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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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온도

민혜윤 

♥목차♥

프롤로그

― 그 시절의 난, 봄바람에도 마음을 베이곤 했다.

그녀의 하루는 새로울 것도 없이 평범하다.

‘평범하다’는 것은 결국 위태롭고 권태로운 일상이 반복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열아홉 살 이지서는 늘 밤을 앓으며 시간을 하얗게 태워 버렸고 대안도 없이 아침을 맞이했다. 불면의 이유는 다양했다. 건넛방에서 들려오는 박 여사의 기침 소리가 거슬려서, 아무리 공부를 해도 결국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고작 이 작은 마을, 남들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는 무연리일까 봐 불안해서, 하루라도 빨리 이 좁아터진 집구석을 벗어나고파서.

그렇게 밤새 몸을 뒤척이다 누렇게 때 묻은 천장의 벽지를 보며 몇 번이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 같다. 내 세상이 이렇게 작을 리 없다고.

지서가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할 때면 박 여사는 그녀를 한껏 비웃었다.

박 여사는 쉰이 넘은 나이에 지서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지서가 태어나기 10년도 전에 죽었다. ‘엄마’라고 불렀지만 엄마가 아니라는 것은 철이 들면서 어렴풋하게 느꼈다.

박 여사에겐 지서 말고도 큰딸이 있었다. 자신보다 스무 살가량 많은 언니가 있다는 것을 지서는 사춘기 무렵에 알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를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후로 지서는 박 여사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고 그녀 역시 지서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이런 촌구석 시골 마을에서는 흔한 이야기이다.

꿈속에서 지서는 훌쩍 시간을 건너뛰어 대학에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던 날 아침으로 돌아갔다.

그날, 박 여사는 평소처럼 분주하게 낡고 동그란 상 가득 음식을 차렸다. 머리가 큰 후 지서는 알아서 식사를 챙기겠다고 했지만 박 여사는 아침만큼은 꼭 본인 손으로 차려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메뉴는 아직도 기억한다. 푹 익은 김장 김치와 직접 기름 바르고 구운 김과 몇 가지 반찬, 그리고 며칠 전 박 여사가 옆집 할머니와 빚은 만두로 끓인 만둣국.

저 오늘 서울 가요. 그렇게 말을 꺼냈다. 밤새 무어라 이야기하면 좋을까 고민했지만 지서가 뱉은 말은 참으로 단순했다. 잠시 박 여사의 젓가락이 멈칫했지만 이내 말없이 식사를 이어 갔다. 박 여사가 습관처럼 틀어 둔 아침 정보 프로그램 속 리포터의 말소리만 공간을 맴돌 뿐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끝까지 지서에게 잘 다녀오라거나 그동안 진학을 반대해서 미안하다 같은 말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져 지서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무심히 더 먹으라는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생각 없다고, 차갑게 내뱉으며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주저하지 않고 시장에서 사 온 커다란 캐리어에 짐을 챙겼다. 일부러 들으란 듯이 더 크게 소음을 냈던 것도 같다. 처음엔 가끔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짐을 챙겨 갈 생각이었지만 계속 저런 식으로 반대한다면 굳이 없는 시간 쪼개 가며 집에 올 마음은 없었다.

방 밖에선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절뚝거리며 마당을 가로지르는 박 여사의 발걸음 소리가 이어지다가 이내 대문이 끼이익 요란한 소음을 내며 철컥거렸다.

그 소리가, 박 여사의 완고한 고집 같았다.

천천히 잠에서 깨어나자 몸이 천근만근 무겁고 뭉근한 미열이 느껴졌다. 잠들기 전 감기약을 먹었는데도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불편했다. 이렇게 컨디션이 나쁠 때면 꼭 그 시절, 그날의 꿈을 꾼다.

다행스럽게도 희뿌연 시야에 들어온 천장의 벽지는 지서가 최근에 이사하며 고른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눈을 몇 번 깜빡이며 벽지의 무늬를 확인했다. 확실했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지긋지긋했던, 때 타고 곰팡이가 슨 그 작은 방이 아니었다.

지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다. 이불에선 포근한 세제 향이 난다. 낡고 꿉꿉한, 색 바랜 꽃무늬 이불이 아니라는 사실이 안정감을 준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다시 잠들고 싶은데 쉽지 않다.

지난주 지서는 팀 리더 승진 후 처음으로 진행한 개편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그녀의 이른 승진을 두고 시기와 질투, 그리고 뒷말이 꽤 많았다. 그 때문에 더 악에 받쳐 일에 집착했고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던 것 같다. 이제 시스템도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었으니 홀가분하게 안식 휴가를 즐길 생각이다. 홀로 떠나는 하와이 여행을 계획했다. 난생처음으로 제대로 떠나는 휴식이었다.

입 안이 마르고 답답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자 현기증이 일었다. 누워 있을 땐 가벼운 감기겠거니 했는데, 서서히 감각이 깨어나자 생각보다 더 몸이 좋지 않았다.

간신히 벽을 짚고 걸어가 창문을 열었다. 여름밤의 열기를 품은 습한 바람이 몸 가득 쏟아진다. 구름이 움직이는 모양이 심상치 않다. 비가 올 것 같다.

