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7)

04. 환상통

아침 8시.

오늘도 지서는 똑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침을 시작했다. 문을 열면 어제처럼 텀블러엔 커피가, 작은 그릇엔 샌드위치나 스콘 같은 것들이 있겠지.

키스를 한 다음 날, 은기는 커피와 간식을 내밀며 지서가 줬던 돈도 다시 돌려주었다. 어쩐 일인지 새 봉투였지만 돈은 그대로였다.

지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첫날에는 좀 썼던 커피가 둘째 날부터는 그럭저럭 마실 만하더니 셋째 날인 오늘은 지서의 입에 딱 맞았다.

“무슨 소꿉장난하는 거 같네.”

지서는 창가에 서서 먼 길을 따라 사라지는 은기의 차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작은 경차인데 저 차로 고속도로까지 타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었다.

아침이면 은기는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문 앞에 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점심이 조금 지난 시간 무렵에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나른해 보이는 얼굴, 살짝 젖은 머리카락과 옅은 파스 냄새. 운동을 하고 온 눈치였다. 간식이라며 사 온 디저트의 상호를 보니 대구까지 다녀오는 모양이다. 한창 몸 관리하고 외모에 신경 쓸 나이이긴 한데 과하게 부지런하다.

이런 종류의 호감을 안다. 차라리 날것 그대로, 본인이 원하는 것을 표하는 가벼운 성의였다면 지서도 은기의 호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선을 긋는 것은 지서가 가장 잘하는 것 아니던가. 만약 이곳이 서울이었다면 고작 20대 초반 남자애의 이런 호감 표시는 그녀에게 고려 사항조차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계속 저 애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면 이 마을이 너무 조용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이 여유가 갑작스러워 어색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알게 된 것은 겨우 일주일 남짓. 아는 거라곤 이름과 나이가 전부이다. 직업도 잘 모른다. 지금은 네덜란드에서 일하고 있고 잠시 한국에 들른 것이라는 정도뿐. 중졸이라는데 EU 국가에서 일을 할 자격이 되나. 취업 비자가 나오나. 부모님이 교수라는데 오픈 마인드인가 싶었다. 보통은 더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고액 과외를 때려 붓는 경우가 많은데.

텀블러에 담긴 커피를 다 마신 지서는 휴대폰 액정을 터치해 네덜란드를 검색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기회가 된다면 가 보고 싶어 블로그의 여행 후기를 보다가 문득 네덜란드에서만 합법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리에 마리화나 냄새가 난다든가, 카페인 줄 알았는데 마리화나를 피우는 곳이었다든가 하는 것들.

중졸에 피지컬이 엄청난 20대 초반 남자애가 마리화나가 합법인 나라에서 일을 한다.

좀 이상한 생각이 들려 해 지서는 픽 웃고 말았다. 마약상이라니. 그럼 난 마약상의 첫 키스 상대인가.

순진한 척 연기하는 걸 수도 있지.

아니, 그러기엔 반응이 너무 솔직했다.

아니, 아니다. 어마어마한 연기파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문득, 평범한 남자들보다 더 매끈했던 은기의 팔과 다리가 신경 쓰였다. 왁싱을 하는 모양인지 체모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달 스퀘어 연예 뉴스를 책임졌던 아이돌 마약 사건 기사가 지서의 뇌리를 스쳤다. 검사를 피하기 위해 염색을 여러 번 하고 왁싱을 했다고 했었지. 고은기 머리는 자연 갈색 같았는데. 타투……. 그때 봤을 땐 목에 그거 하나였지만 벗기면 온 등판이 용 문신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옆집 할머니 장례도 돕는 효자 약쟁이라니.

오늘따라 이지서 상상력이 풍부하다.

“은기 햄스트링 수술한 지 얼마나 됐지?”

“9개월 정도 됐어요. 왜요? 안 좋아요?”

“아니야. 관리 잘하고 있어서 물어본 거야.”

