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7)

02. 단지 이 밤이 지나치게 부드럽기 때문에

무연에서의 하루가 이틀이 되었다.

본부장은 모친상으로 받은 경조사 휴가 5일에 미리 예정돼 있던 안식 휴가를 붙여 쓸 것을 권했고 만사가 귀찮아진 지서는 그러겠다고, 배려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팀원들에게 간단한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이곳까지 조문을 와 준 몇몇에겐 커피 기프티콘을 보냈다. 현숙과 은기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방문했던 회사 사람들은 홀로 상가를 지키고 있던 지서에게 가까운 친척도 없냐며 걱정 섞인, 하지만 못내 거슬리는 말을 몇 마디씩 얹었다.

일을 처리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분명 바로 정리해서 서울로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피곤해져 그냥 맨바닥에 누웠다. 박 여사의 넓은 방은 비었지만 지서는 굳이 거실을 고집했다. 답답한 기억만 있는 자신의 방도 싫었다. 그렇게 거실에서 죽은 듯 잠만 잤다. 불면증 환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갑자기 마취를 당한 사람처럼. 별의별 꿈을 다 꾼 것 같은데 기억에 남지는 않았다.

미리 죽음을 예감한 것인지 박 여사의 집은 딱히 정리할 것이 없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같았다.

다만 지서의 기억 속 집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허름하고 낡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제 낮에 본 집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누렇게 때가 탔던 외관 벽은 흰 페인트로 깔끔하게 칠해져 있었고, 습기가 차 곰팡이가 슬었던 지서의 방도 새로 도배를 한 듯했다. 벽지와 장판이 제각각이지만 조금씩 수리를 한 흔적이 제법 됐다. 아끼는 게 버릇이고 습관인 박 여사라면 적당히 참으며 살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대충 훑어보았을 뿐인데 마당에도 변화는 뚜렷했다. 박 여사는 막 쌓아 올린 듯한 돌담의 대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엔 장미를, 왼쪽엔 능소화를 심었다. 장미와 능소화. 언밸런스한 조합이지만 고개를 돌릴 때마다 시야가 바뀌는 게 꽤 마음에 들었다. 비스듬히 심어져 있는 꽃나무는 담을 타고 자라 개화를 앞두었다. 움트기 시작한 꽃봉오리를 보니 여기 좀 더 머물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만개하면 제법 예쁠 것 같아 더 머무르고 싶어졌다.

처음엔 밭도, 집도 모두 처분할 생각이었는데 아까워졌다.

식탁엔 박 여사의 손때가 묻은 수첩과 뭘 알고 가입한 건지 의심스러운 보험 증권, 한눈에 봐도 연식이 되어 보이는 통장이 놓여 있었다. 종신 보험 두 개. 액수가 꽤 됐다. 수혜자 이름은 이지서. 서울의 집을 사면서 받은 은행 대출을 갚고도 남을 만큼 큰 액수였다.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더니 위자료인가 싶었다. 그녀는 지서가 보낸 용돈도 그대로 모아 두었다. 7년 남짓이니 꽤 큰돈이다.

뉴스 미디어 업무 특성상 평일이나 주말, 연휴의 구분이 없었고 남들 다 쉬는 명절에도 지서는 일에 매달렸다. 피곤에 절은 지서가 하루라도 내려가겠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할 때면 그녀는 길에다 시간 버리지 말라고, 당신은 친구들과 마실이나 갈 것이니 굳이 올 필요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했다. 차라리 편했다. 만나면 또 언쟁을 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겠지 싶어서. 차라리 안 보는 게 서로를 위해 나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지서는 보상 심리로 돈을 보냈다.

식탁에 놓여 있던 수첩을 열자 바로 앞장에 클립으로 끼워 둔 지서의 명함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팀 리더가 되었을 때까지의 명함이 순서대로 꽂혀 있었다.

1년에 한두 번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박 여사는 지서에게 아직 사원인지, 주임인지, 대리인지 직급을 물어보곤 했다. 임원이나 팀장 아래로는 전부 다 매니저라고 설명하면 무슨 연예인 시중 드는 놈들이냐며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했다. 그녀는 용돈은 됐다고, 푼돈 너나 쓰라고 거절하면서도 명함 한 장 달라는 말은 잊지 않았다.

박 여사가 입사한 회사 이름을 물어봤을 때, 그리고 처음 명함을 주었을 때 혹시나 회사 오너가 주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잔소리를 해 댈까 봐 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냥 가만히 명함을 들여다보며 알 수 없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지서는 가장 최근에 건넨 명함을 클립에서 뺐다. 영어로 표기된 Team Leader 아래에 박 여사의 글씨로 ‘팀장’이라고 써 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다음 장으로 넘기자 그녀에게서 돈을 빌려 간 사람들의 명부가 나왔다. 반드시 확인하라는 듯 크게 별 표시를 해 뒀다. 이 돈, 다 받아 내라는 건가. 대충 계산해 보니 300만 원이 좀 안 됐다.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귀찮아 지서는 그것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조의금 함을 지켜 준 이장은 정리는 직접 하라며 지서에게 명부와 봉투를 건넸다. 촌구석 장례식치곤 봉투가 제법 많이 보여 명단과 액수를 정리하다 갑자기 귀찮아졌다. 어차피 전부 박 여사의 손님일 텐데 정리하는 게 의미 있을까,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연락하는 동창도 없고 이제 더는 무연리를 찾을 일도 없을 테니 이 명부 속 사람들과 경조사를 챙길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정리는 그만두자며 봉투에서 돈을 꺼내는데 수표 한 장이 지서의 눈에 들어왔다. 꽤 거액이었다. 이 시골에서 쉽게 건넬 수 없는 액수의 조의금.