갑자기 허기가 져 냉장고를 열자 손가락 한 마디도 남지 않은 생수병과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삼각김밥, 말라비틀어진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아래 채소 칸을 열자 감자였던 것이 분명한,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들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손도 안 대고 썩힌 사과와 감자가 아쉬웠다. 박 여사가 보내 준 것이니 맛은 있었을 것이다. 안 먹으니 보내지 말라고 해도 박 여사는 직접 농사지은 과일이나 채소를 언질도 없이 지서에게 보내곤 했다. 그중 절반 이상은 다 썩어 버린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였고 지서도 결국은 포기해 버렸다. 싫다고 해 놓고 죄다 상해 눈앞에 두고도 먹지를 못하니 괜히 더 아까웠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였다. 비상식량으로 사 둔 편의점 삼각김밥. 유통 기한을 확인하니 두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 동안 뭐 얼마나 대단히 상했을까 싶어 집어 든다.

“……맛없네.”

중얼거리며, 지서는 입에 있던 삼각김밥을 그대로 뱉어 버렸다. 평소 같으면 맛이 없어도 살려고 꾸역꾸역 먹었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입에 대기도 싫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면 감각은 유독 더 예민해진다. 비 오기 직전의 습도 높은 날씨 탓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차를 한 잔 내려 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불면증에 좋은 차라고 해서 습관처럼 마셨는데 이 시간에 깨는 걸 보면 효과가 별로인 듯하다. 지서는 차를 마시며 휴대폰으로 포털 사이트 ‘스퀘어’의 애플리케이션을 켜 뉴스를 체크했다.

스퀘어. 점유율 51%, 업계 1위 포털 사이트로 지서는 뉴스 미디어 본부의 연예·엔터테인먼트 팀 리더이다. 드라마, 예능, 영화는 물론 요즘 뜨는 연예인이나 패션 아이템까지 일단 스퀘어의 메인에 노출되면 큰 화제가 되어 누구나 탐내고 청탁도 많이 들어오는 자리였다.

메인에 걸린 뉴스의 링크 오류를 발견한 지서는 야간 편집자에게 수정을 지시했다. 리더는 밤에 잠도 안 자고 감시하는 거냐며 팀원들끼리 수군거리는 게 귀에 들리는 것 같았지만 오류를 그냥 두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았다. 연예, 엔터테인먼트 섹션에는 눈여겨볼 만한 기사가 별로 없다. 당연하다. TV 정규 방송은 끝났을 거고 기자들도 다 잠들었을 테니까.

스무 살에 서울에 온 후로 불면증이 심해졌다. 몸은 힘들어 죽겠는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니 늘 예민했다. 취업을 하고 금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수면 센터에 가서 검사를 몇 번 받았지만 약도 제대로 듣지 않고 효과도 그때뿐이라 지서는 어느 순간부터는 ‘잠’을 놔 버렸다. 에너지를 다 써서 내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치면 그땐 잠이 오겠지. 뭐 그런 생각.

그렇게 간신히 잠이 들면 늘 이 시간에 깨곤 한다.

늦은 밤, 이른 새벽.

나만 홀로 깨어 있는 것 같은 이 애매한 시간.

휴대폰을 끄고 다시 누우려는데 스포츠 섹션에 기사가 업데이트됐다. 제목을 훑어보니 네덜란드에서 활약 중인 축구 선수가 높은 이적료와 연봉을 제안받고 영국 프리미어 리그로 이적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유럽에서 활약하는 해외파 선수들이 많아지면서 시차 때문에 야간 시간대의 편집 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본부 전체 예산이 스포츠에 편중되면서 연예 팀 리더인 지서로서는 불만이 꽤 많았다. 업무 강도는 우리 쪽이 높은데 왜 콘텐츠 투자는 스포츠 쪽에 더 지원해 주냐고 몇 번이나 항의도 해 봤으나 먹히진 않았다.

“이깟 공놀이가 뭐라고.”

작년엔 올림픽 내년은 월드컵이랬나. 연말에 또 혼자 싸울 일이 많아지겠다고 생각하며 업데이트된 뉴스를 터치하려던 순간, 갑자기 지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액정 화면 속 발신자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지도 않고 지서도 모르는 번호였다. 다만, 지역번호는 익숙했다.

늦은 시간의 급작스러운 전화.

무슨 소식인지 알 것도 같아,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향을 떠나온 후 10년 동안 이 지역번호로 지서에게 전화가 걸려 온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지서입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고속도로에 접어들 무렵 약해졌던 빗줄기가 서울을 완전히 벗어나자 거짓말처럼 그쳤다. 갑자기 공간을 잘라 내 붙인 것처럼 급작스러웠다. 흡사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기분이었다.

새벽에 출발해 차가 막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 시간을 꼬박 달렸는데도 그녀의 목적지는 아직도 멀기만 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홀로 달리는 느낌. 지서는 내비게이션을 확인했다.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반. 온 만큼 더 가야 한다.

이정표의 휴게소 표시를 보고 잠시 쉴까 고민하다가 차선을 바꾸는 대신 속도를 좀 더 올렸다. 엔진의 굉음이 커지고 차창에 맺힌 빗물이 바람에 쓸려 흩어진다. 건조한 에어컨 바람이 피부를 감싸는 느낌이 불쾌해 창을 조금 열자 바람이 파도처럼 차 내부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냥 이대로 쓸려 가고 싶기도 하다.

사나운 새벽을 쉬지 않고 여섯 시간을 달리자 드디어 안개 사이로 익숙한 지명의 이정표가 보였다.

무연無緣.

지서가 태어나고 자란 곳.

지긋지긋한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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