침대에 엎드려 있는 은기의 바지를 위로 올려 준 트레이너가 종아리와 허벅지에 마사지 크림을 듬뿍 발랐다. 경기 도중 경련이 일면 스프레이 같은 약품으로 응급 처치를 하는데 체모가 있으면 흡수가 늦고 피부에 염증이 생길 확률도 높아 왁싱을 하며 관리해 주는 편이었다. 오늘은 인터벌 트레이닝 강도를 평소보다 높여서인지 마사지 크림의 차가운 기운이 근육에 닿자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게 매일 치료실 들렀다 가라니까.”

“……급한 일이 있어서요.”

혹시나 지서가 말도 없이 서울에 가 버릴까 봐 이렇게 누워 있는 지금도 불안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휴가 기간이면 은기는 한국으로 돌아와 유소년 시절 몸담았던 팀에서 개인 훈련을 하곤 했다. 갑자기 근육을 늘리고 벌크 업을 하면 스피드나 신체 밸런스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전문 트레이너가 짜 주는 프로그램대로 진행을 해야 했다. 그래서 당초에는 3주 정도 팀 클럽하우스 숙소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서를 만나면서 모든 일정이 바뀌었다. 무연리에서 대구까지 왕복 두 시간 출퇴근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그 때문에 은기는 급하게 에이전시에서 노는 경차도 빌렸다. 공간이 좁아 경차에 몸을 구겨 넣고 다니는 은기를 보며 정훈은 네 키면 다리를 세 번은 접어야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타투 했네?”

어깨 근육을 풀어 주던 트레이너가 흘러내린 티셔츠 틈으로 드러난 타투를 보며 은기에게 물었다.

“네, 우승 기념. 타투 저랑 안 어울리지 않아요?”

“이왕 할 거면 크게 하지. 보이는 데다가.”

“그랬다가는 저희 아버지 뒷목 잡으실걸요. 이거 한 거 알면 한 소리 하실 거예요.”

에레디비시(Eredivisie: 네덜란드 프로축구 리그) 우승을 확정한 날짜와 팀 엠블럼을 목뒤에 그려 넣었다. 우승은 재작년에도 했지만 올해는 은기를 비롯해 팀 주축인 20대 초반 선수 다섯 정도의 이적이 확실시된다. 다시 이 멤버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아 섭섭한 마음에 친한 몇 명이서 타투를 했다. 가장 친한 팀메이트는 팔에 가족과 형제, 그리고 오랜 연인의 이름을 새겼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리기 전 그는 항상 팔에 새긴 연인의 이름에 입을 맞추곤 한다.

문득, 지서가 손으로 타투를 더듬던 감각이 떠오르자 목덜미가 간지럽다.

“올 이게 누구야! 고은기 아냐! 맨체스터 시티와 바이에른 뮌헨이 노린다는 고! 은! 기! 형을 길바닥에 버리고 간 고! 은! 기!”

팀 훈련이 끝났는지 마사지가 필요한 선수들 몇이 치료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그날, 지서에게 가기 위해 카페에 버리고 간 일로 어지간히 충격을 받았는지 정훈은 마주칠 때마다 저런 식으로 은기를 골려 먹었다.

“너 진짜 맨시티나 뮌헨 가?”

트레이너가 자신의 팔꿈치로 은기의 등 근육을 누르며 물었다. 안 그래도 어제인가, 영국에서 그런 기사가 나왔다며 한국 언론에서도 인용 보도를 하는 바람에 주변에서 다들 진짜냐고 연락이 쏟아져 하루 종일 휴대폰이 울려 댔다.

“아뇨. 그냥 하는 말들이에요.”

일본인 선수가 지난주 빅 팀으로 이적하는 바람에 한국 팬들은 우리도 질 수 없다며 고은기는 레알 마드리드를 가니 바르셀로나를 가니 난리였다. 요즘 은기의 이적 기사 댓글엔 알아주는 빅 팀 이름은 한 번씩 다 언급되는 것 같다. 당사자인 은기는 조용한데 온 축구 커뮤니티에서 그의 미래를 대신 계획해 주고 있는 중이다.