여자가 왔다 간 걸까. 지서가 모르는 사이에, 도둑처럼.

잠시 생각했지만 친모는 아닐 거라고 결론 냈다. 과거를 들키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그녀가 자신을 아는 사람이 많은 마을에 쉽게 들락거리진 못했을 것이다.

친모에게 호기롭게 협박을 했지만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는 별로 없었다. 최태하. 여자의 의붓아들이자 가장 큰 약점. 그 남자만 있으면 지서는 언제든 친모를 옥죌 수 있다.

찬 바닥에서 잔 탓인지 몸에 미열이 맴돌고 입 안이 말랐다. 긴장이 풀어져서일까. 몸살이 오는 것 같다. 뭘 좀 먹어야 하는데, 마음과 다르게 몸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웅크리고 누워 지서는 작게 앓았다.

서울에서의 이지서는 강한 사람이다.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입사하고 승승장구 중인 30대 초반. 하지만 이 작은 마을엔 그녀를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어린 지서는 바람에, 빗줄기에, 풀 냄새에도 상처를 받곤 했다.

사실 그녀는 강한 사람이 아니다.

예민하고 연약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위장한 것일 뿐.

이른 나이에 이룬 성공은 스스로를 갈아 내며 버텼던 시간의 산물. 날카로운 성향은 칼 같은 말과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갑옷.

사랑스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태어난 순간부터 일생을 사랑받지 못해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지서.

무뎌진 외로움에 난도질당해 속은 다 해진 이지서.

그래서 뭐.

날 지켜 줄 것도 아니면서.

저수지에서 밀려온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았다. 까딱 잘못했다간 차를 몰고 저수지로 돌진하는 건 아닐까. 지서는 가만히 운전석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봤다. 그런 실없는 걱정이 들 정도로 안개가 어마어마했다.

오늘은 삼우제. 박화순 여사의 장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음식을 어쩌나 고민했는데 지서의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본 현숙이 손도 다쳐 성치 못하니 이거나 들고 가라며 3단 찬합 통에 나물 몇 가지와 전, 잡채를 채워 내밀었다. 그녀는 과일은 읍내 시장 가서 실한 것으로 사고, 박 여사가 생전에 터미널 앞 빵집의 롤케이크를 좋아했으니 그것도 사 가라고, 매몰차게 서울 가지 말고 이 기회에 조용히 며칠 쉬다 가면 좋을 거 같다며 지서의 등을 떠밀었다.

삼우제를 안 챙길 거라고 생각한 걸까. 착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로 후레자식은 아닌데.

지서는 안개를 헤치며 조심스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 읍내에 들어서고 가장 번화가인 터미널 근처로 향하는 내내 지서는 모든 것들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고,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무연리도 꽤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읍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터미널로 들어서는 1차선 도로는 3차선으로 넓어졌고 삼거리도 변했다. 맞은편 커다란 화원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카페가 들어섰다. 한눈에 봐도 북적북적한 것이 읍내 만남의 광장이라도 되는 듯했다.

지서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공영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낯선 듯 익숙한 골목을 지나자 주차장이 나온다. 주차권을 뽑는데 맞은편 문방구가 눈에 익다. 그렇다면…… 여긴 지서도 종종 왔었던 분식집 자리일 것이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 지서는 잠시 멈춰 사방을 둘러보고는 곧장 근처 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장 입구까지는 길을 헤맸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기억 속 그 풍경이 그녀를 맞이했다. 초입의 옛날 도너츠 가게는 여전히 장사가 잘됐다. 연예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프린트된 현수막을 걸어 놓은 게 어디 TV 음식 프로그램에 소개라도 된 모양이었다.

읍내에 나올 때면 박 여사는 장에 들어서자마자 어린 지서의 손에 팥앙금이 가득 든 찹쌀도너츠를 쥐여 주곤 했다. 그리고 그 옆 수레에서 요구르트 한 줄을 사 건네며 목멜 때마다 마시라고, 배 아프니 두 개만 먹으라는 잔소리를 덧붙였다.

괜히 그 기억에 취해 도너츠 한 봉지를 샀다. 꽈배기에 찹쌀도너츠, 고로케까지 섞어서 사니 봉투가 제법 묵직했다. 잠시 멈춰 서 입에 넣어 봤다.

