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7)

05. 달아

이지서와 최태하 사이엔 수많은 접속사가 존재한다.

그런데, 그리고, 그러나, 그래서,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언어를 동원해야 할 정도로 너무나 많다. 아마 그 접속사들뿐이었다면 변덕이 심하고 확신을 주지 않는 태하와 곱게 굽힐 줄 모르는 지서의 관계는 지독하게 싸우고 그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서로를 위해 져 줄 줄 모르는 두 사람이라면 분명 그런 결말이 어울렸다.

문장과 문장의 관계를 결정짓는 접속사처럼 태하와 지서의 관계를 확정 지어 버린 접속사는 따로 있었다.

이지윤, 아니, 이제는 이주애.

지서의 친모.

‘이주애’라는 접속사는 지서로 하여금 태하에게 이별을 선언하는 계기이기도 했고, 그를 붙들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 처음 태하와 만났다.

그리고 스퀘어에 취직한 후 이주애가 찾아와 입사 포기와 함께 아들과의 이별을 종용했다. 그때 처음 태하가 누구 아들인지 알았다.

절실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주애를 괴롭히고 싶어 그를 붙잡았다.

태하와는 매번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이주애가 있는 한 이 관계에 미래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는 그녀에게 순수한 애정을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도 헤어진다.

죽일 듯 싸우며 이별하고 내일 또 만나겠지.

그런데…….

이제 그만하고 싶다.

지서는 꺼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꾸욱 전원 버튼을 눌렀다. 스마트폰이 켜지는 짧은 순간, 쌓여 있을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를 생각했지만 의외로 잠잠했다. 은기가 전화를 끄자마자 다시 걸려 온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전부였다. 최태하 성격에 아직까지 잠잠한 게 수상하다. 당장 다 뒤집어엎고 위치 추적 해서 여기 내려왔을 인간인데.

이 복잡한 관계에 대해 은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서의 축객령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뿐. 지서는 모기향이 다 타 재만 남을 때까지 평상에 멍하니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또 타인과 멀어지겠구나. 짧은 깨달음이 그 밤 유독 사무쳤다.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돌아가던 은기의 뒷모습이 눈에 밟혀 밤새 자리를 뒤척였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침 8시. 설마 싶었다. 그렇게 매몰차게 굴었는데 설마. 하지만 문을 열자 이제는 익숙해진 옅은 비누 향이 지서를 반겼다.

“잘 잤어요?”

은기의 넓은 어깨 너머에서 아침 햇살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눈이 부셨다.

“잘 못 잔 얼굴인데.”

“……은기 씨.”

“은기야. 이렇게 불러 주세요.”

지서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는 제가 잘못했어요. 지서 씨 불편하게 해서 죄송해요.”

충혈된 눈으로 그가 담담히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얼굴이 까칠하다.

“사과 안 받아 주실 거예요?”

은기가 조심스럽게 묻자 지서는 잠시 그를 응시하다 시선을 내렸다.

이건 분명 지서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당연히 멀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짧은 인연도 이대로 끝일 거라고.

“지서 씨.”

은기의 부름에 지서는 대답 대신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오늘도 챙겨 온 커피 텀블러를 숨기려 뒷짐을 지고 있던 은기의 몸이 살짝 굳었다.

가장 먼저 지서의 뒤꿈치가 들렸다.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얼굴을 당기자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입술이 닿는 순간 은기가 눈을 감았다. 늘 푸르고 곧은 침엽수를 닮은 눈매를 따라 빼곡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두 사람의 몸이 멀어지려는 순간 은기가 그녀의 허리를 안아 자신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걱정되니까.”

도대체 최태하가 뭐라고 했기에 은기가 이런 얼굴을 하는 걸까.

“은기 씨.”

지서가 입을 열자 은기가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은기야.”

이렇게 불러 달라는 듯.

“……은기야.”

“네.”

“나도 감정적으로 굴어서 미안해요.”

지서의 사과에 은기는 말없이 그녀를 한 번 꽉 끌어안고 놓아주었다. 멀어지는 온기가 못내 아쉬웠다.

“저 금방 올게요.”

텀블러를 지서에게 건네준 은기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집을 나서려 했다. 그러자 잠시 망설이던 지서가 그를 잡아 세웠다.

“은기 씨, 이거.”

