 숲에는 지독한 한기와 무자비한 눈보라 속에서도 먹이를 기다리는 까마귀로 가득했다.
눈보라 사이로도 먹을 걸 구하러 온 것들이 까악까악 울어댄다.
그들도 알고 있을 테다. 곧 하얗게 물든 대지 위에, 신선한 고깃덩이가 즐비할 것을, 비릿한 혈향과 더불어, 뜨끈뜨끈하고 또 신선한 먹이가 산을 이루어 추운 겨울날 굶주린 배를 채워주리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 않을 테다.
한 차례 더 나팔소리가 이어진다. 멀리서 뿔피리 소리가 한데 맞물린다. 숨이 거칠어진다. 깊게 숨을 몰아쉰다. 한 차례 더 수통을 들어 벌컥벌컥 물을 삼킨다. 그래도 갈증이 통 가시지 않았다. 마찰음에 불협화음도 절정에 이르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또 지금이 몇 시인가? 눈보라 때문에 알 수 없다. 온몸이 얼어붙을 지경이다. 황제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최후의 진격은 그다지 오래 남지 않았다. 공포가 더 만연하기 전에, 병사들의 몸이 눈보라에 굳어지기 전에, 말들이 더욱 흥분해 말을 듣지 않기 전에 진격 명령을 내릴 것이다.
마침 저 먼 곳에서 검은 물결이 보이는 듯하다.
전장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숨이 가팔라진다. 바람이 미묘하게 변한다. 그리고 느껴진다. 선명해진다. 1년이면 전쟁으로서는 그리 긴 시간은 아니다. 그러나 병사들은 노련해진다. 여태까지 살아남은 이들은 이미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며 알게 된다. 무언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다. 바람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처럼 공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잠시지만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몸의 떨림이 격해진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미세한 마찰음이 뚝 그친 순간이었다.
부우우웅! 제국의 나팔 소리가 길게 뻗어 나간다. 말들이 흥분해 울어대며 발을 굴렀다. "진격하라!" 외침이 사방에 퍼졌다. 유진도 똑같이 외친다. 총력전이다.
기마대를 필두로 보병들이 내달리기 시작한다. 눈보라가 그 기세에 주춤하듯 살짝 멈춘 듯하다. 그러는 순간, 전장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반대편에 다가오는 검은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최후의 함성을 내지른다.
저들도, 최후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교활한 전술은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대로 파도처럼 밀어붙여 힘으로 짓밟으면 그만인 것이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마무리만 지으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검은 물결 역시 쉬이 백기를 들지 않았다.
최후의 진격, 최후의 발악,
말들이 눈 덮인 대지를 쏘아갔다. 얼어붙은 시체를 짓밟고, 얼어붙은 대지를 부수며 나아간다. 그러는 사이 활이 눈보라 사이로 눈먼 화살은 딱히 목표를 정하지 않고 쏘아졌다. 앞장선 유진이 우레처럼 소리쳤다.
"방패를 들어라!"
나팔이 짧게 세 번 울린다. 동시에 방패를 든다. 그리고 또 외친다. "속력을 높여라!" 옆에 선 이가 나팔을 길게 부른다. 말이 거칠게 울며 투레질한다. 눈발이 튀기며 더욱 빠르게 내달린다. 유진은 화살 비가 멈춘다. 곧, 마법사들의 총공세가 이어진다.
"산개하라!" 유진이 외친다. 나팔이 짧게 다섯 번 울린다.
쐐기 모양의 기마대가 산개하며 마법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쾅쾅! 군데군데 폭발이 일며 불꽃이 번쩍한다. 눈보라 사이를 가로지르는 번갯줄기가 산개한 기마대를 뒤덮기도 했다. 곳곳에 비명과 함께 고꾸라지는 말과 기수가 보인다. 그들은 뒤에 쫓아오는 같은 동료에 짓밟혀 제대로 검 한 번 휘두르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본래 전장이란 그러했다. 재수 없으면 제대로 검조차 휘두르지 못한 채 죽는 법이다.
허무함을 유진은 이제 모르지 않았다. 그러며 빌고는 한다. 이제부터는 운이 8할이다. 아니, 그보다 더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부디 눈먼 화살이, 마법이 닿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소리친다.
"속도를 더욱 높여라!"
이어지는 나팔 소리, 유진은 말의 배를 걷어차 재촉했다. 용맹한 베르카랑 품종의 말은 벼락처럼 쏘아지며 검은 파도로 향했다. 그곳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주변을 살폈다. 백마를 탄 할리온이 함께 내달리고 있었으나 그는 살짝 뒤로 처져 있다.
그의 곁에는 로즈 나이트와 로얄 나이츠 기사단과 함께하고 있었다. 황금의 갑옷이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표적이 되기 딱 좋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번에 전쟁이 끝나기 때문이다. 한편 유진은 부디 눈먼 화살이 혹은 마법이 그에게 닿기를....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는다.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앞 선 아집과 고집으로 이루어진 검은 물결이 코앞이다.
마법 공세가 멈춘다. 검은 물결과 가까워졌다. 창병들이 선명해진다. 각각 끝이 평범한 창처럼 뾰족하나 그 아래 고리가 달린 창을 꼬나쥐고 있다. 유진은 숨을 빠르게 훅,훅, 내쉬었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한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한기, 눈발의 쓰라림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선은 창을 꼬나쥔 창병에 고정되었다.
그 역시 창을 꼬나쥔다. "물러서지 마라!" 나팔 소리가 다시 한 번 이어진다. 그 나팔소리를 따라 말들이 격하게 울어댄다.
"다시 쐐기 대형으로!"
나팔이 짧게 두어 번 부른다.
노련한 기마대가 나팔 소리에 맞춰 뾰족한 화살촉 모양처럼 쏘아졌다. 마치 뒤편에 내달리는 황제가 쏘아낸 화살처럼 진격한다.
촉 부분의 최전방은 유진이었다. 황제의 검이 되어 나아간다.
발로 흥분한 말의 배를 걷어차고 이윽고 허리를 굽힌다. 창을 앞으로 꼬나쥔다. 계속해서 말을 달래며 말한다.
"달려라.. 두려워 마라.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계속해서 달리는 거다. 더욱 빠르고, 더욱 용맹하게..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말이 거칠게 울어댄다. 흥분한 강하게 땅을 박차고 쏘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물결과 한데 겹친다.
퍽! 콱! 히히힝! 콰르륵! 콰직..
눈앞에 거대한 혼돈이 폭발하고 말았다. 수많은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하고, 눈앞은 그저 거대한 검은 파도를 꿰뚫는 창처럼 보일 뿐이다. 눈앞에 비명이 이어진다. 말에 차이고, 창에 꿰뚫린 병사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한낱 고깃덩이를 본다.
금세 유진의 몸이 피 칠갑이 되었다. 전신에 고통이 치밀며 무거워진다. 폭발한 아드레날린에 고통도 죄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앞에 있는 적군을 몰살시킬 사신이 되어, 황제가 쏘아낸 화살이 되어, 또한 제국의 검이 되어 그들을 도륙하는 검이 된다.
유진이 악을 지르듯 소리쳤다.
"멈추지 말고 꿰뚫어라!!! 그리고 다시 재정비하고 쐐기 대형을 이루는 것이다. 나를 따르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