그대로라면 은기는 스물여섯 살에 프리미어 리그와 FA컵,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일궈 내고 스물일곱 살에 첫 발롱도르(Ballon d’Or: 전 세계 축구 선수 중 뛰어난 활약을 보여 준 개인에게 수여하는 상)를 수상하며 스물여덟 살에 국가대표 팀 주장으로 한국 최초의 월드컵 우승을 견인할 예정이다. 또 뭐라더라. 서른 살엔 우주 정복을 할 거라나. 그만큼 기대가 커서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에이전트에겐 가고 싶은 팀과 우선순위에 대해 이야기를 해 뒀고 실제로 협상이 꽤 진행된 팀도 있다. 이제 스물셋. 누가 봐도 최적의 이적 타이밍이라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괜히 말이 잘못 새어 나갔다가 협상이 꼬이는 수가 있으니 에이전트 쪽에서도 이에 대해 입단속을 부탁했다.

“그래도 은기는 언어가 되니까 좀 낫지. 원어민 수준이니까.”

수비수들은 특히 파트너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 포워드나 미드필더보다 더 언어 능력이 우선시되곤 했다.

“영어? 독일어?”

트레이너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은기는 프리미어 리그로 갈 거냐, 분데스리가로 갈 거냐 떠보는 말에 아무런 대답 없이 그냥 웃었다.

가장 가고 싶은 곳은 프리미어 리그다. 팀 간 격차도 적고 선수층도 두꺼우며 거칠고 속도가 빨라 처음엔 벤치에라도 앉으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경기장에 출근해도 명단에서 제외되면 관중석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날이 더 많을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수비수인 은기 입장에선 더 각오할 게 많았지만 그만큼 자신도 있었다. 이미 영국에서 뛰고 있는 대표 팀 선배에게 리그 분위기나 환경 같은 것에 대해 여러 번 조언을 구했다.

“영국 가, 영국. 나 너 프리미어 리거 되면 직관 갈 거야.”

정훈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한국인 센터백의 빅리그 이적이 처음이다 보니 팬들은 물론 선수들까지 은기에 대한 관심이 최고치를 찍었다. 아버지는 네가 그렇게 잘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는 게 아니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어쨌든 고은기는 한국 축구계가 주목하는 차세대 스타다.

그래서 은기는, 지서가 자신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거라고 생각했다.

“야, 너 그 여자랑은 잘되어 가? 날 버리고 간 보람은 있냐고.”

트레이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은기에게 가까이 다가온 정훈이 목소리를 낮추며 귓속말을 했다.

“징그럽게 왜 귓속말을 하고 그래. 저리 떨어져.”

은기가 질색을 하며 거칠게 정훈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몸싸움을 하는 줄 알았는지 옆 침대에 누워 있던 선수가 슬쩍 고개를 들어 둘을 보았다.

“아니, 걱정되니까 그러지. 잘되고 있냐.”

……지금 이게 잘되어 가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신을 철저하게 심심풀이 어린애 취급 하고 있다는 것.

“야, 설마 연예인은 아니지?”

“아니야.”

은기가 단호하게 말하자 정훈이 슬쩍 뒤쪽으로 턱짓을 했다.

“요즘 네 연락처 따려는 애들 겁나 많아. 조심해.”

치료실에 같이 들어온 몇몇은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커다랗게 세우며 엿듣고 있는 눈치였다.

“여덟 살 연상이면 솔직히 네가 얼마나 애새끼로 보이겠냐.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일단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걸 어필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면서 연하의 패기를 같이 보여 주는 거지.”

말은 쉽지.

은기가 손을 까딱이며 정훈에게 가까이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정훈이 은기가 엎드려 있는 치료용 침대로 다가와 자신의 귀를 내밀었다.

“형.”

“응.”

“형이나 잘해…….”