어차피 외출할 예정도 없고 전부터 신경 쓰였으니까.

“내 차로 가. 고속도로에서 경차 위험하니까.”

지서는 은기의 손에 자신의 차 스마트 키를 쥐여 주었다. 놀랐는지 은기가 외제 차 엠블럼이 선명한 차 키와 지서를 번갈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요?”

보통 운전자들은 자기 차 운전대를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 더군다나 20대 초반의 남자라면 대부분 거칠게 운전하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은기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묻는 말 같았다.

“괜찮겠지. 가져가.”

지서가 희미하게 웃으며 가라는 듯 은기를 떠밀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화해를 하며 관계를 이어 나가는 걸까.

“다녀올게요. 어디 가지 말고 집에 있어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화하고요.”

마치 연인 사이의 대화 같아. 몇 번이고 망설이는 은기의 모습에 지서는 하마터면 그를 잡을 뻔했다.

지서는 은기가 저런 얼굴을 할 때가 좋았다. 날 걱정하는 얼굴. 물질적 가치와 이해득실을 최우선으로 여겨도 결국 지서가 가장 약한 부분은 이런 사소한 것들이었다.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 애정 결핍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최태하와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면서도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유지했던 거겠지. 최태하만큼 지서 자신에게 관심 있는 사람이 없어서.

지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지난밤 은기가 가져다준 과일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살구로는 잼을 만들고 복숭아로는 푸딩을, 자두로는 타르트를 만들 계획이었다. 생각을 멈추려면 단순노동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다.

흐르는 물에 과일을 씻자 차가운 기운에 등줄기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아침부터 실내는 습하고 무더웠다. 머리를 올려 묶었지만 흘러내린 잔머리 사이로 땀방울이 맺혔다. 덜덜거리는 선풍기 바람은 소용이 없다. 서울에서는 느끼기 힘든 더위, 그 자체이다.

여름의 온도가 새삼스러웠다. 출퇴근은 차로, 점심도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지하 아케이드나 사내 카페테리아에서 사 와 자리에서 때우니 계절을 느낄 일이 없었다.

샌드위치 같은 핑거 푸드를 입에 넣을 때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박 여사가 해 주었던 음식이 떠오르곤 했다. 직접 낸 콩국물, 가마솥에 삶은 백숙 같은 것들. 그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광경이 있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불 앞에서 씨름을 하며 무언가를 만드는 박 여사와 그 옆에서 말없이 일을 돕는 지서, 자신. 갑자기 그 시절이 생각날 때면 직접 음식을 해 먹어야겠다며 부지런을 떨기도 했지만 혼자 먹는 식사는 맛이 없었다.

두서없이 생각을 이어 가며 살구를 닦다가 지서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해 본 적 없는 게 이렇게 많았다. 계절을 느끼는 일,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 일, 맛있게 먹은 식사.

왜 난 다 가진 줄 알았지.

은기가 밤새 그녀의 집 주변을 서성인 것을 안다. 집 지켜 주는 충견도 아니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기견도 아니고. 지서가 늦게까지 불면의 밤을 보내다 결국 선잠이 들었을 때, 그때서야 은기는 돌아간 것 같았다.

……그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제 고작 일주일 남짓. 지서 자신처럼 은기 역시 이곳에 머무는 동안 무료한 일상을 달래 줄 심심풀이 상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나이대 애들은 다 그런 법이니까.

……아니, 그러기엔.

은기의 선한 눈매와 차분한 목소리, 정직한 표정이 차례대로 지서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게 거짓이라면 슬플 것이다.

그때, 쾅쾅 누군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낡은 현관이 충격에 들썩이며 집 안 전체가 울렸다. 누군지 알 만도 해 지서는 손에 묻은 물기를 닦으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득, 손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문밖의 저 남자가 아니었다면 주애는 근조 화환조차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가 차게 식었다.

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정장을 흐트러짐 없이 차려입은 남자. 태하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불쑥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였다.

“전화받은 새끼는 어디 있어?”

2주, 아니, 3주 만이던가.

“왜 왔어?”

지서가 물었지만 태하는 대꾸도 않고 집 안을 훑어봤다. 그녀는 살짝 문을 열어 둔 채 그의 뒤를 따라 안으로 향했다. 매번 이런 식이다. 남 생각 따위, 예의 따위 안중에도 없지.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고 자신의 뜻만 관철시킨다.

