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7)

03. 무정형의 형상

‘고은기’

은기는 봉투에 쓰여 있는 자신을 이름을 노려보았다. 지서의 생김새만큼이나 글씨는 단정하면서도 칼 같았다. 글씨에서 온도가 느껴질 리 없는데도 얼음처럼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손으로 더듬자 살갗이 베인 것처럼 쓰렸다.

납골당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은기는 지서의 표정 없는 얼굴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장례식 내내 창백하게 지쳐 보이던 얼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허리를 곧게 펴고 있던 자세도. 과호흡으로 쓰러져 안았을 때 너무 가벼웠던 것도 계속 마음에 걸린다. 그녀는 이따금 박화순 여사가 보여 주었던 사진보다 더 가늘고 여렸다.

조금만 힘을 주어 잡아도 붉어질 것 같은 흰 피부가, 햇빛을 받으면 투명하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고단해 보이는 작은 어깨가 내내 머릿속을 맴돈다.

손은…… 괜찮은 걸까.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다짜고짜 손 좀 보자고 할 수도 없고.

은기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인스타그램 애플리케이션을 열었다. 스폰서 기업 홍보를 위해 에이전시에서 관리하는 공식 계정이 있지만 이 계정은 아무도 모른다. 딱 한 사람만 보기 위해 만든 것이니 팔로잉한 사람도 딱 하나이다. JiSeo_1222. 이거 찾으려고 얼마나 용을 썼는데.

은기가 3년째 염탐 중인 이 계정의 주인은 한 달에 한 번도 업로드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어쩌다 소식을 전해 주나 싶으면 사진 한 장, 멘트 한 줄. 그나마도 멘트가 없을 때가 더 많으니 이 또한 박화순 여사가 말하곤 했던 이지서라는 사람의 성격 그 자체였다. 꽃을 좋아하는지 플라워 클래스에서 직접 만든 생화 리스나 다발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강렬한 원색의 꽃을 독특하고 과감하게 활용해 잘 모르는 은기가 봐도 그동안 접해 본 플라워 아트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팔로워도, 댓글을 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친절하지 않은 지서는 단 한 번도 답해 주지 않았다. 마지막 업로드는 6개월 전. 제주도 위치만 찍힌 동백꽃 사진이다. 남자 친구랑 여행 간 건가 싶어서 은기는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 봤다.

<남자 친구랑 여행 가셨나 봐요. 저도 어디 갈지 찾아보는 중인데 여기 가 봐야겠어요.>

예상했던 대로 지서는 대꾸조차 하지 않지 않았고 지질한 스토커가 된 기분에 은기는 자신의 댓글을 삭제했다.

“오, 이게 뭐야? 나 밥 사 주려고 돈 뽑아 왔냐?”

그때 불쑥 나타난 정훈이 은기의 손에서 잽싸게 봉투를 낚아챘다.

“아, 형. 이리 줘.”

놀라서 벌떡 일어난 은기가 빼앗으려 팔을 뻗어 봤지만 정훈은 몸을 돌려 막으며 봉투를 슬쩍 열어 봤다.

“뭐야, 진짜 돈이네? 이게 다 얼마야?”

그래, 돈이다. 이지서가 고은기에게 수고했다며 아르바이트비 주듯 쥐여 준 돈.

“달라니까.”

“너 상갓집 간다더니 어른한테 용돈 받았냐?”

차라리 어른이 준 용돈이면 이렇게 황당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달라고.”

“야, 이걸로 고기 먹자.”

손을 내밀었지만 정훈이 줄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은기는 테이블을 반 바퀴 돌아 그에게로 다가갔다. 도망가려는 정훈의 팔을 잡아채자 그가 몸을 틀며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어림없다. 박정훈은 크지만 고은기가 더 크다. 은기가 팔꿈치로 그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야! 야, 알았어. 줄게! 줄 테니까 이거 놔! 야! 고은기!”

인적이 드문 넓은 카페 안, 운동복 차림의 커다란 남자 둘이 몸싸움을 하니 창가 쪽에 홀로 앉아 있던 여자가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나 죽는다고!”

엄살이다.