그때의 기억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억지로 씹어 삼키며 시장의 가장 안쪽에 있는 과일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에 꽃집에 들러 수국을 샀다. 분홍 수국과 어울릴 만한 풀을 섞어 달라고 했는데 포장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일 가게에서는 제일 크고 예쁜 복숭아와 살구를 골랐다. 살구를 보자 집에 심어 둔 나무들이 궁금해졌다. 대문 근처에 묘목을 얻어 와 심은 감나무, 지서가 어릴 적 심은 매화나무와 살구나무. 차례대로 떠올리다가 집을 팔면 나무들이 다 베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지불하고 검은 비닐 봉투를 건네받는데 제법 묵직했다. 들고 몇 걸음 걷다가 반대편 손으로 옮겨 들기를 반복했다. 비닐이 팽팽하게 당겨져 그냥 들면 손가락에, 팔에 걸면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났다. 또 몇 발자국 걷다 옮겨 들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손이 불쑥 그녀의 봉투를 빼앗아 갔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은기였다.

고은기.

“이리 줘요.”

지서가 손을 내밀었지만 은기는 못 들은 체 생선 가게를 구경하는 시늉을 했다.

“은기 씨.”

그러더니 이번엔 지서를 지나쳐 앞장섰다. 지서는 다시 한번 은기를 불러 세우려다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차피 손의 상처도 제대로 아물지 않아 움직일 때면 통증이 느껴졌다. 붕대를 감아 두긴 했지만 솜씨가 어설퍼 고정되는 효과는 없었다. 드레싱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귀찮아 그냥 내버려 둔 탓이 컸다. 그러니 짐꾼 있으면 좋지 뭐. 이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다.

원래는 과일만 사려던 걸 지서는 살림이라도 장만하는 사람처럼 온 시장을 다 헤집고 다녔다. 떨어진 조미료를 사고 생각에도 없던 우유며 고기, 그릇까지 샀다. 그럴 때면 은기는 아무런 말 없이 짐을 챙겨 들었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그의 양손엔 검은 비닐 봉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꽤 무거울 텐데도 은기는 군소리조차 없었다. 괜히 끌고 다니면서 부려 먹는 게 분명한데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 와중에 은기는 무언가 그녀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돈을 내는 손을 빤히 응시하다가 몇 번 입술을 달싹거렸고 지서가 말하라는 듯 바라보면 얼른 시선을 피했다. 괜히 청개구리 심보가 발동해 그 후로는 지서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이 어린애랑 무슨 기 싸움을 하나 싶어 괜한 자괴감까지 들었다. 비록 무뚝뚝하고 심통이 난 얼굴이긴 했지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다 지서는 퍼뜩 걸음을 멈춰 섰다.

……설마 오늘도 수고비를 줘야 하나?

그녀는 덩달아 걸음을 멈춘 은기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서가 응시하는 게 부담스러운지 은기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다. 그렇게 돈이 궁해 보이지는 않는데. 분명 다른 의도가 있을 텐데.

대부분의 경우 이런 종류의 호의는 목적이 두 가지로 나뉜다. 돈, 아니면 이성적인 호감. 그러다 문득, 돈을 낼 때면 집요하게 바라보던 은기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아, 그래. 그거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이어졌다.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은기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트렁크를 열라며 턱짓 한 번 했을 뿐. 이쯤 되면 차라리 대놓고 본인이 바라는 바를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입을 꾹 닫은 채 땀까지 흘리며 짐 정리를 하는 은기를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짐을 다 실어 준 후, 은기가 고개를 꾸벅하고는 움직임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한참을 그렇게 빤히 보다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하자 지서가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아 붙들었다.

“은기 씨.”

조금 놀랐는지 은기는 그 큰 체구와 어울리지 않게 가벼운 접촉에도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떨었다.

“아, 미안해요.”

지서는 얼른 그의 팔을 놔 주었다. 스킨십, 혹은 퍼스널 스페이스에 민감한 타입인가 보다. 은기는 반대쪽 손으로 지서가 잡았던 팔꿈치께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그의 귀 끝이 붉어진 것 같았다.

“미안해요. 다른 게 아니라…….”

얼른 돈 줘서 보내자.

“오늘도 도와줘서 고마워요.”

지서는 은기의 말을 가로막으며 지갑에서 5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가진 현금은 이게 전부였다.

분명 원하는 게 돈일 텐데 은기는 빤히 그녀의 손만 바라볼 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일순, 그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저 돈 때문에 도와드린 거 아닌데요.”

간신히 화를 억누른 목소리였다. 은기는 울컥한 얼굴로 자신의 트레이닝복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돈 달라고 짐 들어 준 거 아니에요. 장례식 때도…… 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어요. 그거 얼떨결에 받고 다시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 없어요. 다음에 보면 꼭 돌려드릴게요.”

빠르게 말을 내뱉은 은기가 몇 초쯤,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새까만 눈동자엔 온통 원망만 담겼다. 미소 지을 때면 예쁘게 패었던 볼우물이 일그러지고 서러움이 묻어났다.

무어라 해야 하나 지서가 말을 고르는 사이, 은기는 몸을 돌려 후다닥 주차장을 벗어났다.