“최태하.”

“그 새끼 어디 있냐고.”

태하가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냈다.

“너 내 기분 좆같이 만들려고 한 짓이면 성공했어. 다른 남자라니 상상도 못 했지 뭐야.”

간신히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 그가 꽉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만하자고 했잖아. 얘기 끝난 거 아니었어?”

지서 역시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난 출장 다녀와서 다시 이야기하자 했고. 동의한 적 없는데.”

“선배 약혼녀는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지서의 말에 태하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불쑥 다가와 양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가 그만하자고 하는 건, 너만 예뻐해 달란 소리잖아.”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강한 힘. 그의 모든 게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지서야.”

잡힌 것은 어깨인데 목을 조르는 것 같다.

“어젯밤에 전화 꺼 놓고 그 새끼랑 뭐 했어?”

“……몸 좋고 어린 애랑 뭐 했겠어.”

한때 이런 애정에 기대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초라하게 만든다.

“이건 또 뭐야.”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갑자기 태하의 미간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지서가 제지하기도 전에 태하가 그녀의 티셔츠 목덜미 부분을 잡아 내렸다. 모기 물린 자리. 그리고 은기가 며칠 전 깨물고 빨았던 그 자리에 태하의 시선이 꽂혔다.

“이지서 너 이거, 씨발, 나 돌아 버리라고 한 짓이지? 그렇지?”

사랑을 구걸하는 걸 그만두면 내 삶은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

지서는 자신의 어깨를 잡은 태하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입을 열었다.

“씨발이 뭐야 태하야. 말 예쁘게 해야지.”

“야.”

“전무씩이나 돼서 말본새가 그따위면 어떡해.”

“이지서!”

“천박하게, 조카가 이모 이름을 막 부르고.”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 이 관계의 정의는 하나였다.

“언니는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파괴와 몰락. 갉아먹기 위한 관계.

시작이 어쨌든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겠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편한 침묵이 이어지고 덜덜거리는 선풍기 소리만이 초라하게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지서는 이 위태로운 고요가 무의미하게 흘러간 지난 시간처럼 느껴졌다. 지서 자신을 버린 친모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고 또, 저 남자의 뒤틀린 애정에 기대고도 싶었다. 의미를 찾는 것조차도 낭비였던 시간들이 우습다. 뜻밖에도 박 여사의 죽음이 지서에겐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숨을 곳 없는 계절.

여름이었다.

처음부터 최태하가 누구인지 알고 시작한 관계는 아니었다.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대학 선배. 어렸던 지서는 그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시작했다. 타인의 애정에 목말랐고 그래서 그 얄팍한 관계에 의존하고 싶었다. 어리석게도 태하가 내 버팀목이 되어 줄 거라고 믿었다.

입사 합격 후 이주애라는 사람에게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박 여사의 수첩에 있던 그 연락처, 그 이름. 그렇게 미워했으면서도 지서는 ‘엄마’라는 말이 주는 안정감을 상상하며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다. 자신을 ‘태하 엄마’라고 소개하는 여자와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진 그랬다.

그때 처음 알았다. 그가 주애의 의붓아들이라는 것을.

주애와의 첫 만남은 지서에겐 일방적인 강요와 권유를 가장한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정신적으로 꽤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아마 지서가 또래처럼 평온한 환경에서 곱게 컸다면 이주애와의 만남으로 인한 상처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결국 지서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여자에게만큼은 막무가내로 굴었다. 여자의 약점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애는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서가 의도적으로 태하에게 접근했다고 생각했고 지서는 그 생각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래야 주애가 고통스러울 테니까. 그래야 지서를 떠올리며 노심초사해 하고,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며 불안에 떨 테니까.

어쩌면 모녀의 접속사가 최태하일지도 모르겠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건지 모르겠네. 약혼했다며. 나 상간녀 할 생각 없어.”

지서가 차갑게 말하자 태하의 미간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직 결혼 전이야.”

“결혼 전이면 그건 불륜 아니야? 나한텐 똑같아.”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다. 오늘 끝내야 한다.

“당신, 내가 그런 리스크 감당하면서까지 가지고 싶은 사람 아니야.”