몇 차례의 실랑이 끝에 정훈을 힘으로 제압한 은기는 그의 손에서 봉투를 빼앗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구겨졌잖아.”

정훈이 봉투를 움켜쥔 탓에 지서의 글씨가 일그러졌다.

“짜증 나게.”

은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구겨진 종이를 손으로 꾸욱 눌러 폈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자 그제야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정훈이 은기의 눈치를 살폈다.

“뭔데. 돌아가신 분이 주신 용돈 같은 거야?”

은기는 정훈의 말에 대꾸도 없이 봉투에 쓰인 글씨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야, 고은기.”

“……형한테 짜증 내는 거 아니야. 그냥, 답답해서.”

지서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은데 당황스럽고 놀라서 그냥 받아 온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제 안 볼 사이인 것처럼 구는 게 속상해서, 내가 돈 때문에 장례식을 도왔다고 생각하는 게 섭섭해서. 그래도 그렇게 헤어지지는 말 걸 그랬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장담 못 하는데 납골당에서 차 태워 준다고 했을 때 얌전히 따라 탈걸. 그랬더라면 연락처라도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너 왜 그래. 형이 새 돈 뽑아다 줘?”

지서의 냉랭한 표정과 밤처럼 낮은 목소리가 아직도 은기의 눈앞에, 귓가에 맴돌았다. 박화순 여사의 말이 다 맞았다. 차갑고 쌀쌀맞은 성격이라고 했었지. 벽 같은 애라고. 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완고하고 고집이 세며 까칠하다고.

“고은기 너 왜 그래. 기사 봤는데 잘 풀리고 있다며. 뭐가 안 좋아?”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이 썩었는데. 형은 장난친 건데 네가 그러면 내 마음이 아프잖아. 뭔데. 햄스트링 부상 재발했어?”

햄스트링은 멀쩡하다. 지서가 내민 돈 봉투에 욱해서 산길을 구두 신고 내려오는 바람에 뒤꿈치가 까지긴 했지만 이 정도의 가벼운 상처는 연습 경기마다 달고 다니는 것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몸 컨디션도 지나치게 좋아 탈이다.

“형.”

“응. 뭔데. 말해 봐.”

은기의 물음에 정훈이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기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이다 꾸욱 닫자 정훈이 긴 한숨을 내쉬며 그의 멱살을 잡았다.

“말해. 말하라고 했지. 나 이런 거 제일 싫어해.”

정훈의 기세에 잠시 망설이던 은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기보다 여덟 살 어리면 남자로 안 보일까?”

의외라는 듯 정훈의 눈이 커졌다.

“여자?”

정훈이 되묻자 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그건 내가 조언해 줄 수 없는 영역 같다.”

소개팅한다더니 또 망했나 보다.

누가 누구에게 조언을 해 주겠다는 건지. 방금 전까지 형만 믿어 보라는 듯 눈을 반짝이다 금세 풀이 죽은 정훈을 보며 은기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차라리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운동장을 뛰고, 공 차는 게 훨씬 쉬운 것 같았다.

박화순 여사가 해 준 말들을 토대로 이미지 트레이닝 했던 것들도 막상 그녀 앞에 서면 다 무용지물이 된다. 어린애 취급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자신이 미숙한 것도 맞아 짜증이 난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다가가고 싶었는데 용돈 뜯어내려는 애새끼 취급이라니.

“고은기도 여자 꼬시려고 노력을 다 하는구나. 그 얼굴에, 그 키에, 그 재력을 가지고도 여자 때문에 고민을 다 하고.”

눈만 마주쳐도 정신이 나가 버리고 귀부터 목까지 확 빨개지며 열이 난다. 가슴은 쿵쿵, 눈앞은 어질. 이게 첫눈에 반한다는 거구나 새삼 실감이 된다. 이미 오래전에 반했지만, 볼 때마다 빠진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된다.

“이건 뭐야?”

정훈이 옆에 놓인 쇼핑백을 향해 턱짓하며 묻자 은기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커피 내려 먹는 거.”