다시 불러 세우려던 지서는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겼다. 완벽하게 잘못 짚었다.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들고 있던 지폐로 시선을 옮겼다. 순수한 호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그 증거처럼 돈을 쥐고 있는 손이 부끄러웠다.

납골당에 도착한 지서는 챙겨 온 음식을 꺼내 올리고 과일도 그릇에 담아 상을 차렸다. 유골함만 있는 게 허전해 보여 영정 사진을 액자에 넣어 세워 놓고 마음에 안 드는 꽃다발을 풀어 다시 정리한 뒤 장식했다. 어쩐지 사진 속 박 여사가 세상에 찌들어 꼬아서만 생각하는 지서를 질책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드디어 장마가 시작된 것인지 하늘은 밤새 미친 듯이 비를 쏟아 냈다. 집 앞 실개천의 물이 흐르는 소리가 새벽부터 제법 거세게 들려 지서는 조금, 잠을 설쳤다. 혼자 산 세월이 벌써 10년인데 이상하게도 이 집에서의 밤은 서울의 밤과는 느낌이 달랐다. 뭐든 홀로 견뎌야 하는 도시의 밤은 때때로 그녀의 기억과 기분을 최악으로 왜곡하곤 했다. 창밖의 인공적인 빛이, 자동차의 소음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울려 대는 휴대폰 진동이 족쇄처럼 느껴졌던 그 밤.

시골의 밤 또한 혼자 견뎌야 한다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먹구름이 쏟아 내는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바람이 가득한 밤. 하지만 오히려 쥐 죽은 듯 조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지서에겐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빗소리에 잠을 설치다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 몸에 감고 뜨겁게 끓인 보리차를 마시며 밤새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비가 만들어 낸 물웅덩이를, 밝아 오는 아침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세상을 바라보니 도리어 머릿속의 수많은 생각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박 여사의 장례가, 무연에서의 시간이 이지서라는 음악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

아침이 오자 소강상태에 접어든 건지 빗줄기가 가늘어지다가 이내 그쳤다. 지금 시간이면 서울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대중교통이 혼잡하고 차가 막힐 텐데, 빗소리마저 사라진 이곳은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에 잠을 설치며 이 적막을 그리워했지만 막상 고요의 한복판에 놓이니 소리가 빈 공간이 어색하다.

가만히,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을은 변한 것이 없었다.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이 늘었다는 것만 제외하면 마을 사람들 역시 그대로였다.

다른 게 있다면…….

고은기 하나가 추가된 것 정도.

그를 떠올리자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인정머리가 없어졌나 보다. 사과해야 하는데 마땅히 연락할 방법도 없고 현숙에게 묻자니 괜한 관심을 사 귀찮아질 것 같아서 꺼려졌다.

다시 볼 사이 아니니 괜찮겠지 하다가도…… 상처받은 은기의 얼굴이 계속 가시처럼 가슴에 걸렸다.

은기를 생각하며 목덜미를 긁던 지서의 얼굴이 순간 신경질적으로 일그러졌다. 소양감을 참지 못하고 계속 긁었더니 살갗이 파인 것처럼 상처가 났다.

“내 피가 맛있나.”

예전부터 그녀는 무연리 모기들의 식량 창고였다. 피가 달달한지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꼭 지서만 물리곤 했다. 모기약을 찾으려다가 귀찮아 손톱자국을 꾹꾹 내고 길게 기지개를 켰다. 뭉쳐 있던 근육이며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믹스커피를 뜯어 컵에 부었다. 입에 맞지도 않는데 아침마다 출근하며 아메리카노를 한 사발 마시던 버릇 때문인지 카페인이 들어가지 않으면 머리가 띵하고 아팠다. 끓는 물을 컵에 붓고 스푼으로 휘저은 뒤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진득하니 달라붙는 단맛이 영 별로라 남은 커피를 싱크대에 부어 버렸다.

무엇보다도 허기가 졌다. 빈속에 약을 먹을 수는 없으니 일단 식사를 하고 슬슬 서울로 돌아가자. 사망 신고도 하고 보험 청구도 하고. 생각을 마친 지서는 종아리까지 오는 장화를 챙겨 신고 마당 한쪽에 놓인 소쿠리를 주워 밖으로 향했다.

지서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의 집과 감나무 집 사이에 일궈 놓은 제법 큰 이 밭은 박 여사의 것이었다. 칼같이 줄을 맞춰 자란 작물과 깔끔하게 제거된 잡초. 이렇게 밭을 돌볼 사람은 이 무연리에 박 여사밖에 없다.

지서는 뭘 해 먹을까 고민하며 밭으로 들어섰다. 물기를 머금은 흙냄새가 코끝을 찌르고 발을 내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커다란 잎에 맺힌 빗물이 뚝뚝 떨어져 옷을 적셨지만 서울의 비와는 분명 달랐다. 특유의 먼지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지서는 적당한 크기의 양파를 하나 뽑아 소쿠리에 던져 넣었다. 고추도 몇 개 따고 파도 한 단 뽑았다. 청경채와 배추, 가지까지 챙기는데 그 옆의 붉게 익은 토마토가 눈에 들어왔다. 가장 크고 예쁜 것을 따 베어 물었다. 설탕을 친 것처럼 달았다.