지서는 명확한 답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러자 그와의 마지막 만남 때 애매하게 마무리했던 결론이 비로소 또렷해졌다. 눈앞의 저 남자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 본 적이 없으며 원한다면 무엇이든 가지는 인생을 살았다. 그는 지서를 위해 무엇 하나 놔 버릴 생각이 없다. 그녀를 위해 움직일 생각도 없다. 딱 그 정도의 마음이다.

태하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왜 네가 피해자인 척해? 너, 네 친모 엿 먹이고 싶어서 나 만난 거잖아. 처음엔 몰라서 만났다고 하더라도 나 이용한 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후벼 파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지서, 앙탈 부리지 마.”

단호하게 규정짓는 태하를 보며 지서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알 길이 없어 이제 와서 바로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일단, 지서 자신에게 의지가 없다.

“그래. 우리 쌍방 과실이야.”

평행선이다. 결코 만날 리 없어야 하는데 왜 저 남자를 만나서는. 지서가 이주애와 얽히는 것에 박 여사가 그렇게 예민하게 군 이유가 이제야 어렴풋이 와닿았다.

“그러니까 그만하자.”

저 남자는 평생 모르겠지. 지서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이주애’의 존재가 아니라 확신을 주지 않았던 그 자신이라는 걸.

“그만하자는 이유가 내 약혼 때문이야?”

태하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응. 난 그동안 당신이 나 엄청 사랑하는 줄 알았거든. 그런데 그게 착각이라는 걸 알았어.”

지서는 평온한 어조로 엷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편안했다.

“그러는 넌 날 사랑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이 결핍을 채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닌 거 같아. 아니, 아니야.”

그동안 지서를 지배한 감정들은 처음부터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명제였다. 그래서 늘 불안했나 보다. 내 안의 그림자는 타인을 통해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빨리 깨닫지 못해서 늘 위태롭고 버거웠다.

주애를 알게 된 후 이 양가감정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지배당했다. 태어날 때부터 박탈당한 모정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에 스스로를 연민하며 희망을 품고 애정을 구걸하면서. 하지만 처음부터 주애에게 지서를 위한 모성애는 없었다. 그저 삶의 걸림돌일 뿐. 지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좇았다.

친모를 향한 짝사랑이라니. 이 짝사랑을 억압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미워하려 애썼다는 걸 왜 이제야 안 걸까.

“……아니라고.”

아닌 것 같아. 아니야.

태하가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지서의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는 무언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때 갑자기 태하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지서를 향해 집어 던졌다.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오래된 창문이 깨지며 거실에 유리 조각이 쏟아졌다. 놀란 지서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납득 못 하겠는데.”

태하의 구두에 유리가 밟히는 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후볐다.

“지서야, 어쩌지. 난 납득 못 하겠어.”

다시 눈을 뜨자 그녀의 시야 가득 태하가 보였다. 지서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맨발 위, 쏟아진 유리 조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움직인다면 자신은 유리에 발을 베일 것이다. 그럼에도 상처받지 않는다면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마치 지금의 현실 같아서 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았다.

태하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가 손을 뻗으려 하자 지서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지서 씨, 신발 신어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가 툭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자 태하의 팔을 잡고 막아선 남자가 보였다.

은기였다.

“다쳤어요?”

그가 물었다.

“……아니.”

지서는 간신히 대답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다행이다.”

은기가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숨겨 태하에게서 떼어 놓았다.

지서는 은기가 가져다준 슬리퍼를 신으며 그의 등을 응시했다. 단단한 뒷모습이 무너지지 않는 커다란 벽 같았다. 태하가 완전히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 애라면 날 세상으로부터 숨겨 줄 거라는 터무니없는 믿음이 생기기도 했다.

“너구나. 어제 전화받은 새끼.”

최태하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지서는 이대로 은기를 안았을지도 모른다.

“제가 지금 끼어드는 거, 주제넘은 거예요?”

은기가 태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지서에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지서 씨가 거절해도 주제넘을 생각이었어요. 저 나가면 우리 집에 가 있어요.”

태하가 무어라 하건 말건 은기는 뒤로 팔을 뻗어 지서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끝까지 태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늘 온화했던 은기에게선 날 선 기운이 느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갔는지 헐렁한 티셔츠 아래로 팽팽하게 뭉친 근육의 실루엣이 또렷했다. 잔뜩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금방 올게요.”