잘 몰라서 직원이 권해 주는 대로 다 쓸어 담았는데 맞게 산 건지 모르겠다. 커피 로스팅이 어쩌고, 여과지가 어쩌고, 핸드 드립이 어쩌고. 직원이 맛보라며 직접 내려 주기도 했는데 프라푸치노나 스무디 같은 단걸 좋아하는 은기의 입엔 맞지 않았다. 차라리 보리차가 더 나은 거 같다.

“뭣하면 돈으로 어필해. 나 주급 오천만 원이라고 하면 혹할지도 몰라. 센터백(Center Back: 축구 중앙 수비수) 주급이 그 정도면 완전 탑 클래스지.”

정훈의 말에 은기는 막 들어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나 주급 오천 아니야.”

“어, 아니야? 사천이야?”

“칠천오백. 수당까지 다 해서 연봉 50억 정도.”

그리고 은기의 에이전트는 이번에 이적하면 주급 10만 파운드, 한화로 1억 5천 정도는 무난하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형, 우리 식사 다음에 하자. 내가 나중에 고기 살게.”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은기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응?”

“나 급한 일이 생겼어. 나중에 봐.”

“야! 야, 고은기!”

정훈을 팽개쳐 두고 카페에서 나온 은기는 차를 대 둔 주차장 방향으로 전력 질주 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차로 무연까지 한 시간. 빠르게 가면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황급히 자신의 차에 오른 은기는 다시 한번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은기야, 오늘 박 여사님 삼우제잖아. 지서 아직 서울 안 올라갔는데 내가 음식 해다 주면서 보니까 이제 납골당 갈 준비 하는 거 같더라고. 시장 가서 과일 사 갈 거라는데 애가 얼굴이 까칠해. 내가 장사만 아니면 같이 가는 건데 걱정되네.]

축구로 완전히 진로를 정한 것은 은기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 무렵, 부모님은 미국 대학으로 연수를 갈 계획 중이었는데 마침 그때 지방 프로 팀에서 은기에게 유소년 팀 입단 제의를 해 왔다. 취미로 하던 축구였지만 미국에 가면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학교 친구들과 송별회를 하며 몇 날 며칠을 울었던 은기는 열심히 부모님을 졸랐다. 입단 제의가 온 팀의 연고 도시는 할머니의 집에서 한 시간 거리. 평일에는 친척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고 주말에는 할머니와 지내겠다며, 미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은기가 무연리에 온 것이 열한 살 때였다.

그 후로 은기는 주말이면 시외버스를 타고 무연리로 와 할머니 장봉령 여사와 그녀의 옆집에 사는 박화순 여사의 친구가 되었다. 여기저기 뺑뺑 돌고 정거장마다 다 서는 느리디느린 시외버스였지만 무연리로 가는 두 시간이 지겹지 않았다.

특히 박화순 여사와의 대화는 늘 기대되고 즐거웠다. 친할머니인 장 여사가 질투할 정도였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박 여사가 해 주는 이야기 속 ‘이지서’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주말에 무연리에 가면 은기는 늘 멀리서 지서를 바라보기만 했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예쁜 누나. 차가워 보여서 감히 범접하지 못했던 사람. 고3이라 공부한다고 정신없던 지서에게 공 차며 얼쩡거리는 꼬마애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우습게도 이 첫사랑의 계기는 김밥이다.

그때, 은기는 유소년 팀 겨울 현장 학습으로 파주 국가대표 팀 트레이닝 센터에 가기로 예정되었다. 센터에 들렀다가 임진각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오는 일정이었는데 지역 대회 예선 준비에 정신이 팔려 할머니에게 말하는 걸 새까맣게 잊었다.

도시락은 개인 지참이었고 하필이면 그때 할머니는 제주도 여행 중이었다. 주말 동안 식사는 잔뜩 끓여 둔 사골국으로 해결했지만 도시락으로 싸 가기에는 무리가 있는 메뉴였다. 지금 같았으면 편의점 김밥이라도 사 갔을 텐데 그 시골 마을에 그런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할머니에게 말하면 당장 집에 오겠다고 할 게 뻔해 은기는 혼자 준비하기로 했다. 그녀가 이 여행을 얼마나 기대했는지 잘 알기에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도시락 메뉴를 검색해 봤다. 김밥 사진을 보니 괜히 배가 고픈 기분이었지만 너무 레벨이 높았다. 그런데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니 먹고 싶었다.