“왜 도둑질이에요?”

그때, 누군가 불쑥 나타나 그녀를 가로막았다. 지서가 화들짝 놀라며 소쿠리를 떨어뜨리자 남자는 몸을 숙이며 그것을 다시 담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려주지는 않았다. 그는 장물을 압수한 경찰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지서를 내려다봤다.

은기였다. 내내 신경이 쓰였던 고은기.

“왜 도둑질이냐구요.”

“여기 우리 노인네 밭이에요.”

“할머니가 밭 저 줬어요.”

“……뭐?”

그 구두쇠가?

“망할 계집애는 저 회사 일 혼자 다 하느라 코빼기도 안 비친다고 밭은 네가 가져라 하셨어요.”

지서의 표정에서 생각이 읽혔는지 은기가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 봤을 땐 잘 웃는 거 같더니, 역시 아직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손…….”

그때 은기가 조금 놀란 듯 소쿠리를 옆에 끼고는 지서의 손을 잡아 끌어당겼다. 붕대는 진즉에 답답해 풀어 버리고 적당히 처방 연고만 바른 뒤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 둔 볼품없는 상태였다. 괜히 민망해 지서가 손을 빼려 했지만 은기는 쉽게 놔 주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숙여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럴 줄 알았어. 이러면 덧난다고요.”

운동이라도 한 건지 가까이 다가온 은기에게선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땀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었고 상의 역시 마찬가지였다. 흰 티셔츠가 그의 몸에 엉겨 붙어 건장한 실루엣이 완전히 드러났다. 옷이 젖은 탓에 속살이 비쳤다. 군살이라곤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몸이 매끈하고 단단하면서도 날렵했다. 누가 보면 운동선수라고 착각할 만큼 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것 같았다. 얼굴은 앳되고 순해 보이는 게 다리 근육은 굵고 탄탄했다. 옅은 땀 냄새가 났지만 역하지 않다. 오히려 아침의 냄새와 뒤섞여 싱그럽기까지 하다.

“괜찮은데.”

멍하니 은기를 바라보던 지서가 퍼뜩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고. 약이랑 테이핑할 거 가져갈 테니까 집에 가 있어요.”

자신의 땀 냄새가 신경 쓰였는지 은기가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지서가 됐다고 하기도 전에, 집에 가 있으라 덧붙인 은기는 그녀의 소쿠리를 들고 자신의 집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진짜 빨랐다. 키가 커서 그런지 몇 걸음 안 움직인 것 같은데 벌써 저 앞이다.

지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 픽 웃었다.

이제야 알겠다. 시장에서 저 애는 돈을 본 게 아니라 손이 보고 싶었던 거다. 순수한 호의로, 괜찮을까 궁금해서.

누가 내 걱정 해 주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

어색하면서도 기분 좋다.

도시의 이지서는 경계심이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한 엘리베이터에 타는 이웃 주민에게도, 같은 사원증을 건 회사 사람에게도 먼저 인사하는 일이 거의 없다. 덕분에 사내에선 싸가지 없단 소리를 자주 듣는다. 태도가 냉랭할 뿐 예의 없이 굴지는 않았는데 뭐든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지서의 벽 같은 성향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론 여기엔 사연이 있지만 애써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우스워 입을 닫고 살았다. 대학 시절 조금 친절하게 굴었더니 남학생이 3년을 쫓아다녀서 고생했다거나, 유부남 사수가 혼자 오해하고 소설을 쓰는 바람에 곤란했다거나 하는 것들은 혼자만 알고 삭인 사연이다. 차라리 ‘그 싸가지’라는 지칭이 낫다는 게 지서의 결론이었다.

“벌써 덧나려 하잖아요.”

그런 지서의 경계심을 고은기라는 이 애는 완벽하게 해제시켜 버리는 재주가 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마을에서 만났기 때문인지, 지서에게 중요한 순간마다 곁에서 도움을 줘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서울에서 만났어도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들이고 치료를 부탁할 수 있었을까.

아닐 것 같다.

“따가워.”

은기가 적갈색 소독약을 상처에 바르자 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고.

“참아요.”

은기는 진짜 의사라도 되는 것처럼 정교하게 상처를 살폈다. 실제로 은기의 손놀림은 제법 능숙했다. 환부에 가루약을 조심스럽게 도포하는 게 많이 해 본 솜씨다.

“미안해요.”

지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은기가 멈칫거렸다.

“발인 날에도, 시장에서도, 내 식대로만 생각하고 오해했어요. 미안해요.”

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내 사과 받아 줄 거죠?”

대답 대신 다시 손을 움직여 드레싱을 할 뿐이었지만 사과를 받아 준다는 뜻인 듯했다.