그와 동시에 은기가 태하의 멱살을 잡아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태하가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은기는 매우 손쉽게 그를 제압했다.

딱 봐도 연식이 얼마 안 된 것 같은 벤츠, 새것이나 다름없는 스마트 키.

은기는 멍한 얼굴로 손바닥 위에 올려 둔 차 키와 차를 번갈아 봤다. 보통 운전자들은 자기 차를 남에게 함부로 넘기지 않는다. 특히나 지서처럼 경계심 많은 성격이라면 더더욱. 그런 사람이 이걸 줬다는 건……. 김칫국 마시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괜히 웃음이 났다.

바로 옆, 지서의 차와 나란히 주차해 둔 경차가 오늘만큼은 사랑스러워 보였다. 키가 큰 은기에게 공간이 좁은 경차는 여러 가지로 불편했다. 허리를 똑바로 세워 앉지도 못하고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거기다 은기는 한국에서의 운전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빨리 차 좀 구해 달라고 에이전시를 닦달한 게 어젯밤인데 지금 이 상태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지서가 계속 집에만 있을 거라면 외제 차라 직접 운전하는 건 부담스러우니 그녀에게 데려다 달라고 해 볼까 싶다. 간단한 체력 훈련이라 오전에 두세 시간 하면 끝나는데, 그동안 카페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고 점심을 같이 먹는 거다. 그러니까 데이트처럼. 어제 그 전화 이후로 가라앉은 지서에겐 기분 전환도 될 것이다.

“네, 저요.”

때마침 휴대폰 진동이 울리자 은기는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전화를 받았다. 에이전시였다.

― 은기야, 운전 중이니? 차 때문에.

“괜찮아요. 말씀하세요.”

이번에 스폰서십 계약을 한 자동차 브랜드에서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쓸 차를 준비해 주기로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구단 스폰서인 독일 브랜드의 차를 이용했고, 가족들 모두 해외에 거주하는 까닭에 한국에 오면 이동은 에이전시에서 도와주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친정 팀 트레이닝 센터에 틀어박혀 개인 훈련을 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차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신경도 별로 안 썼는데.

― 이번 주말 지나면 차 나온다고 하는데 많이 불편하면 대구 쪽 렌터카 빌리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아.”

어쩔까.

은기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지서의 벤츠 키를 소중한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만지작거렸다.

“괜찮을 거 같아요.”

분명 지서라면 은기의 제안에 응할 것이다. 갑자기 자신이 생겼다.

― 급하다며. 괜찮아? 정훈이가 픽업해 주기로 했어?

유소년 시절부터 은기의 일을 봐준 에이전시 대표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건 아니구요. 음, 어쨌든 픽업해 줄 사람 찾았어요. 저 괜찮으니까 그쪽에다가도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 주세요.”

― ……은기 너 혹시.

대표가 말을 멈추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은기 또래의 아들이 있는 대표는 눈치가 빠르다.

― 여자 친구 생겼니?

“어…….”

― 맞네. 여자 맞네.

“아직은 아니에요.”

여자 친구라니. 뭔가 간지러운 말이다.

― 어쩐지 클럽하우스에서 지낼 거라던 애가 갑자기 할머니 집에서 다니겠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뭐 하는 사람이야. 배우? 아이돌? 연예인 지망생이거나 그런 애들이야?

“그런 사람이었으면 제가 여기 시골에 있었을까요.”

은기의 대답에 대표가 그러네, 하고 쉽게 수긍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 너 지금 중요한 시기야. 연애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가볍게 놀지 말라는 거야. 아저씨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알죠.”

최종 수비수인 은기는 클린시트(Clean Sheet: 무실점 경기)가 아닌 이상 뭘 하건 욕먹기 딱 좋은 포지션이었다. 경기 내내 잘해도 종료 직전 딱 한 번의 실수로 대역죄인이 되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다. 현대 축구의 센터백은 수비뿐만 아니라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빌드 업 능력까지 갖춰야 하는 까다로운 포지션이지만 그에 비해 공격수보다 인정받지는 못했다.

― 빅 리그로 이적도 할 거고, 너 조금 있으면 월드컵 최종 예선이야. 괜히 기사 나고 말 나오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네, 조심할게요.”

― 그래, 뭐. 그나저나 뭐 하는 사람인데. 진짜 괜찮아?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스포츠에 관심 없어서 제가 축구 선수인 줄도 몰라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자존심이 상했다. 이제 유망주 취급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날 모르지?