잠깐 동안 은기는 머리를 굴려 본다. 친구 도시락을 빼앗아 먹을까. 김밥 한 줄 더 부탁하고 간식을 잔뜩 사 가 나눠 먹자고 할까. 고민됐지만 대회마다 응원 오는 부모님이 없다고 은근히 무시당하던 게 떠올라 생각을 접었다. 은기가 5, 6학년을 제치고 지난 예선전에 주전으로 나가는 바람에 요즘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도시락에 도전을 해 보고 안 되면 슈퍼에서 빵이라도 사 가면 될 테니까. 그렇게 하기로 정했다.

“뭐 사러 왔는데 거기서 그러고 있어? 과자 이쪽이잖아.”

김밥 재료를 메모해 온 종이를 보며 냉장 코너에서 얼쩡거리자 현숙이 은기에게 물었다.

“아, 저 김밥 싸야 해서요.”

“김밥? 할머니 여행 가셨지 않아?”

“내일 축구부 현장 학습 가는데 도시락 싸 가는 걸 제가 까먹었어요.”

은기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현숙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직접 김밥을 싸겠다고?”

약간의 비웃음이 담겨 있는 말투였다. 별 뜻 없는 말인 걸 아는데도 괜히 주눅이 들어 은기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디 종이 봐.”

순식간에 은기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챈 현숙이 메모를 소리 내어 읊었다.

“맛살, 햄, 단무지…… 검색은 열심히 해 왔는데 너 혼자 김밥 만드는 건 무리야.”

안다.

“그럼 그냥 빵 사 가면 돼요. 혹시 할 수 있을까 싶어서 찾아본 거예요.”

“도시락은 아줌마가 대충 싸 줘도 되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은기는 어색하게 대꾸하며 빵이 쌓여 있는 매대 쪽으로 다가갔다. 보름달 빵, 크림빵, 꿀호떡빵. 뭘 사 갈까 고르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서였다. 이제 봄이 오면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다던 옆집 누나. 편안한 옷차림의 그녀는 군것질거리를 사러 왔는지 손에 과자를 한 아름 들고 있었다. 박 여사도 함께 여행을 갔으니 지서 역시 집에 혼자일 것이다.

요즘도 가끔 옆집에선 그녀, 지서와 박 여사가 싸우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했다. 솔직히 은기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학금까지 받고 좋은 대학에 갔는데 왜 옆집 할머니는 기뻐하지 않는 걸까. 은기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웃할 때면 그의 할머니는 웃으며 말하곤 했다. 너무 사랑해서 품에서 떨어지는 게 불안해서 그러는 거라고. 그게 무슨 뜻인지 어린 은기는 알 수 없었다.

“너, 김밥 싸야 해?”

눈이 마주치자 지서가 물었다.

“네.”

“맛있겠네.”

혼잣말처럼 말하며 지서가 손에 들고 있던 과자들을 다시 하나, 둘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냉장실 쪽으로 다가가 은기가 사려 했던 김밥 재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은기는 빵을 고르던 걸 멈추고 재료를 챙기는 지서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이게 뭘까. 김밥을 싸 주겠다는 의미일까. 쌀쌀맞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친절이다.

“뭐야, 너 은기 김밥 싸 주게?”

지서가 재료를 챙겨 계산대에 가져가자 현숙이 물었다.

“아뇨. 저 먹으려고요.”

“그럼 하는 김에 은기 한 줄 싸 주면 되겠네.”

“제가 왜요.”

“어머, 얘 좀 봐. 너 진짜 심보가 왜 이래!”

아……, 아니었구나.

몰래 엿들은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의 대화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지서가 김밥을 싸 줄 거라고 생각한 거지. 괜히 민망해 은기는 다시 빵이 쌓여 있는 매대로 몸을 돌렸다.

“꼬마야.”

꼬마라고 불릴 만큼 작지는 않았지만 지서가 지칭하는 게 은기 자신 같았다. 뒤돌아보자 그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돈, 반 내.”

“……네?”

“재료비 반반. 난 내 김밥 쌀 거니까 넌 네 김밥 싸.”