소개팅 열 번, 그중 딱 한 번 연애 직전까지 갔지만 무산됐다. 어제도 은기에게 전화를 해 아무래도 자기가 눈치가 없는 것 같다며 땅을 치던 박정훈이 연애 조언을 하려 들다니.

은기의 말에 정훈이 주먹으로 때리는 시늉을 하고는 그를 흘겨봤다. 정훈의 말은 신뢰가 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연하의 패기는 도대체 어떻게 보여 주는 걸까.

“야, 고은기. 나 그분 사진 보여 줘. 카톡 프로필 사진 같은 거 있을 거 아냐.”

“……모르는데.”

은기의 대답에 정훈이 말이 되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번호도 안 따고 깝죽거린 거야?”

“타이밍이 안 맞았어.”

물론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마을 어른들을 통해서 쉽게 휴대폰 번호를 얻을 수 있지만, 왠지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자연스럽게 번호 따는 법 알려 줄까? 이거 나도 기준이 형한테 배웠어. 형이 형수한테 들이댈 때 쓴 방법이래.”

그런 방법이 과연 통할까.

이지서.

이름 세 글자만으로도 긴장된다.

은기가 오랜 시간 궁금해했던 환상 속 그녀는 주변을 압도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신비롭고 우아하며 매혹적이다. 부러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이면서도 쉽게 깨질 것 같아 불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곁을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이지서, 이지서……, 이지서.

은기는 입 안으로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 보았다. 혀를 움직일 때마다 지서의 혀가 자신의 입 안에 들어왔을 때의 야릇한 감각이 떠올라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이거 형들이 성공률 100%라고 했다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처음 그라운드를 밟았을 때보다 떨린다.

그라운드 안에서의 은기는 거칠게 상대를 압박하고 괴롭히는 타입이다. 공격수에게 얕잡아 보이는 순간 주도권을 빼앗기기 때문에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럽 리그에서 뛰는 아시안, 그중에서도 몇 없는 수비수에 나이도 어리니 경기 중 과도한 신경전과 인종 차별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요즘에야 VAR(Video Assistant Referees: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고 경기장 내 인종 차별에 대한 처벌이 엄격해지긴 했지만 불과 2~3년 전까지만 해도 은기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열여덟 살에 처음 네덜란드에 왔을 땐 힘들 때마다 한국에 전화해 할머니가 해 준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운 적도 있다.

그랬지만, 결국 이겨 냈지. 실패하면 될 때까지 했으니까.

“뭐야. 싫으면 관둬라.”

정훈이 삐진 시늉을 하며 반대편 치료용 침대를 향해 몸을 돌리려 했다.

“형.”

몸을 일으킨 은기가 그의 셔츠 자락을 붙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 알려 줘.”

폼 잡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지서는 나무가 우거진 그늘 아래의 평상에 앉아 딸기 맛 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시선은 저 먼 곳, 슈퍼 앞 나무에 고정된 상태였다. 마을로 들어오는 차는 두 시간째 한 대도 없었다. 차는커녕 오가는 사람조차 없는 더운 여름. 평소 같았으면 벌써 돌아와 괜히 주변을 알짱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을 은기도 아직 보이지 않았다.

초여름. 태양은 뜨겁고 공기는 무덥고 초록은 싱그럽다.

계절의 변화에 예민한 지서는 기온이 급격하게 바뀔 때면 한 번씩 크게 앓곤 했다. 여름은 더워서, 겨울은 추워서 힘들었다. 지금도 여름이면 혈압이 떨어지고 맥이 느리게 뛰어 어지럼증이 심했다.