― 그래, 몸 관리 잘하고. 오늘 훈련 스케줄은 어떻게 된다고 했지?

“필드 훈련은 다음 주부터 하구요, 이번 주는 하체 위주로 하려고요. 식단은 따로 안 하고 있어요.”

― 아마 오늘 저녁에 구단 관계자들끼리 이적료 조율하러 만날 거야.

“합의했어요?”

원소속 구단에서는 4,000만 파운드는 받아야 한다고 버티고 있고 런던에서는 2,500만 이상은 안 된다는 입장이라고 전해 들었다.

― 합의하려고 만나는 거지 뭐. 근데 양쪽 다 워낙 의견이 팽팽해서…….

협상이 장기화되면 리그 개막 직전에야 이적이 확정될 수도 있다.

“전 메디컬 테스트 준비하고 있을게요.”

대표에게 대답하는데 먼 곳에서부터 요란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마을이 워낙 조용한 탓에 더 시끄럽게 들리는 듯했다. 잠시 후, 길의 끝에서 마이바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차종인 탓에 밭에 나와 일을 하던 마을 사람 몇몇이 차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 전화 끊어야 될 거 같아요.”

은기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 차의 목적지는 지서의 집일 것이다.

예상대로 차는 지서의 집 앞에 멈췄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빈틈없는 정장 차림의 남자는 주소를 확인하고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일반인치고는 키가 꽤 큰 편이지만 은기만큼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생기긴 했는데 인상이 안 좋다. 성격도 나빠 보인다.

지서가 문을 열자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둘 다 사라지고 나서야 마당으로 들어간 은기는 평상에 앉아 현관을 노려봤다. 불투명한 거실의 유리창으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남자의 멱살을 잡고 끌고 나오고 싶었다.

별일이야 없겠지. 없어야겠지. 지서와 저 남자가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건 신경 쓰이고 싫었지만 관계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할 테니까.

……설마 관계가 은기 자신에게 안 좋은 방향으로 진전된다면.

최악을 상상하다 불쑥 밀고 들어온 생각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공허해 보이던 지서의 표정, 지나치게 차분하고 담담했던 음성, 나직한 한숨. 그동안 그녀가 겪었을 수많은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다 다시 잠겨 가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실 창문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놀란 은기는 벌떡 일어나 주저하지 않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깨진 유리, 맨발의 지서, 그리고 그녀 앞에 위협적으로 서 있는 남자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은기는 현관에 굴러다니는 슬리퍼를 하나 집어 들고 그대로 안으로 뛰어 들어가 지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서 씨, 신발 신어요.”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지서를 잡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갑작스러운 은기의 등장에 남자의 미간에 작게 금이 갔다. 아래위로 은기를 훑어보던 남자의 눈이 일순 커지더니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인지 알아본 눈치였다.

“다쳤어요?”

은기는 남자를 응시한 채 물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찔한 상황을 가정하자 눈앞의 남자에게 주먹질을 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아니.”

“다행이다.”

은기가 지서를 슬쩍 보며 웃자 남자, 태하의 눈빛이 변했다. 역시 한 공간에 있는 것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지서와 남자를 떼어 놓는 것이 우선이었다.

“금방 올게요.”

은기는 그대로 남자의 멱살을 잡아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구석진 곳에 태하를 끌고 온 은기는 그를 팽개치듯 벽 쪽으로 밀며 놔 주었다.

제법 키도 크고 꾸준히 관리한 티가 나는 몸이었지만 그래 봤자 일반적인 한국 남자였다. 유럽에서 피지컬 좋기로 유명한 공격수들과의 몸싸움에 이골이 난 은기에게는 댈 바가 아니었다.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숨을 몰아쉰 태하가 구겨진 옷매무시를 다듬으며 은기를 천천히 아래위로 훑었다.

“고은기?”

역시 알아보는구나.

“네, 제가 그 고은기 맞아요.”

골치 아플지도 모르겠다.

“뭐야. 어떤 새끼랑 굴러먹었나 했더니, 고은기였어?”

위력이 필요한 이런 상황에서 운동선수, 특히나 국가대표인 은기는 여러모로 불리했다. 더군다나 바로 몇 분 전, 중요한 시기이니 괜한 말 안 나오게 해 달라고 에이전트가 주문까지 하지 않았던가.