지서의 말에 현숙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끼어들었다.

“넌 진짜 애한테 돈을 받아야겠니?”

“저 이제 돈 없어요. 노인네가 학비 한 푼도 안 준다 그래서 지금부터 아껴야 해요.”

“어휴 진짜 둘 다 지독하다, 지독해.”

현숙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어?”

지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은기를 보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아뇨, 낼게요.”

은기는 계산대로 가 할머니가 주고 간 비상금을 내밀었다. 재료값을 칼같이 5:5로 나눈 그녀는 10원짜리까지 정확히 계산해 은기에게 주었다.

슈퍼에서 나온 은기는 지서보다 몇 걸음 뒤에서 그녀를 따라 걸었다. 겨우 오후 4시인데 벌써 해가 저물며 석양이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에 붉은 물을 들였다. 은기는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간지럽고 기분이 이상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렸다. 잠시 멈춰 선 지서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정리하고는 걸음을 더 빠르게 옮겼지만 힘들어 보였다. 황량한 겨울의 들판. 이 바람에 지서가 날아갈까 봐 걱정이 돼 은기는 후다닥 그녀의 옆으로 뛰어갔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서 본다. 하지만 아직 지서보다 키가 작아 든든한 바람막이 역할을 하기엔 역부족이다.

은기는 몰래 그녀를 훔쳐보았다. 시선이 자신보다 조금 위에 있었다. 저 정도 되는 6학년 형이 170cm라고 했던 것 같은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은기는 지서보다 작은 게 조금 속상했다.

그때 지서가 기습적으로 은기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 내일 몇 시에 출발해? 대구로 가서 출발하는 거야?”

은기가 대구에서 지내는 것을 아는 듯했다. 별것 아닌데도 기뻤다.

“관광버스가 여기 지나간다고 7시까지 마을 앞에 나와 있으면 된다고 그랬어요.”

“그럼 4시까지 오면 되겠네. 우리 집으로 4시까지 와.”

“새벽 4시요?”

“응. 나도 김밥 처음 싸 보는 거라 시간 넉넉하게 잡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 네.”

“다시 말하지만 내 거는 내가, 네 김밥은 네가. 알았어?”

지서의 물음에 은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일찍 자고, 내일 봐.”

성의 없이 인사한 지서가 빨간 철문을 밀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끼익하며 문이 닫히고 그녀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쿵, 하고 현관까지 닫힌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뜨거워진 뺨을 스쳐 지나간다.

은기는 멍하니 문을 바라본다.

네 김밥은 네가.

지서가 내세운 원칙이었지만 주방 일이 서툰 은기에게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일단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건 성공했다. 이상하게 긴장이 돼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3시에 일어나 꼼꼼하게 씻고 평소엔 할머니가 피부 튼다고 잔소리해도 바르지 않던 로션까지 열심히 발랐다.

4시가 되기 10분 전, 지서의 집으로 갔다. 이미 깨어 있는지 집 안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괜히 긴장이 되어 은기는 5분 정도 서성거리다 벨을 눌렀다.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할머니가 잘 말려 둔 곶감을 챙겨 와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지서가 피식 웃고는 은기에게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집으로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미 어느 정도 준비를 해 둔 것인지 주방에선 작은 소음이 들렸다.

“전 뭐 하면 돼요?”

“일단 여기 앉아서 하는 거 봐.”

은기가 욕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자 지서가 식탁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도마 위엔 그녀가 채 썰던 당근이 놓여 있었다. 당근을 좋아하지 않아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옆엔 오이. 오이는 괜찮았다.

“못 먹는 거 있어?”

재료를 살피는 은기의 시선을 느꼈는지 지서가 물었다.

“저 당근요.”

“못 먹는 거야, 안 먹는 거야?”

지서의 물음에 은기는 쭈뼛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안 먹는 거요.”

“그럼 먹어.”

목소리가 냉정하다.

“네에.”

망했다. 그냥 먹는다고 할걸. 편식쟁이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지서가 별다른 노력 없이 말 몇 마디로 은기에게 당근을 먹인 걸 알면 손자의 편식을 고치려 애쓰던 할머니가 섭섭해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칼질할 줄 알아요. 도와드릴게요.”