열이 많은지 은기의 손가락이 피부에 스칠 때마다 건조한 온기가 느껴졌다. 늘 몸이 차가운 지서의 체온과는 꽤 차이가 났다. 뜨거웠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에어컨 바람 때문에 사무실에선 핫팩을 쥐고 있는 지서로서는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끼고 싶은 충동이 드는 온기였다. 그녀는 가만히 그의 손을 관찰한다. 크지만 섬세한 느낌. 손가락이 곧고 길다. 손톱은 깔끔하게 손질해 거스러미 하나 없다. 은은한 비누 향이 오히려 향수 냄새보다 더 자극적이다.

“은기 씨, 샤워하고 왔어요?”

지서가 묻자 손에 테이핑을 하던 은기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당황했는지 은기의 새까만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귀 끝이 조금, 붉어진 것도 같다.

“저 땀 냄새 나요? 잘 씻었는데.”

은기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냄새를 킁킁 맡아 보며 말했다.

“아니.”

지서는 어린애를 희롱하는 나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누 냄새 나서 물어봤어요.”

나쁜 거 맞다.

놀리려는 의도도 아주 조금은 있었으니까.

“다 됐어요. 당분간 손 많이 쓰지 말고 물 안 닿게 조심해요.”

은기가 지서의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평온한 척하고 있었지만 이미 귀부터 시작해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컴퓨터 많이 하죠? 지서 씨 손목 근육도 많이 약해져서 다 고정되게 감았어요.”

부끄러워하면서도 은기는 지서의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한 번 감쌌다가 놔 주며 당부했다. 짧은 찰나였지만 묘한 안정감이 느껴져, 지서는 멀어지는 그의 온도가 아쉬웠다.

그래서 손 핑계를 대 보기로 한다. 어차피 이 손으로 요리는 무리이고 창밖에선 언젠가부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제법 거세 외출하고 싶지 않았고 항생제에 약한 지서는 약을 먹기 위해선 꼭 식사를 해야 했다.

“비가 많이 와요.”

지서는 작게 속삭이며 은기를 응시했다. 처마를 타고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와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쿵쿵 뛰는 은기의 심장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지서가 무의식중에 모기 물린 곳을 긁자 신경이 쓰이는지 은기의 눈길이 그녀의 목덜미로 향했다. 그 뜨거운 시선 때문인지, 부어오른 상처 때문인지 살갗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그의 눈길이 닿을 때마다 소양감이 온몸으로 퍼졌다. 지서는 몰래 발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은기 역시 무언가를 참으려는 사람처럼 꽉 주먹을 움켜쥔다.

“나 부탁 하나만 더 할게요.”

지서의 말에 은기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맑고 깊다.

“들어줄래요?”

흔들고 싶을 만큼. 장난삼아 돌을 던져 저 호수 같은 눈동자의 평온을 깨뜨리고 싶을 만큼.

“네.”

은기가 작게 대답하며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 배고파. 밥해 줘요.”

지서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고.

“해 줄게요.”

은기는 조용히, 남자의 목소리로 답했다. 낮게 갈라지는 쇳소리에 뜨겁고 고요한 숨소리가 더해졌다.

“그럼 난 뭘 해 주면 좋을까.”

지서의 물음에 은기가 천천히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감쌌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은기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집요한 시선. 그 눈빛의 온도는 여름을 닮았다. 노골적인 바람. 내가 흔들면 그는 분명 흔들릴 거라는 확신이 든다. 그래, 모르는 척하기엔 늦었다. 아니, 알면서도 그를 당긴 것은 그녀 자신이다. 지금 이 순간, 은기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고 지서는 그것이 즐거웠다.

“키스……. 키스해 주세요.”

은기가 작게 속삭이며 그녀에게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키스라 부르기엔 부족한, 입술이 스치는 정도의 접촉이었다. 지서는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부족해. 애매한 자극이 몸 안을 둥둥 떠다녔다.

뜨겁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뺨에서 미끄러져 내려가 목을 감쌌다. 모기에 물려 부은 자리를 엄지로 살살 쓸어 내며 은기가 지서의 귓가에 말했다.

“저 처음이에요.”

그러면서 은기가 긴 팔을 뻗어 지서를 당겨 안았다. 남자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얇은 티셔츠 너머 경직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서투를까 봐.”

작게 속삭인 그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며 깊게 포옹했다. 지서의 허리가 자연스럽게 은기의 팔 안에 갇히고 그녀의 가슴이 그의 것과 닿았다. 넓고 단단하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에 쏟아진다. 닿는 면적이 넓어질 때마다 그의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지서는 커다란 난로를 끌어안은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그의 온몸이 뜨겁다.

은기의 목덜미, 타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옷에 가려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떤 그림과 날짜가 쓰여 있었는데 잘 보이진 않았다. 타투 한 남자에 대한 편견이 있는데 이 애는 묘하게 잘 어울린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손으로 더듬었다. 슬쩍 만지기만 했는데도 그는 낮게 앓는 소리를 냈다.

“지서 씨…….”