어릴 적, 지서가 힘들어할 때면 박 여사는 여기 가만히 있으면 시원하다며 그녀를 평상에 눕혀 놓고 부채질을 해 주었다. 이제 나이를 먹어 보니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낮은 산에 둘러싸인 탓에 무연은 다른 곳보다 더위가 빨리 찾아왔지만 도시의 더위와는 결이 달랐다. 바람은 뜨겁고 햇볕은 피부가 따끔할 정도로 강했지만 서울 아스팔트의 지열처럼 순식간에 녹아 내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몇 입 먹지도 않았는데 아이스크림이 벌써 녹아 손으로 뚝뚝 떨어졌다. 먹는 속도가 느린 탓에 분홍빛 액체가 손목까지 흘렀지만 그녀는 자신의 속도를 지켰다. 뭐라 그럴 사람도 없고 집을 더럽히는 게 아니니 빨리 치워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지서의 고향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더운 바람이 불 때마다 평상을 덮은 나무 그림자가 흔들리고 담벼락을 덮은 장미 향이 코를 찔렀다. 붉은 덩굴장미와 잡초가 제대로 보수하지 않고 그때그때 어설프게 벽돌을 얹어 시멘트를 바른 담을 완전히 뒤덮었다. 처음 이 집에 온 일주일 전만 해도 이 정도로 만개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신기하다. 나무와 꽃을 보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모조리 다 원색이다. ‘붉다’보단 ‘빨갛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장미, 녹색 물감을 짜 칠한 것 같은 나무와 논, 그리고 새파란 하늘. 지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장미 담벼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남들은 촌스럽다 해도 역시 진한 붉은색이 좋다. 그림이나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었던 시절에 늘 제일 먼저 떠올린 컬러도, 플라워 클래스에서 꽃을 만질 때 택하는 센터피스도 붉은색이었다.

그때였다.

찰칵.

휴대폰 카메라의 기계음이 들려와 지서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좀 늦었어요.”

은기였다.

“사진 잘 나왔어요.”

언제 오나 하고 지서가 마당을 얼쩡거리게 만든 그 고은기.

은기가 보라는 듯 지서를 향해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지만 태양 빛이 워낙 강해 액정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서는 무의식중에 휴대폰을 달라고 손을 내밀다가 아이스크림이 묻은 것을 깨닫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은기가 지서의 팔꿈치를 슬쩍 잡아 자신 쪽으로 당긴다.

팽이처럼 그녀의 몸이 팽그르 돌고 은기는 어느새 지서의 뒤쪽으로 다가와 섰다. 몸이 맞닿은 건 아니었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지나치게 확실해 신경 쓰였다.

“봐요.”

다른 손을 넓게 펴 휴대폰을 가리며 그늘을 만들어 준 그가 말했다. 덕분에 지서는 접촉만 없을 뿐이지 은기의 품에 안긴 것과 다름없었다.

“잘 나왔네.”

손이 정말 크다.

“그렇죠? 저도 모르게 찍었어요.”

사실, 사진은 잘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근육과 핏줄이 팽팽하게 곤두선 팔이 신경 쓰여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뻐요.”

그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말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은기의 긴장이 느껴져 덩달아 의식됐다. 지서 자신에게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지서 씨 번호…….”

등 뒤에서 들려온 은기의 목소리에 지서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럴 거 같더라니. 어설픈 수작에 웃다가 지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연한 딸기 맛이 난다.

“휴대폰 번호 알려 주세요. 사진 보내 드릴게요.”

은기는 또박또박, 어색하게 ‘휴대폰 번호’라고 고쳐 말했다. 지서가 대답 없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런 애를 두고 약쟁이라고 의심했다는 걸 알면 본인은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잘생긴 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쑥스러우면 귀가 붉어지나 보다.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지서를 향해 내민 휴대폰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 손에 아이스크림 묻어서.”

그 말을 거절의 의미로 이해했는지 은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마 오는 내내 이 생각만 했겠지. 어떻게 말을 꺼내며 들이대나 고민하면서. 장미를 보고 있는 지서를 발견하곤 지금이다! 했을 거다.

은기의 미숙함이, 서툰 수작이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그의 박자에 맞춰 주고 싶기도 하고 엇박자를 놓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어 주고 싶기도 하다.

“대신 번호 불러 줄게.”

녹은 아이스크림이 그녀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 뚝, 아래로 떨어지며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네.”

은기가 웃었다.

여름을 닮은 미소였다.