은기가 호기롭게 말하자 칼을 집어 들던 지서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잘해?”

“할머니가 사과…… 잘 깎는다고 그러셨어요.”

은기가 눈치를 보며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그냥 보고 있어.”

“……네.”

어쩐지 입을 열수록 망하는 기분이었다.

당근을 채 썰고, 오이도 채 썰고. 그녀의 칼질은 굉장히 능숙했다. 지서는 채 썬 야채를 소금에 절이고 불린 쌀로 밥을 지었다. 분명 그녀도 김밥 싸는 건 처음이라고 했는데 미리 레시피를 찾아보고 모조리 외운 것인지 모든 게 빈틈없이 진행됐다.

중간, 중간 지서는 은기에게 김밥 싸는 과정을 설명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같이 김밥을 싼다기보단 같이 김밥 싸는 법을 공부하는 느낌이었다.

“자, 재료 준비는 끝. 바닥에 신문지 깔자.”

어묵까지 다 볶은 후 지서가 은기에게 지시했다.

은기는 바닥에 넓게 신문지를 깔고 지서가 재료별로 담아 둔 접시를 착착 옮겼다. 잠시 짬이 나자 지서가 허리를 쭈욱 펴며 길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녀가 팔을 위로 들자 헐렁한 티셔츠가 당겨지며 몸의 굴곡이 드러났다. 은기는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몸을 돌렸다. 또 갑자기 가슴이 간지럽고 귀가 뜨거워진다. 속이 울렁거린다.

“이리 와. 김밥 마는 건 네가 할 거야.”

“네에.”

나쁜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은기는 지서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를 따라 자신의 앞에 놓인 김발에 김 한 장을 깔았다. 그 위에 밥을 펼쳐 손으로 꾹꾹 누르고 차례대로 재료를 올렸다.

“손끝으로 동그랗게 모양 잡아 주면서 말아.”

지서가 능숙하게 김밥 마는 법을 보여 주었다. 은기도 어설프게 따라 해 보았지만 보기보다 꽤 까다로웠다. 재료가 밖으로 쏟아지려 해 억지로 힘을 주어 말아 버리자 어딘가 터졌는지 꼴이 김밥이라기보단 주먹밥에 가깝다.

“밥도 속도 너무 많이 넣었네. 밥은 지금보다 더 적게. 재료도 절반만. 처음엔 다 그래. 이건 연습하는 거다 생각해.”

지서가 진지한 어조로 조언했다.

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김 한 장을 깔았다. 밥도 적게, 재료도 적게. 아까에 비하면 동그랗게 잘 말리긴 했는데…… 상대적으로 볼품이 없었다. 은기의 두 번째 작품을 보고는 지서가 피식 웃었다.

“그건 또 너무 적잖아.”

그녀의 김밥은 두께도 적당하고 모양도 예쁘다.

“자, 밥은 이만큼.”

지서가 보여 주자 은기는 눈대중으로 밥 양을 따라 했다. 좋아, 이 정도면 얼추 비슷한 것도 같았다. 이번에도 그녀를 따라 재료를 채우고 신중하게 말기 시작했다.

“꽉 누르지 말고 천천히 살살 말아 줘. 밥에 온기가 있어서 김 끄트머리가 잘 붙으니까 너무 힘주지 말고.”

“네에.”

살살. 억지로 말고 살살. 은기는 속으로 몇 번이고 반복하며 김밥을 말았다. 이 정도면 되었겠다 싶어 발을 풀고 자신의 세 번째 김밥을 봤다. 이번엔 모양이 제법 그럴듯했다.

“저 이거 했어요. 괜찮아요?”

자랑스럽다는 목소리로 말한 은기가 김밥을 소중하게 들어 지서를 향해 내밀었다. 그녀가 한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리저리 은기의 김밥을 살펴본 지서가 그를 보며 웃었다.

“잘했어.”

미소를 보는 순간 심장이 쿵쿵 울려 댄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어느새 창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아침 햇살을 받아 연한 갈색으로 빛난다. 은기는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짧게 잘라 밤톨 같은 머리털이 손바닥을 스치자 또 가슴이 간지럽다.