은기가 열에 들뜬 목소리로 졸랐다. 지서는 은기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것을 가져갔다. 혀로 은기의 입술을 핥고 손으론 그의 뺨을 감쌌다. 이쯤이던가. 보조개가 있던 자리를 더듬자 그가 작게 신음했다. 손에 조심스럽게 힘을 주었다. 천천히 남자의 입술이 열린다. 서로의 혀가 닿는 순간 그가 크게 숨을 헐떡인다.

콰쾅!

창밖에선 요란하게 천둥이 친다.

지서는 자신의 혀를 더 깊이 밀어 넣으며 눈을 감는다.

……괜찮겠지. 이 정도의 장난쯤은.

“2 대 1 비율로요. 멥쌀 조금 더 넣어 주세요.”

지서의 말에 은기는 얌전히 독에서 쌀을 더 퍼 대야에 담았다. 그녀가 이제 됐다고 하자 그는 수도를 틀고 쌀을 씻어 불렸다.

“그다음엔요?”

“파 썰어서 기름에 볶아 줄 거예요. 아, 은기 씨 혹시 가지 싫어해요?”

“저 다 잘 먹어요.”

긴 입맞춤 후 적당히 라면이나 끓여 먹자는 그녀의 말에 은기는 자취 경력이 꽤 된다고, 알려만 주면 할 수 있다고 우겼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거짓말은 아닌지 기본은 하는 듯했다. 파를 다듬고 칼질하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갑자기 지서는 헛웃음이 났다. 방금 전까지 서로 부둥켜안고 헐떡였으면서 지금은 무슨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다.

키스가 처음이라며 안달 내던 은기는 서투르고 섣불렀지만 집요하고 열정적이었다. 깊숙이 들어와 꼼꼼하게 헤집던 남자의 혀가 아직도 입 안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요령을 알았는지 그는 그녀의 목덜미 상처를 핥고 흡입하며 깨물었고 덕분에 그 자리엔 지서를 신경 쓰이게 했던 소양감 대신 야릇한 통증이 자리 잡았다.

불쑥 지서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만지려던 손의 온도가, 그런 스스로에게 놀라 사과하던 은기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가지도 잘라 줘요.”

저 애가 순진하지 않았더라면. 죄송하다고 사과하며 욕실로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만약을 가정하다 지서는 은기 모르게 쓰게 웃었다. 아무리 충동이었다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두께는 어느 정도로요?”

난 왜 널 건드려 보고 싶을까.

“두껍지도 얇지도 않게.”

나한테 휘둘리는 모습에 괜히 못된 심보라도 튀어나온 걸까.

“이 정도면 될까요?”

“네, 딱 좋아요.”

지서의 조언에 은기가 가지를 들어 요리조리 살피고는 칼질을 시작했다. 아까부터 은기는 지서 쪽으로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더 귀엽다.

“칼질 잘하네요. 자취 오래했어요?”

“네, 열여덟 살부터요.”

이번에도 은기는 지서 쪽은 보지 않고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의외라는 듯 지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때 현숙이 했던 말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감나무 집 손자. 교수 아들. 몸 쓰는 일을 해 자주 다칠까 봐 걱정이라고 했던 게 기억났다.

“혹시 지금 몇 살이에요?”

지서의 질문에 은기가 칼을 내려놓고는 무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속상함, 섭섭함, 그런 종류의 감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저 스물세 살요.”

지서와는 여덟 살 차. 다행히 미성년자는 아니었다. 어차피 일상으로 돌아가면 순간의 장난으로 흘러가겠지만.

그녀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자 은기가 입술을 삐죽이고는 다시 칼을 집어 들어 가지를 썰기 시작했다.

“그럼 지금 대학생이에요?”

“아뇨.”

실례되는 질문이었다.

놀란 지서가 사과하려 입을 떼려는데 불쑥 은기가 덧붙였다.

“중졸이에요. 고등학교 중퇴했어요.”

괜히 물어봤나 보다.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일…… 비슷한 걸 해요.”

은기의 말을 끝으로 부엌엔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가지를 자를 때마다 나는 칼질 소리가 소음의 전부였다. 그때, 납골당에서 은기가 전화 통화를 하며 썼던 외국어가 네덜란드어였나 보다. 특이한 이력이라 궁금한데 왜인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 그럼 나보다 한참 동생이네.”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난…….”

“알아요, 서른한 살. 서울대 경영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했고 지금은 큰 회사 팀장이라고…… 할머니가 자랑하셨어요.”

자랑이라니, 의외였다.

“박 여사가 내 이야기 많이 했나 보네요.”

어째서일까. 은기가 말하는 박 여사와 지서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는 다른 사람 같다.

은기에게 박 여사는 다정하고 따뜻한 옆집 할머니였을 것이다. 그러니 장례를 끝까지 지켰겠지.

……그렇다면 왜, 그녀는 나한테만 그렇게 매정했을까.

“할머니가 지서 씨 명함 보여 주시면서 팀 리더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셨거든요.”

그 말에 지서는 문득 박 여사의 수첩에 있던 명함이 떠올랐다. 팀 리더라는 영어 아래에 쓰여 있던 그녀의 글씨. 은기가 가르쳐 준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지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과거에 인연이 있었던가. 그래서 그렇게 살갑게 굴었던 걸까.