“셀카는 곤란하고, 사인해 드릴까?”

은기가 미묘하게 불량해진 말투로 웃으며 말하자 최태하가 얼굴을 구겼다.

몇 대 맞아 주면 되겠지. 맷집은 좋은 편이니까.

은기의 집은 소박하지만 깔끔했다.

거실 한가운데엔 굉장히 커다란 침대가 있었고 대각선으로 보이는 주방 싱크대엔 아침에 커피를 내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옆엔 페이지가 접혀 있는 책 한 권. 제목을 본 지서는 픽 웃었다. 책 제목이 ‘핸드 드립 커피 마스터’였다.

지서는 ‘핸드 드립 커피 마스터’를 집어 들고 앞에서부터 천천히 넘겼다. 꽤 진지하게 공부했는지 메모한 흔적도 있었다. 한글, 그리고 지서는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쓴 문장들. 잘생기고 단정한 얼굴만큼이나 글씨가 정갈하다. 책이라니. 상상도 못 했다. 칵테일로 여자 홀리게 생겨서는 하는 짓은 영락없는 무연리 토박이 같다.

“왜 이렇게 안 와…….”

지서는 혼잣말을 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체감으론 세 시간도 넘은 것 같은데 겨우 3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완력으로 은기가 밀릴 거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 왔어요.”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은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지서는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곤 멈칫했다.

“미리 말하는데 저 괜찮아요.”

은기가 엉망이 된 얼굴로 웃었다.

“생각보다 안 아파요.”

입술은 터졌고 뺨은 붉다. 멍이 들 것 같다.

“최태하는?”

가만히 은기의 얼굴을 확인하던 지서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최태하 갔어?”

“네, 갔…… 지서 씨!”

뛰쳐나가려는 지서를 낚아채 가볍게 안아 든 은기가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집으로 들어갔다.

“내려 줘.”

“싫어요.”

“그럼 내가 변호사 사 줄게. 그 새끼 폭행으로 고소해.”

은기의 품에 안겨 들린 상태로 지서가 그의 양 뺨을 감싸며 말했다. 운동 열심히 해서 싸움도 잘하는 줄 알았더니 누가 봐도 일방적으로 맞고 온 꼴이다.

“뽀뽀해 줘요. 그럼 나아요.”

속도 모르고 은기가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내밀었다. 지서는 인상을 쓰며 그의 입술에 자신의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닿는 감촉이 부드러워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문득 나약해질 때면 지서는 스스로를 세뇌하며 간신히 살아 냈다. 나는 지금 시간이 없다고, 우울감에 빠져 지쳐 있기에는 너무나도 바쁘다고.

하지만 박 여사의 죽음이 삶의 모든 이정표를 뒤바꿨고 지서가 가진 연료는 모조리 연소됐다.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고향에서 만난 어린 남자애에게 기대고 있다니. 괜히 헛웃음이 났다.

이 짧은 휴가가 끝나면 지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또, 혼자, 안간힘을 쓰겠지.

이제서 후회가 되는 것은…… 난 왜 그렇게 투쟁하듯 살았을까.

은기의 이 온기를 몰랐더라면 이게 외로움인지도 몰랐을 텐데.

진정으로 깨달은 이 외로움은 지금보다 배로 불어날 것이다. 지서는 그의 친절을, 미소를, 다정함을 평생 지우지 못한 채 외로움의 실체를 배워 갈 자신이 걱정됐다.

스스로 외로움에 대한 면역력은 제법 강하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제 자신이 없다.

은기가 그녀를 깊이 끌어안았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세게 안아 잠시 숨이 막혔지만 몸을 단단하게 감싸는 팔의 힘이, 그의 온도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미묘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전부 다 가지고 싶었다. 단 한 번이라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지서를 침대에 앉힌 은기가 몸을 일으키더니 등을 보이며 벽 쪽으로 돌아섰다. 배 쪽에 난 태하의 구두 자국을 숨기려 저러는 게 분명했다. 그러면 뭐 해. 등엔 핏자국이 있는데. 지서는 몸을 일으켜 은기에게로 다가갔다. 흰 티셔츠엔 작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지서는 손을 뻗어 은기의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등에 그녀의 손이 닿자 배의 상처를 확인하던 은기가 몸을 움찔거렸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엔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한 상처가 세로로 길게 나 있었다.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핏물이 흐를 것 같았다. 지서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매만지자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금세 등 근육이 날카롭게 긴장하며 팽팽하게 조여지고, 견갑골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며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킨다.