“다음에 또 혼자 도시락 싸야 할 일이 있으면 넌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번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 든다.

“해 보는 게 중요해. 누구든 다 처음은 있으니까 실패해도 될 때까지 하면 돼.”

러닝을 할 때면 아무 생각 없이 흥얼거리던 가요의 가사가, 첫눈에 반한다는 그 노랫말이 이젠 어렴풋하게 이해가 되었다.

“……네.”

은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첫사랑의 순간이었다.

은기도 노력을 했지만 모양은 지서의 것이 훨씬 나았다. 맛도 그녀의 것이 더 맛있었다. 지서는 자신의 것을 도시락으로 싸 주었고 은기의 김밥은 할머니 드리라며 락앤락 통에 잘 챙겨 주었다. 은기는 괜히 박 여사가 생각나 지서가 싼 김밥을 한 줄 더 챙겨 두었다. 왠지 그녀가 기뻐할 것 같아서였다.

트레이닝 센터 견학을 마치고, 도시락을 먹는데 비상금이라고 쓰여 있는 봉투에 은기가 지서에게 준 재료값에 5,000원을 더한 금액이 들어 있었다. 은기는 휴게소에서 간식 사 먹고 싶은 걸 참으며 봉투째 고스란히 간직했다.

봉투엔 레몬 맛 사탕도 들어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은기는 사탕 껍질을 조심스럽게 벗겨 입에 넣었다. 평소엔 깨물어 먹는데 그 사탕만큼은 입 안에서 오랫동안 조심조심 녹여 먹었다.

사탕이 녹을수록 레몬 향이 넘실거리며 입 안 가득 퍼졌다. 첫사랑의 맛. 그러다 불쑥 그녀의 입술이 떠올라 은기는 혼자 몸을 꼬며 얼굴을 붉혔다. 입 안의 사탕이 점점 작아져 가자 괜히 마음이 울적해 김이 서린 차창에 우는 표정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사탕을 그렇게 먹어 버린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까무룩 졸다가 그녀의 꿈을 꾸었다.

그 후로 지서는 은기의 밤을 자주 훔쳐 갔다.

가만 보면 돈 주는 게 버릇인가.

“난 그래도 내가 유명해진 줄 알았는데.”

은기는 지서의 집 창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옅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아직 그녀는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뒤로 시즌이 끝나고 여유가 될 때마다 무연리로 내려가 얼쩡거렸지만 지서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설레며 왔다가 실망하며 돌아간 게 제법 되었다.

U-17 대표 팀 시절 네덜란드 프로 팀 스카우터의 눈에 들어 열여덟 살에 유럽으로 갔고 그 후 U-20 청소년 월드컵에 막내로 합류해 준우승의 주역이 되며 이름을 알렸다. 청소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중앙 수비수로 뛴 은기는 마지막 추가 시간에 골을 내주고는 다 자기 탓이라며 대성통곡을 하는 모습이 전파를 타 울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앳되고 덩치만 큰 어린애가 졌다고 우는 게 귀여웠던 모양인지 한동안 축구 팬들 사이에 꽤 크게 회자되었다.

지난 올림픽에서는 헤더(Header: 머리로 볼을 컨트롤하거나 슈팅, 패스하는 동작)로 4강전 결승 골을 넣었다. 이런 말 내 입으로 하기 좀 그렇지만 한국 축구 판에서 고은기는 나름 유명인이다. 올림픽 은메달을 따며 병역 특례 혜택을 받아 군 문제를 해결하면서 영국 프리미어 리그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오퍼도 제법 많이 온다.

포털 사이트에서 뉴스 일을 하고 있으면 축구 선수 고은기는 알 법한데. 아무리 스포츠에 관심 없다고 해도 나 정도면 아는 게 맞지 않나.