“누나라고 해도 되는데.”

“싫어요.”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지서의 말에 은기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단칼에 거절했다. 마냥 순진한 것 같다가도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한 걸 보면 아예 무른 애 같지는 않았다.

“이거 이제 어떻게 하면 돼요?”

“아, 같이 볶을 거야. 볶아 주면 돼요.”

파기름을 내고 가지를 넣어서 같이 볶아 줄 거라는 말에 은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가지밥이죠? 할머니가 해 주신 적 있어요. 청경채를 넣은 된장국과 배춧국 중 무엇이 좋냐 묻자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 국은 배춧국, 청경채는 무치자고 제안했다.

모두 지서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이를 고은기에게 발설한 사람은 박화순 여사일 것이다.

은기는 느리지만 충실하게 지서의 지시를 따르며 상을 차려 냈다. 손이 많이 가 귀찮을 텐데 원래 차분하고 끈질긴 성격인지 지서가 과정을 생략해 말해 줄 때마다 굳이 레시피대로 하겠다며 고집을 부리기도 했다. 건너뛴 과정을 눈치채는 것을 보면 아마도 박 여사가 요리하는 걸 어깨너머로 보고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상을 차리고 지서가 첫술을 뜰 때, 은기는 긴장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고개를 끄덕이며 간이 딱 맞다 평하자 환하게 웃었다. 덕분에 지서는 배부르게 식사를 했지만 더부룩해 불쾌하지 않았다. 속이 편안한 느낌은 오랜만이었다.

음식을 준비하는 데 긴 시간을 써 버린 까닭에 정리까지 하고 나니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그사이에 비는 더 거세졌고 처지는 날씨 때문인지 몸이 나른해 지서는 서울로 가려던 계획을 수정했다. 어차피 당장 서울에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고은기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줄 알았던 은기는 자두를 한 아름 안고 다시 지서를 찾았다. 예쁜 것만 골라 온 그는 먹기 좋게 잘라 그녀에게 내밀었고 지서는 달게 받아먹었다.

지서가 다시 한번 누나라고 해도 된다고, 반말해도 된다고 하자 은기는 또 거절하며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라고.

“가슴 만지는 건 안 되는데.”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은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안달 내면서도 참으려 한다. 그 모습이 꽤 귀엽고 사랑스럽다. 지서가 먼저 쪽 소리 나게 뺨에 입을 맞추자 승낙의 의미로 이해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신생아를 다루듯, 유리 인형을 안는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가 느리고 섬세했다.

“아, 아파요?”

귀 아래에 닿는 입술이 간지러워 지서가 작게 신음하자 은기는 아프다는 뜻인 줄 알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살폈다.

“괜찮아요.”

흥분해서 그런 건데. 키스가 처음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 보다.

가슴이 맞닿자 얇은 섬유 너머로 은기의 체온과 단단한 근육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풍성한데 팔은 체모 하나 없이 매끄럽다. 운동을 진짜 열심히 하나 보다. 키도 크고, 손도 크고, 어깨도 넓고. 허리에 팔을 둘러 그를 안자 손끝에 단단한 등 근육이 만져졌다. 한 품에 다 안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이렇게 커다란 남자애가 자신 때문에 속상해하던 걸 생각하니 발뒤꿈치가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지서의 손이 나무처럼 곧게 뻗은 기립근을 따라 올라가며 더듬자 은기가 몸을 떨었다. 흥분했는지 작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그가 관절이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꽉, 주먹을 움켜쥔다. 당장이라도 지서를 만지고 싶은 것을 애써 참는 눈치다.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응.

이런 대화를 나눴던 것도 같다.

지서는 해가 질 때까지 그와 입을 맞추었다. 사실, 이대로 섹스를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했지만 정직한 고은기는 정말 키스만 했다. 저도 모르게 손이 그녀의 가슴으로, 허리로, 엉덩이로 가려 할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떠는 모양새가 비 맞은 강아지 같아 웃음이 났다.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지서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옅은 모기향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거실엔 넓게 모기장이 쳐져 있었고 은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어느새 비가 그쳐 맑아진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에 눈썹달이 떴다. 얼마 되지 않는 그 달빛에 홀린 지서는 몸을 움직여 그의 무릎을 벴다.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허벅지는 그녀의 허리둘레와 맞먹을 만큼 두꺼웠다. 작은 접촉에 놀라 흠칫하던 은기는 지서가 허벅지에 팔을 감자 뜨겁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편하게 벨 수 있도록 다리를 조금 움직여 주기까지 했다. 그녀가 반쯤 말려 올라간 반바지 아래, 매끈한 다리의 맨살을 더듬자 그의 체온이 여름 한낮으로 변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지서는 경계심이 심한 사람이다.

이 충동의 이유는 많다.

갑자기 일상이 무료해서.

무언가 자극이 필요해서.

네가 뜻밖에도 너무 매력적이라.

단지 이 밤이 지나치게 부드럽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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