해가 길다. 늦은 오후인데도 하늘은 단지 붉을 뿐이다.

지서는 노을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오는 은기와 그 뒤를 따르는 슈퍼 집 개를 창 너머로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후텁지근한 여름의 공기와 베일처럼 드리운 붉은 노을, 곡식이 무르익는 논. 늘 예민하고 경직되어 불안정했던 모든 것들이 편안했다. 급하게 서울에서 내려온 후 장례를 치르는 동안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질 것 같았던 신경은 무연리의 느긋함에 완전히 동화됐다. 고독이라 여겼던 것들은 이제 지서에게 마음의 고요를 선사한다.

복숭아와 자두, 살구 같은 여름 과일을 닦아 쟁반에 담는데 지서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 최태하 전무. 지서는 이름을 확인하곤 무감각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지금 이 전화를 받는다면 이 완벽한 평온은 완전히 깨질 것이 분명했다.

또다시 전화가 울리자 지서는 아예 최태하의 연락처를 수신 거부 해 버렸다. 어차피 이곳에 온 후 그녀의 휴대폰은 시계 정도의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도 없고 안식 기간 동안은 업무 연락을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다. 처음엔 열심히 기사 모니터링을 하고 오류를 바로잡아 주던 지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사이트를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정말 급하면 전화를 하겠지만 태하의 연락은 분명 업무적 필요는 아닐 거였다.

은기는 자신을 뒤따르며 짖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장난을 쳤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한 게 10분 전. 지서가 평상에 나가 디저트를 먹자 제안했고 은기는 모기향이 떨어졌다며 슈퍼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귀찮을 텐데 뭐 하러 그러냐며 지서는 대수롭지 않아 했지만 은기는 슈퍼로 향했다. 섬세한 구석이 많은 애였다.

한참 개를 달래 슈퍼로 돌려보낸 은기가 거의 뛰다시피 빠르게 지서의 집으로 오는 게 보였다. 창문으로 지서가 보이자 슬쩍 웃는 게, 주인 보고 좋아하는 멍멍이 같다.

동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 한 번도 키워 본 적은 없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가끔 외로울 때마다 반려동물을 키워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접은 것은 무서워서였다. 이유는 생각보다 나약하다. 이 외로움은 순간일 수도 있는데 혹시나 충분히 사랑을 주지 못할까 봐, 그러다 어느 순간 반려동물이 귀찮게 느껴질까 봐, 온 정성을 다 쏟았는데 그 애가 날 두고 먼저 떠날까 봐 같은 이유.

지서는 은기가 미리 챙겨 두었던 쟁반을 들고 평상으로 나갔다.

“은기 씨, 내가 할게. 이리 줘요.”

지서가 모기향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와 사투를 벌이는 은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놀림이 어설픈 게 흡연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알수록 의외투성이다. 이력이나 외모, 스펙은 딱 엇나가기 좋은 양아치 스타일인데.

그때, 또다시 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지만 누구인지 알 만해 그녀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최태하겠지.

지서는 치솟는 짜증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안 받아도 돼요?”

“응, 회사. 라이터 줘요.”

은기에게서 라이터를 받아 능숙하게 모기향에 불을 붙인 지서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줘요?”

“어, 아뇨. 전 담배 안 피워요.”

당황하는 그는 귀엽다. 그래서 계속 놀리고 싶어진다.

내가 이런 취향이었던가.

“지서 씨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봐요.”

그러면서 은기가 작은 소리로 몸에 안 좋은데, 하고 중얼거렸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 스트레스받거나 정신 사납거나 그럴 때.”

지서의 말에 복숭아를 자르던 은기의 손이 멈칫했다.

“혹시 제가 귀찮게 하는 거예요?”

말하며, 그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라이터를 켜려던 지서의 손이 멈칫하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소음이라곤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은기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노을의 그림자가 져 어떤 얼굴인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야. 아니에요, 은기 씨.”