역시 아버지 말이 맞았다. 장난기가 많은 아버지는 은기를 볼 때마다 늘 골 먹히고 욕만 먹을 거 수비수 해서 뭐 하냐고, 포워드나 윙어 같은 공격수를 해야 했다며 농담을 하곤 했다. 백인이나 흑인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타고난 피지컬이 좋고 키가 큰 편이라 세트 피스에서 헤더 골을 넣긴 하지만 어쩌다 가끔이었다. 공격수였다면 골 넣을 때마다 뉴스 탔을 건데, 그럼 지서가 감나무 집 손자 고은기는 기억 못 해도 축구 선수 고은기는 알았을 건데.

어릴 적 동네 아기 스포츠단에서 처음 축구를 배웠을 때 다들 공격수를 하고 싶어 했다. 코치 선생님은 발이 빨랐던 은기의 포지션을 공격수로 정해 주었는데, 수비수로 배정받은 단짝이 하기 싫다고 울어서 바꿔 주는 바람에 센터백 외길 인생을 걷게 됐다. 센터백이 공격수만큼 폼은 안 나지만 멋진 포지션이라고 생각했는데 축구 인생 처음으로 그때 바꿔 준 것을 후회했다.

이제 와서 포지션을 변경한다고 하면 미친놈이라고 하겠지.

은기는 지서의 집을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서가 또 돈을 내밀어 마음 제대로 상한 그다음 날, 은기는 홀로 박화순 여사의 납골당을 찾았다.

박 여사의 유골함에는 지서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생화로 장식된 액자를 보자 시장에서 만났을 때 지서가 들고 있던 촌스러운 꽃다발이 떠올랐다. 다발을 풀어 그녀가 다시 정리한 모양이었다.

꽃을 보자 지서는 친부를 닮아 손재주가 좋다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는데 애비 닮은 게 싫어 죽어라 반대했다던 박 여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때 박 여사의 표정이 은기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 은기는 막연히 그녀가 슬퍼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어렴풋하게 그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후회나 회한, 차마 다 털어놓지 못한 사랑. 그런 말들이 둥실 떠오른다.

박 여사는 알까. 은기에게 지서의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앙다물고 있어 단호해 보이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는 것을.

그녀가 이야기해 준 지서는 무심하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박 여사는 그것들이 다 당신 탓이라며 책망했다. 자기 스스로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 그런 거라고. 타인에게 단단히 벽을 세우는 성품이라 아마 친구도 없을 거라고. 혹시나 만나게 된다면 은기 네가 지서 누나의 친구가 되어 주라고.

“죄송해요 할머니. 저 지서 누나 친구는 못 될 거 같아요.”

은기는 티슈를 꺼내 액자에 묻은 꽃가루를 닦아 주며 엷게 웃었다.

서울에 가지 못하게 한 것도, 친모와 연락하지 못하게 한 것도, 출생 때문에 혹시나 풍파에 휩쓸려 다칠까 봐 걱정해서였다는 걸 지서에게 끝내 털어놓지 못한 채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차라리 미움받는 게 편하다며 쓰게 웃던 박화순 여사의 영정 사진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했다. 이 사진은 은기가 골라 준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은기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박 여사는 어느 정도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했다. 독수리 타법에 메일이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늘 은기의 이메일에 짧게 답하곤 했는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꽤 장문이었다.

언제 한국에 들어올 수 있는지 물었고, 혹시나 그때 들어와 보지 못하더라도 너무 마음 쓰지 말라는 당부였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과 같은 일이니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해도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라고도 했다. 내 앞에서 웃어 달라고. 혹 여력이 된다면 지서를 돌봐 달라 부탁하며, 지서라면 텃밭의 작물을 다 말려 죽일 테니 그건 너에게 주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녀 스스로 죽음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긴 여행을 준비하는 듯한 그 글을 보며 은기는 조금 울었다. 그리고 평온한 척 답했다. 그러겠다고. 할머니 보고 싶다고.

시즌이 끝나고 한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타기 직전 박 여사의 부고를 전해 들었다. 슬픔보다도 그녀의 부탁과 당부가 더 크게 와닿아 비행기에서 내내 이메일만 들여다봤다.

그렇게 박화순 여사와 다시 만났을 때, 검은 상복을 입은 지서의 작은 어깨를 보며 은기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지서의 남편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랬다면 그녀의 옆에 서서 손을 잡아 줄 수 있었을 텐데.

이 무정형한 마음의 형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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