“이 몸으로 왜 맞고 다녀.”

분명 자신이 곤란해질까 봐 맞아 준 거겠지. 아는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지서의 마음과는 다르게 까칠했다.

지서는 은기의 티셔츠를 천천히 어깨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자 은기가 아예 셔츠를 벗어 버렸다. 다행히 긁힌 상처를 제외하고는 위험할 정도로 매끈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몸이 예쁘다. 곧게 뻗은 척추를 중심으로 어깨부터 허리까지 완벽하게 대칭을 이뤘다. 창을 통해 들어와 뿌옇게 번진 햇빛이 그의 어깨와 등을 따라 허리까지 흘러내리며 음영을 만들어 낸다. 지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것을 더듬는다. 어깨를 타고 내려와 허리까지 느릿하게 손을 움직이자 은기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경직되는 게 생생하게 느껴진다.

“저 허리 쪽이 따가워요.”

은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상처 났어.”

지서 역시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며 상처 옆을 간질이듯 만졌다. 머릿속에 뿌옇게 안개가 끼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목덜미에서부터 열이 오르고 뒤꿈치가 간지럽고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이상한 충동이 넘실거리며 발끝에서부터 차오른다.

“앞에는요?”

은기가 몸을 돌려 지서를 마주 보고 섰다. 그의 복부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일방적인 구타의 흔적을 보며 지서가 입술을 깨물자 은기는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상처로 가져갔다.

“아파요.”

몸을 숙인 은기가 뜨거운 호흡을 내뱉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만져 주세요.”

목소리가 지나치게 유혹적이다.

지서가 손끝으로 복근을 더듬자 잔뜩 성나 부풀어 오른 가슴 근육과 넓은 흉곽이 크게 오르내렸다. 양팔을 넓게 펼쳐서 안아도 한 품으로 모자랄 정도로 가슴팍이 넓고 두껍다. 전체적으로 밸런스가 좋고 날렵한 체형에 촘촘히 잘 만들어진 근육이라 옷을 입고 있을 땐 크게 체감하지 못했나 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솜씨 좋은 조각가가 오랜 시간 공들인 예술품 같다.

“……아.”

은기가 낮게 신음하며 더운 숨을 내뱉었다. 지서가 느릿하게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이 작게 경련했다. 별것 아닌 접촉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은기가 마음에 든다. 내 손 안에서 신음하는 그가 좋다.

두꺼운 팔이 그녀의 허리에 감겼다. 그는 다른 손으론 지서의 뒷머리를 안고는 잠시 그녀의 목덜미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흥분한 탓인지, 긴장한 탓인지, 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은기야.”

지서는 양팔로 그의 등을 안았다. 손바닥에 스치는 맨살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의 몸이 가볍게 들렸다. 몸을 단단하게 감싸는 압박감이 갑갑하면서도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안고만 있을 거야?”

그녀의 물음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뇨, 아니에요.”

짙은 욕망이 묻어나는 쇳소리. 말을 할 때마다 남자의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예민한 살갗을 스친다.

지서는 슬쩍 은기의 가슴을 밀어 냈다. 떼어 낼 줄 몰랐는지 그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은기의 바지 버클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새까만 눈 속에서 서서히 불길이 일었다. 투명한 빛이 어른거리던 눈에 욕망이 깃들고, 기이한 광채가 어른거린다. 버클이 열리고 지퍼가 내려가고. 모든 소리가 하나하나 그녀의 고막에 새겨진다.

은기의 하체는 뜨겁게 팽창했고 드로어즈는 약간 젖어 있었다. 지서는 검지를 밴드에 걸고는 슬쩍 아래로 내렸다. 안으로 깊이 손을 넣어 움켜쥐자 은기가 무너지듯 그녀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곤 몇 초쯤 숨을 멈췄다. 더운 여름날. 끈적한 공기가 밀도를 더해 간다.

지서는 손에 세게 힘을 주었다가 다시 느슨하게 풀어 주며 이를 세워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네 몸이 달다.

그래서 난 몸이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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