지서는 반말을 했다가, 존댓말로 고치면서 조용히 답했다. 신입은 물론 인턴에게도 존댓말을 쓰며 곁을 준 적이 없는데 은기는 그녀의 담을 낮추고 선을 넘나든다.

“편해서 그래요. 원래는 다른 사람 앞에서 안 피우는데…….”

그때, 또다시 지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주 오늘 날 잡았네.”

지서가 담배를 길게 빨며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과는 또 다른 번호였다. 그녀의 기억이 맞는다면 태하는 라스베이거스의 장기 출장을 마치고 오늘부터 출근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들었겠지. 지서가 모친상을 당한 것도, 긴 안식 휴가를 떠난 것도.

“지금 전화 거는 그 사람 때문이에요?”

은기가 불쑥 물었다. 늘 조심스러워하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만큼은 억양이 경직되고 분명했다.

“응.”

지서는 부정하지 않았고.

“그럼 피우지 마요.”

은기는 그녀의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갔다. 그러고는 평상의 끄트머리에 꾸욱 눌러 불을 꺼 버리곤 아래로 툭 던졌다. 침묵과 함께 옅은 연기가 두 사람의 공간을 맴돌았다.

잠시 시선을 비스듬히 내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던 은기가 지서의 손을 자신 쪽으로 끌어갔다. 담배를 쥐었던 그녀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펼치고는 물티슈를 뽑아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은기의 손이 닿은 자리에서 그의 후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기온이 높은 여름의 오후. 타인의 체온이 기묘한 안정을 주었다.

“담배 몸에 안 좋아요. 피우지 마요.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은기가 똑바로 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새까만 동공에 노을이 스몄다. 얇지만 진한 샤프로 그린 것 같은 긴 눈매가 오로지 지서 자신만을 향했다.

그때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지서가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은기가 재빠르게 그녀에게서 휴대폰을 낚아채 갔다.

“이지서 씨 휴대폰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네. ……아뇨. 용건 있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태하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무슨 내용인지는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다만 은기는 그것을 가만히 들으며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지서가 휴대폰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 번 더 시도해 보지만 은기는 간단히 몸을 돌려 그녀를 저지했다.

“그건 곤란합니다.”

대답하며, 은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손에 깍지를 끼고 힘을 주었다.

“방해받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전화하지 마시죠.”

은기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지서의 휴대폰을 꺼 버렸다.

잠시 어색한 정적이 이어졌다. 늘 온화하던 은기의 온도가 차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사나운 얼굴. 지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다. 비틀리고 꼬인 최태하가 은기에게 호의적으로 굴었을 리 없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지금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지서 자신이었다.

지서는 손목을 비틀어 은기의 손을 떼어 냈다. 갑자기 훌쩍 선을 넘어 끼어든 은기에게 화가 났다.

“남자 친구예요?”

은기가 물었다.

“구 남친, 대학 선배, 직장 상사.”

지서는 경직된 어조로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은기에게 치부를 들켰으니 숨길 이유도 없었다.

최태하와의 관계는 단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만나는 순간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친모 아들.”

그 말에 은기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내 친모 의붓아들이에요. 현 남편의 전처 아들.”

지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좋았던 기억이 없어.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또 싸우고. 그것만 몇 년째라 좀 지겨워.”

그 누구에게도 꺼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말인데 뱉고 보니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왜 이 애 앞에선 치부와 약점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일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길 떠나면 다시 안 볼 사이이기 때문일까.

“개족보지.”

날씨가 이렇게 맑은데 귓가엔 장맛비가 퍼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뇌리를 스친다. 내가 좇던 것이 허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좌절감과 그날의 차가운 온도를 떠올리자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 버린다.

“그래서 친모가 나한테 발작하는 거예요. 난 버리고 갔으면서 그 아들은 자기 영혼을 다 바쳐서 키웠거든.”

누군가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지서는 차분한 얼굴로 은기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입을 연다.

“은기 씨, 오늘 이거 주제넘은 짓이에요.”

꽤 여러 번 느껴 본 통증.

“돌아가요.”

환상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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